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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질곡의 역사] 英ㆍ佛 제국주의가 찢어놓은 땅…쿠데타ㆍ독재로 신음

Bawoo 2017. 11. 26. 23:31



[글로벌 워치] 

 서구 열강 "나눠서 지배한다"…종파ㆍ정파ㆍ부족간 이간질
아랍민족주의 내세워 독립…뒤늦은 근대화ㆍ민주화 진통

아랍어로 '해가 지는 곳'이란 뜻의 마그레브(Maghreb)는 모로코,알제리,튀니지,리비아,모리타니 등 북서아프리카 지역을 지칭하는 지리 개념이다. 마그레브와 이집트를 합친 북아프리카 지역에선 이슬람 세력의 진출과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을 거치면서 복잡 · 다양한 민족,종교,정치 지형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반제국주의 투쟁과 △민족 갈등 △근대화 시도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근 · 현대사를 갖게 됐다. 자로 잰 듯 단순한 국경선과 달리 갈등은 매우 다면적이다.



◆이슬람 수난의 전초기지 

마그레브 지역에 아랍 민족이 진출한 것은 우마이야 왕조(661~750) 시대다. 이후 파티마 왕조부터 오스만튀르크 제국까지 시대별로 아랍 제국에 의해 '느슨하게' 통치됐다. 이 지역에 먼저 정착했던 베르베르족은 시아파나 이바디 등 독자적인 이슬람교 분파를 믿으며 이 지역의 민족 · 정치 지형을 복잡하게 했다.

북아프리카를 본격적인'갈등의 무대'로 만든 것은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었다. 마그레브 지역은 제국주의 침략의 첫 희생양이었고 뒤늦게 독립을 얻은 지역이기도 하다.  

아랍 제국에 큰 충격을 준 것은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이었다. 19세기 들어선 북아프리카 지역을 시작으로 아랍 이슬람권이 서구제국에 의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프랑스는 1830년부터 알제리를 점령했고,튀니지(1881년)를 보호령으로 장악했다. 1912년엔 모로코까지 세력 범위를 확대했다. 영국은 1882년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삼고,1889년 수단을 식민지로 삼았다. 후발 주자인 이탈리아는 1912년 리비아를 지배했다.  

북아프리카 지역 '땅따먹기'가 마무리된 1915년 영국과 프랑스 간 사이크스 · 피코 협약에 의해 쇠약해진 오스만 제국 해체작업이 본격 진행됐다. 그 결과 시리아와 레바논 등 중 · 근동에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령이 들어섰다.

◆좌절된 독립과 근대화 

이 같은 서구의 지배는 단순한 '정치적'충격 외에 깊은 정서적 · 문화적 충격을 줬다. "신앙심이 없는 자들에게 지배받는다"는 사실은 오래된 이슬람 사회의 근간을 흔들었다. 이슬람 전통에 대해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유럽세력에 이슬람 세계가 급속도로 종속적인 존재가 되면서 빠른 근대화로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노력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슬람권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새로운 문제들이 양산됐다. 19세기 오스만 제국 마흐무트2세와 마지드1세의 개혁,수에즈운하를 건설하면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꾀했던 이집트 실권자 무하마드 알리와 이스마일 파샤의 개혁 등이 결국 실패했다.  

이슬람 자구책이 실패한 뒤 서구 열강은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종교를 분파별로 나누고,지역적 정파들을 다시 분열시켰다. 의도적인 분열정책이었다. "나눠서 지배한다"는 정책 그대로였다.  

이런 열강의 분열정책은 후일 '조국 근대화'를 꿈꿨던 아랍 민족주의 세력에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중동 전문가 캐런 암스트롱은 "터키의 아타튀르크와 이집트의 나세르,이란의 팔레비 왕 등이 보수적인 이슬람교를 억압했던 것도 열강의 분열정책의 유산"이라고 지적했다.  

◆힘의 공백으로 사회 모순 분출 

20세기 초부터 아랍세계에서 민족주의가 일면서 아랍 민족국가 설립 움직임이 대두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엔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격렬한 반제국주의 움직임이 일었고,인근 중동보다 뒤늦은 1950년대 본격적인 독립이 이뤄졌다.     



1954년 모로코,튀니지에서 대규모 반프랑스 운동이 일어나 결국 프랑스는 독립을 허용했다. 프랑스의 무력 개입을 극복한 알제리도 1962년 독립에 성공했다. 영국의 반식민 상태였던 이집트에선 나세르가 1952년 집권 이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며 영국 · 프랑스와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과거 오스만 제국과 영국 · 프랑스가 장악했던 힘의 공백은 각종 혼란을 야기했다. 새로운 독립국가를 운영할 준비가 덜된 상태에서 각종 부족 간,민족 간 대립과 이념 · 계급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여기에 "통치권은 신에게 있지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이슬람 교리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현대 서구식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데 장애물이 됐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종교지도자들이 세속 왕조를 지지하는 타협안으로 1932년 왕정이 들어섰지만 북아프리카에선 이런 점진적 타협안이 자리할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이 같은 혼란상을 자양분으로 북아프리카 지역에선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고,지역 간 갈등과 금권정치에 기반한 철권 독재정치가 오랜 기간 유지됐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