♣ 역사(歷史) 마당 ♣/- 프랑스

[나치 독일군에 의한 프랑스 주민 학살 사건]오라두르(쉬르글란)의 학살

Bawoo 2017. 11. 21. 21:36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프랑스어: Le massacre d'Oradour-sur-Glane
독일어: Das Massaker von Oradour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Car_in_Oradour-sur-Glane4.jpg;

파괴당해 유령도시가 된 오라두르쉬르글란의 모습.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인 1944년에 프랑스 중부지방의 작은 마을 오라두르쉬르글란(Oradour-sur-Glane)에서 일어난 독일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자 제암리 학살사건프랑스 버전.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오라두르쉬르베르 마을 근방에서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 정확히는 제2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2. SS-Panzer-Division ,,Das Reich“) 를 습격한 사건이 발단이었다. 이때 독일군 장교가 레지스탕스에게 생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독일 무장친위대는 독일군 장교의 구출 및 레지스탕스를 향한 보복을 목적으로 오라두르쉬르베르 남쪽에 있던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을 공격하였다. 마을을 포위하여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했고, 곧바로 독일군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남자들은 헛간에 가두고 여자와 아이들은 성당에 가둔 뒤, 남자들을 전부 총살하고 성당에 불을 질러 여자들과 아이들을 불태워 죽였다. 성당에서 빠져나오려던 사람들은 기관총에 맞아 죽었다. 차마 말이나 글로 전달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방법으로 잔인한 학살이 계속되었고, 마을은 다이너마이트로 완전히 파괴당해 사라져버렸다. 다스 라이히 사단에서는 이 당시에 400명 정도가 죽었다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아이들까지 합쳐 642명의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게다가 다른 마을 사람들도 오르두르쉬르글란 근교에 있었고 독일군이 이들도 본격적인 학살이 일어나기도 전에 첫 번째로 이들을 죽였다. 따라서 비공식적으로는 800명 죽었다고 보는 통계도 있다. 학살이 끝난 뒤 살아남은 자는 10여 명, 근교에 있는 사람들까지 합쳐도 28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기관총에 맞아 죽은 시체인 것 처럼 연기를 하는 등의 행동을 통해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프랑스인들이 이 학살을 그냥 넘길 리가 만무했고, 1953년 1월에 열린 보르도의 전범재판에서 이 사건을 다루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학살에 연루된 200여 명의 독일군 가운데 다수가 2차대전 중에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특히 장교급은 전원 전사[1]하여 생존자는 총 65명이었지만, 대부분이 동독에 살고 있어 실제로 체포되어 재판정에 끌려온 범죄자는 도합 21명이었다. 이 가운데 7명은 독일인이었지만 나머지 14명은 알자스[2] 출신이었다. 실제로 체포된 21명 중 20명은 자신들이 "강제 징집된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의지와 관계 없이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여 각각 5년형에서 11년형의 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알자스 지방의 격렬한 항의에 의해 의회 차원에서 모두 사면되었다. 독일인 징집병들은 같은 혐의를 적용받아 10~12년 정도의 징역형을 받았다. 단, 자진입대한 알자스인 한 명은 매국노라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동독에 남아 있던 전범들도 1983년 자체 재판을 거쳐 처벌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오라두르쉬르글란은 다시 재건되었으나, 원래 있던 마을은 학살이 일어났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사적지로 보존하여 전쟁의 참혹함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세계 3대 유령도시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폐허가 된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 입구에서는 이러한 말이 적힌 푯말 하나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파일:external/www.oradour.info/souvien1.jpg

기억하라!


2013년 9월 4일, 프랑스를 방문 중이던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이 오라두르쉬르글란을 찾아 독일군이 저질렀던 학살에 대해 다시금 사죄하고 나치의 잔재 척결을 다짐했다.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은 당시 있었던 일을 회고하였고 그 증언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1] 역사학자 맥스 해스팅스가 지은 '다스 라이히'에 따르면, 학살을 지시한 장교들과 이에 참여했던 병사들 대부분 노르망디 전투와 이후 이어진 팔레즈 포위망에서 전사하였다. 누가 학살의 주범들이 탈영했다가 총살당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릴 적어놓았는지 의문.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해야지 소설을 쓰면 안된다.[2] 1차대전 직후 독일에서 프랑스로 편입된 지방으로, 나치에 의하여 제3제국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출처:나무 위키]


---------------------------------------------

오라두르의 학살 (출처 Wikipedia 독일판)

