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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독립영웅]압델카데르(Abdelkader El Djezairi)

Bawoo 2017. 11. 24. 23:46



알제리는 지중해와 사하라를 동시에 안은 광대한 나라이다.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영토를 가졌으며 동부 콘스탄티노이스에서 서부 오랑 지역까지 광활한 자연이 펼쳐질 뿐 아니라 멀리 페니키아, 로마, 반달의 문화가 해안 도시들에 스며있다. 무엇보다 중세에는 알모라비드(Almoravid), 알모하드(Almohad) 같은 이슬람 제국이 세워졌던 땅이다. 하지만 근세에 이르러 자신의 왕국을 세워 민족의 통합에 성공한 경우는 아니었으며 이 때문에 1600년대부터는 오스만 터키의 관할 지역이 되었고, 19세기에 와서는 이질적인 서구 문명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지중해 건너 프랑스의 통치는 1830년부터 132년간 계속되었는데 종교와 언어, 문화가 아주 다른 이 서구 문명의 지배를 끝나게 한 것은 질로 폰테코르보의 영화로도 유명한 알제리전쟁이다. 그러나 서구의 침략에 대한 알제리 땅의 항쟁은 1954년에 시작되는 해방전쟁이 처음이 아니다. 항쟁의 역사는 1830년 프랑스의 침공과 동시에 시작되었으며 유혈 저항은 1880년대까지 수십 년이나 계속되었다.


 

 

알제리 민족의 아버지 카데르의 어린 시절

에미르 압델 카데르(Abd el-Kader, 1808 ~ 1883)는 이 역사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사실 1925년 모로코 북단에서 소수의 리프인(Riffian)들이 에스파냐와 프랑스를 상대로 벌인 리프전쟁까지 북아프리카 일대의 민족 항쟁은 비범한 군사 지도자들에 의해 중단 없이 수행되었지만 세상은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압델 카데르를 모르는 북아프리카인은 아마 보기 드물 것이며 특히 알제리에서 그는 민족의 아버지로 불린다. 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작은 광장에는 그의 기마 동상이 서 있고, 그의 전투 장면은 대형 군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평화를 원하는 그의 푸른 눈매는 서부의 작은 옛 도시 티아렛에서도 만날 수 있다.

 

압델 카데르는 1808년 9월 마스카라 평원지대의 게트나에서 출생했다. 서부 지중해로부터 내륙으로 들어가는 이 지역은 모로코, 에스파냐와 가까워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옛 도시 틀렘센, 오랑, 마스카라에 살아 있다.

 

유력한 이슬람 지도자인 대 마라부츠 가문에서 태어난 압델 카데르는 이 땅에 오래 전해 내려온 이슬람식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말을 타고 전투 훈련을 하는 것과 종교, 철학, 신학의 학업이 겸비된 것이었다. 그보다 500년 전 이슬람 학문을 섭렵하고 동시에 군사와 정치에 능란했던 이븐 할둔의 교육과정을 방불케 했다. 1340-50년대에 이븐 할둔도 부친의 교육 방침에 따라 종교와 철학, 법학의 대가들 아래서 신앙을 깊이 하고 문예, 외교술, 통치력을 익혔으며 압델 카데르도 다르지 않았다. 코란을 완전히 외우는 것과 이슬람 성인전인 하디즈 열전을 암송하는 것이 기본이었고, 말을 타고 인근의 부족들을 탐방하는 훈련을 받았다. 부친 마히에딘은 또 아들에게 정기적으로 열리는 큰 시장(무세임)을 찾아 상품을 살피고 교역과 경제를 알도록 했다. 압델 카데르는 10대에 오랑의 스승에게 보내졌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로 잘 알려진 오랑은 에스파냐 문화와 북아프리카 문명이 뒤섞인 서 지중해의 항구 도시였다. 그러나 오랑에서 그가 본 것은 주민들을 향한 오스만 튀르크의 통치자들의 오만과 경멸이었다. 그는 15살에 마스카라의 집으로 돌아왔지만, 19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와 함께 이슬람의 성지인 동방의 메카를 향해 떠났다.