1944년 6월 10일의 오라두르의 학살로 유명한 장소이다. 그곳에서 기갑보병부대연대 „지도자(Der Fuehrer)“부대에 속한 SS 기갑사단 „제국(Das Reich)“의 제 1대대 3중대가 작전기간중에 레지스탕스 소탕을 빌미로 모든 지역을 파괴하고 거의 모든 거주민을 학살한 사건이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남프랑스를 점령하고 있던 하인츠 람머딩 장군의 지휘하의 제 2 SS 기갑사단 „제국(Das Reich)“은 북쪽 전선으로 진격명령을 받는다. 진격 도중 수적으로 커진 독일대항 레지스탕스의 격렬한 보복공격을 받는다. 1944년 6월 9일 제 2 SS 기갑사단 소속의 99명의 독일군 포로가 투를에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 다음날 정오경에 SS 기갑보병연대 4의 3중대 소속 120명의 병사들이 리무쟁 지방의 북쪽 30km에 위치한 오라두르 쉬르 글란에 나타난다. 독일군은 그 마을에 레지스탕스 군인들과 병기고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고, SS 돌격대장 아돌프 디크만의 명령에 의해 시청앞 광장에 마을 주민들이 집결되었다. 디크만은 바로 전 레지스탕스에게 인질로 잡힌 돌격대장 헬무트 켐페에 대응하기 위해 그곳의 시장에게 30명의 인질을 고르게 하라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상부명령에 대한 대응으로 마을을 불태우게 하고 모든 남성들을 사살하도록 명령하였다. 3중대장 오토 칸은 전쟁이 끝난 후 도르트문트 전범재판에서 진술하기를 „디크만은 제게 털어놓기를, 제가 수행해야만 했던 오라두르에 대한 방화와 몰살을 명령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고 했다.

SS 병사들은 시청앞 광장에서 지역민들을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로 분류했고,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교회로 밀어넣었다. SS 병사들은 석조교회에 불을 질렀으며 교회탑을 폭파시켰다. 교회의 회랑을 향해 슈루탄들을 투척했고 셀수 없을 양의 총탄을 퍼부었다. 폐허가 된 교회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그리고 대략 200여명의 남자들은 차고와 헛간등으로 옮겨져서 사살되었다.

바로 이 하루에 무려 64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오라두르에서 몰살되었다. 그중에 단지 52명만이 신원을 확인될 수 있었다. 사망자중에는 207명의 어린이와 254명의 여성이 있었으며, 사살이 감행되던 단 한 곳의 헛간에서 5명의 생존자가 나왔다. 그들은 불타는 헛간에서 탈출하여 도망갈 수 있었다. 교회에서는 단 한명의 여성만이 생존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SS 독일군의 도착과 동시에 도망가거나 숨어서 독일군의 학살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라우디 헛간에서 생존한 로버트 헤브라스가 진술하기를

„제 왼쪽 팔과 머리카락은 이미 불이 붙었어요. 끔찍한 고통이었죠. 그래서 전 그 헛간 밖으로 탈출해야만 했어요..(중략).. 그래서 우리는 헛간 뒤쪽에 몸을 숨겼죠. 그곳에 두명의 SS친위대가
들어왔어요. 한명은 사다리를 타고 올랐고 그곳의 볏집에 성냥으로 불을 붙였죠..(중략).. 우리는 헛간의 불타는 곳에서 나와 근처로 기어갔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는데는 성공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토끼장에 숨었어요. 그러나 그곳도 불타기 시작했어요. 대략 저녁 7시경에 우리는 탈출을 감행했죠..(중략).. 전 공동묘지를 향해 줄달음질쳤고 독일군들은 절 발견하지 못했죠. 그곳에서 바라보니 모든 집들이 불타고 있었어요. 오라두르 전체가 불탔단말에요.“

디크만의 상관, 친위대 돌격대장 슈타들러는 디크만에 대해 전시법에 의한 수사를 지시한다. 그리고 독일육군원수 에르빈 롬멜, 리무쟁의 독일군 사령관 그라이닝어 장군 그리고 비쉬 정부수반 역시 학살에 대항해서 항의했다. 그러나 디크만은 사면되었다. 며칠 뒤 그는 노르망디에서 연합군 공격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학살에 참여했던 3중대의 상당수 역시 며칠 뒤 섬멸되었다. 히틀러는 하나의 소송을 제외하고는 다른 소송들은 금지시켰다.

전후 프랑스 정부는 오라두르를 재개발 하지않기로 결의하고 전상의 비참함을 알려주는 학습장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밑은 발제자 폰브라운의 글
-------------------------------------------------------------
>이사건은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 답답한 사건이다.
> 누구 잘못인가?
-------------------------------------------------------------

폰브라운님! 이래도 누구 잘못인지 모른다 하며 나치 편을 들 참이오!


이미지

실제 크기로 보시려면 클릭해 주세요
BEMIL085_116137_0.jpg
실제 크기로 보시려면 클릭해 주세요
BEMIL085_116137_1.jpg
실제 크기로 보시려면 클릭해 주세요
BEMIL085_116137_2.jpg


[출처:bemil.chosun.com/nbrd/gallery/view.html?b_bbs_id=10044&pn=0&num..    유용원의 군사세계 ]

---------------------------------------------------------------------------------------------------------------


[정보 출처-책제국과 낭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