 

때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인 술탄 베이와 알제리 땅의 경쟁적 부족들 사이에 긴장이 높아가는 해였다. 1827년 부친 마히에딘이 아들을 동반하고 메카 순례를 하기로 한 것은 이 복잡한 정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방책이기도 했다. 한창 청년인 압델 카데르가 이 여행에서 보게 된 동방, 특히 이집트는 충격적이었다. 1798년 나폴레옹의 침략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국제적 경쟁 무대가 된 이집트에서는 이미 근대화가 진행되고 새로운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이집트 부왕인 알리 파샤는 영국인들을 내쫓고 성지인 메카를 탈환했으며 1828년은 그리스와 전쟁을 벌였으나 알제 술탄의 원조를 받은 그의 함대가 영·불·러시아 연합군에 패배한 직후였다. 알리 파샤는 서부에서 당도하는 거대한 순례 행렬을 맞아 마히에딘과 만나기를 원했다. 이 이집트 통치자는 마히에딘에게 서부의 사정에 대해 조목조목 물었으며 마그레브(Maghreb- 리비아,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북서부 아프리카 일대의 총칭)가 얼마나 경쟁 세력들 간에 탐욕의 대상이 되어 있는가를 깨달았다.

 

젊은 압델 카데르는 부친과 이집트 지도자 사이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으며 이집트의 관문인 알렉산드리아 항에 놀라움을 표하고 이러한 근대적 제도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러자 알리 파샤는 이 청년의 예리한 지적과 질문을 대하고 장래성이  많다고 논평했다. 순례 행렬은 카이로뿐 아니라 관습대로 주요 도시마다 멈추었고 압델 카데르는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에서 당대의 지식인들을 만나 그들의 강연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 육로와 사막, 바다와 도보를 거치는 2년의 순례 여행을 마치고 20세가 되는 1828년에 마스카라로 돌아온 그는 부족과 가문의 동맹을 고려하는 부모의 뜻대로 결혼했다. 압델 카데르는 종교에 완전히 투신하는 대신 아끼는 검은 말을 타고 책 한 권을 찾아 먼 거리를 왕복할 정도로 지적 욕구에 불탔다. 그는 또한 경건주의의 수피(이슬람의 신비주의자)파를 믿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영향력 있는 집안의 딸로 교양이 높았던 그의 어머니 조오라는 아들에게 독서와 함께 천짜기를 가르치면서, 종교적인 인간은 사치를 부리지 않고 입음새를 스스로 차려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일렀으며 이 가르침은 일생동안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생애는 학문과 종교로 예정되어 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슬람의 대학자인 알 가잘리이븐 루시드, 이븐 할둔이 모두 그의 스승이었다.

 

 

최고 군 사령관 ‘에미르’, 프랑스군과 대결하다

알제리 주요도시 지도

알제리 주요도시 지도

 

 

‘에미르’란 군 사령관과 통치자를 함께 뜻하는 아랍어인데 압델 카데르가 이 칭호를 받게 된 것은 역사적 사정에 기인했다. 1830년 6월 프랑스군대가 알제 인근의 해안인 시디 페루슈에 상륙한 후 곧 알제 점령에 성공하면서 알제리 땅의 정세는 급속하게 변화를 겪었다. 알제 함락은 마그레브와 온 이슬람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사실 프랑스군항 툴롱에서 알제리를 향해 출항한 함대는 약 30년 전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했던 나폴레옹의 함대와 비교했을 때 20배의 규모에 달했다. 7월 5일 알제를 통치하고 있던 터키의 데이는 프랑스군에 항복을 선언했고, 1671년부터 1830년까지 계속된 터키 관할 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애초에 오스만 제국이 이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세력을 뻗치게 된 것은, 1400년대를 지나면서 이슬람 제국들이 무너지고 이베리아 국가들이 왕성한 대외 팽창을 시작한 데서 연유했다. 1492년 그라나다 함락을 마지막으로 장기간의 이슬람 축출 운동에 성공한 기독교 왕국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대서양 건너뿐 아니라 지중해의 점거에 나섰으며 그러자 이 지역의 지배자들은 당시의 대제국인 오스만 터키에 원조를 희망했다. 알제리의 알제 주(州)는 터키의 최고 통치자 데이의 직접 지배를 받았지만, 다른 세 지역의 행정구는 그보다 낮은 급인 베이에 위임되었다. 따라서 서부의 오랑, 중앙의 티테리, 동부의 콘스탄틴은 간접통치 방식으로 구성되어 거의 독립적이었다. 1830년 이후 알제리 땅은 기존의 지배자인 오스만 튀르크의 군사력이 물러가고 프랑스군의 점령과 정복이 계속되면서 오랜 동안 자신의 터전에서 고유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운명이 파괴와 약탈에 맡겨져 외세에 대한 항쟁이 불가결한 형세였다. 한편 혁명과 제정을 경험하고 다시 세워진 프랑스의 복고왕정은 1830년 7월 시민적인 입헌왕정으로 바뀌었다. 이 마지막 왕정 체제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무너지지만, 여기서 세워진 제2공화정은 1852년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으로 귀결된다. 알제 총독과 프랑스 외교관 사이의 마찰을 빌미로 시작된 프랑스의 알제리 침공은 이같은 프랑스의 정치 변동에 따라 혼선은 빚었어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그의 고향 마스카라에 있는 압델 카데르 기념탑

그의 고향 마스카라에 있는 압델 카데르 기념탑


에미르 압델 카데르가 항쟁에 처음 참가하게 된 것은 그의 부친 마히에딘이 서부 오랑 지역에서 항전의 지도자로 나섰기 때문이며, 이 젊은이가 24세의 나이에 통합 사령관 에미르에 추대된 것은 그 자신의 경건성과 전투 역량 그리고 군대와 부족들에 대한 통솔력을 주요한 부족들이 곧 인정했기 때문이다. 1832년 11월 27일 오랑 주(州)의 부족들은 그를 에미르로 인정하고 충성을 바치는 서약을 했다. 1833년부터 압델 카데르는 마스카라와 틀렘센을 통제했으나 그가 우선 당면한 적은 오랑 일대를 지배하는 터키 부대였고 이 세력에 동조하는 알제리의 부족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분열과 대립을 조종하면서 강력한 군대로 침공해 들어오는 프랑스군이 있었다. 에미르는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모로코의 영국인들에게까지 유대인 중개상들을 보내 군량을 조달하고 화약과 총을 구입했다. 또한 군대의 지휘 체제를 조직했으며 상대방의 보병을 압도할 기병 편제에 주력했다. 압델 카데르는 말 위에서 밤과 낮을 지새우는 자세로 기도 외에는 전선을 떠나지 않았다. 때로는 150마일을 하루에 질주하며 전투에 임하였다. 1830년 7월부터 1833년 사이에 프랑스 부대의 약탈과 파괴는 걷잡을 수 없었다. 클로젤과 사바리가 지휘하는 알제리 정복전은 가혹한 형태로 수행되었다. 1834년, 1835년에 전투는 사방에서 벌어졌고 무기와 인력이 달리는 압델 카데르의 전법은 매복과 게릴라전이었다. 그가 서부에서 활약하는 사이에 동부 전역에서 프랑스군대에 맞선 것은 콘스탄틴의 베이 아흐메드였다.

 

1830년 7월부터 알제리인들의 재산과 토지를 제재하는 프랑스 법은 계속 발효되고 선동적 소문을 유포하는 자에 대한 벌칙도 정해졌다. 통행증 감시 경찰이 설치되고 무기와 탄약의 보유는 특별 형법에 처해졌다. 1834년 7월 루이-필립 왕 치세에는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소유를 위한 총독 정부가 제도화되었다. 에미르의 군대는 1835년 6월의 라 막타 전투 같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1836년부터는 프랑스의 뷔조 장군과 대결을 벌여야 했다.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 대군부터 군에서 자란 뷔조는 1836년이 지나자 휴전을 제의했고 1837년 5월 30일 압델 카데르와 뷔조 사이에 타프나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문안은 서로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겼지만, 프랑스는 알제리의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땅에서 압델 카데르의 권위를 인정했다.

 

 

프랑스군의 초토화 전략

타프나 협정 후 에미르는 현대국가인 프랑스와 대적하려면 알제리 역시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는 인식 아래 종교를 바탕으로 하는 독립국을 세우고자 했다. 그는 동부 카빌까지 통솔권을 넓혔으며 사하라의 오아시스로부터 동부의 요지 비스크라까지 점령했다. 알제와 북부 콘스탄틴 사이에서 프랑스군이 이용할 수송로와 통신 루트를 차단한 것이다. 1836년 새로운 수도의 주춧돌이 놓였고 부족들 사이의 전통적 차별이 폐지되었다. 조세는 코란에 따라 10분의 1을 징수했으며 공공재정은 사법관의 봉급에 할당했다. 틀렘센으로부터 메데아까지의 반경에 구슬 같은 형상으로 부대를 포진하고 군의 깃발과 전문 부서, 계급, 군복을 갖춘 군의 수립에 힘을 쏟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유럽인들의 심적물적 지원도 받았다. 문무를 겸비한 이 신비한 전략가이자 통치자에게 이끌린 사람들은 그의 부하였고, 그들의 적대자들이었으며, 유럽인들 포함한 여러 이방인들이었다.

 

프랑스 장군 뷔조는 알제리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1842년 뷔조의 알제리 총독 임명으로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군민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고 알제에 상륙한 뷔조는, 원칙은 간단하다고 천명했다. “아랍인들은 복종해야만 한다.” 뷔조는 우선 에미르와 근거지 사이를 차단하는 방책을 추구했다. 맹장 뷔조의 전략은 지금까지와 다른 알제리 초토화 작전이었다. 앞으로 20세기에도 계속될 것이지만, 알제리 정복에는 알제리인들이 사용되는 기법이 나타났다. 프랑스군대에는 수많은 알제리인들이 동원되거나 가담했으며 정규군으로는 수아브와 스파이스, 비정규군으로는 굼부대가 형성되었다.

 

1841년에서 1842년에 프랑스군은 해안가의 최전선 부족들이 제1선 거점으로 삼는 틀렘센, 마스카라, 메데아를 먼저 공격했다. 이어서 제2선으로 둘러선 세브두, 사이다, 보가리, 비스크라 같은 광대한 거리의 남부 도시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뷔조는 라찌아(파괴)를 정당하고 불가결한 전법으로 간주했다. 유럽에서 전쟁을 할때면 전선뿐 아니라 도시와 세관, 상업의 이익 거점을 파괴하여 패배를 받아내는데, 알제리에는 농업밖에 이익의 장소가 보이지 않고 더구나 촌락과 대농장이 따로 없기 때문에 파괴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인명뿐 아니라 온 마을의 가옥과 공공건물, 가축, 유실수, 정원이 불타고 파괴되고 꺾여 나갔다. 높고 험한 동굴로 피신한 사람들은 동굴의 입구를 모두 막은 불길에 의해 전원이 불타 죽었다. 동굴 전소 공격은 20세기 후반, 일제리의 작가 아시아 제바르(Assia Djebar)에 의해 문학으로 묘사되었듯이, 울레드 리아 부족 전원의 희생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스베아 부족이 피신한 동굴들도 생타르노 장군의 지휘 작전에 의해 같은 참사를 당했다. 동부 카빌까지 넓은 지역으로 번진 부족들의 봉기의 불길은 뷔조의 개입으로 종식되었다.

 

알제리 역사가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초토화가 초래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1830년에 300만 명이던 알제리 인구는 1872년 210만 명으로 추락했다. 군사작전으로 인한 전사를 포함해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전염병과 기근의 희생자들이 추가되었으며 나라의 틀이 와해되고 엘리트들은 흩어졌다. 수천 명이 튀니지, 모로코,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지의 오스만 제국으로 나갔다.”

프랑스군의 압델 카데르 스말라 점령. 그의 군대에 식량과 무기, 군수물자를 조달하던 스말라가 점령되면서 압델 카데르의 힘은 급격히 소진되었다.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보러가기

프랑스군의 압델 카데르 스말라 점령. 그의 군대에 식량과 무기, 군수물자를 조달하던 스말라가 점령되면서 압델 카데르의 힘은 급격히 소진되었다.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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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르 압델 카데르는 이 역사의 과정에서 패배의 수장이 되었다. 1843년 5월 16일 프랑스의 오말 공이 지휘하는 보가르 지역 작전에서 군대와 함께 그의 스말라는 점령되었다. 어느 배신자가 에미르의 행방을 밀고했던 것이다. 스말라는 이동 수도라고도 할 거대한 텐트촌이었고 끊임없는 에미르의 이동을 따라다녔다. “나의 스말라에는 무기 제조인, 마구 제조인, 재단사, 조직에 필요한 모든 성원들이 참가했다. 텔 지역의 아랍인들과 거래하는 시장을 열기도 했다. 군대 식량인 밀과 보리, 호밀은 이들이 조달하거나 아니면 북부 부족들이 공급했다.” 텐트 진영은 작은 원으로부터 큰 원을 그려나가는 형태로 정렬했다. 프랑스군의 조제프 반티니 중령과 그의 부하들이 에미르의 스말라를 덮쳤을 때 그 자신은 멀리 남부에서 전투 중이었으나 침입자들은 에미르의 책과 문서들을 날려버렸다. 에미르는 전투 중에도 언제나 문건과 책들이 가득 찬 궤를 옆에 두고 있었다. 프랑스 부대는 여성과 어린아이, 노인, 부상자들을 포로로 삼고, 남부와 서부로 기동전을 펼치는 에미르를 계속 추적했다. 압델 카데르는 계속 쫓기고 힘은 소진되었다.

 

 

알제리 민족해방의 빛나는 별

1843년 11월 11일 그의 정예 칼리파인 모하메드 벤 알레이의 죽음은 에미르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에미르는 잔여 병력을 모아서 모로코의 술탄에게 향했다. 모로코의 압드 알 라만은 피신처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식민지 군대의 공격에 응수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지휘자인 주앵빌 공은 모주앵빌로코의 탕헤르와 인근 도시에 포격을 가했고 뷔조는 1844년 8월 14일 이슬리 전투로 모로코군을 궤멸시켰다. 에미르 아닌 다른 알제리인들의 항쟁이 종식되지는 않았지만 1845년 뷔조의 공격이 강력해지고 프랑스의 식민화가 나날이 확고해지자 에미르의 게릴라 전법은 위축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카빌의 봉기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여러 부족의 지도자들은 전쟁에 지쳤으며 프랑스군의 영입과 약속을 받아들였다. 압델 카데르는 모로코의 리프인들 사이로 피신하면서 내부와 외부의 어려움 속에서 1846년 겨울을 버텼다. 그러나 그의 메데아 총독이 사망했으며 그의 아우들이 항복했다. 이어서 그의 부관인 벤 살레멘이 뷔조 장군에게, 또 다른 부관 부마주는 생타르노 장군에게 항복했다. 에미르는 모로코인들의 지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리프에서 모로코인들의 덫에 걸린 압델 카데르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고,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에는 군대뿐 아니라 국가 제도의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깊이 깨달았다. 그는 마침내 1847년 12월 23일 프랑스군의 라모르시에르 장군에게 항복했다. 프랑스의 오말 공작이 임석한 항복식은 가자우에 모스케에서 행해졌으며 에미르는 그 자리에서 그의 검을 내려놓았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에미르 일행이 그 검을 운반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승전을 기념한 프랑스의 전쟁화는 항복의 표시로 에미르가 검은 말을 선물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3명의 부인과 자녀들, 부하를 합하여 97명의 에미르 일행은 먼저 프랑스의 남부 소도시 포에 수감되었으며 곧 주교들의 진정으로 앙부와즈 성으로 옮겨져 양호한 상태로 연금 생활을 했다. 에미르는 여기서 일종의 문예 살롱을 열었고 프랑스인들에게 이슬람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의 저작 가운데 하나인 [프랑스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1850~55년부터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852년 10월 나폴레옹 3세의 석방령이 내려졌고, 1855년 그는 알제리로 귀환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프랑스 정부의 연금으로 시리아의 다마스로 옮긴다. 1223년 안달루시아의 이븐 알 아라비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에서는 오스만에 반대하지만 이슬람의 근대화를 이룩하려는 지식인들의 개혁논쟁이 한창이었다. 다마스에는 약 1만 5천명의 알제리인과 튀니지인들이 있었고 에미르는 여기서 신학을 가르치며 남은 생을 보냈다. 그는 수에즈운하 계획이 아랍 민족들에게 유용할 것이라 판단하고 운하 시공에 협조하는 뜻을 아랍 지도자들에게 표했다. 서구식 근대화와 부족 종교 공동체의 와해 사이의 혼란 속에서 일어난 1860년 반(反) 크리스천 운동 때에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마스의 크리스천 공동체를 보호했다. 이 개입으로 로마 교황과 프랑스 및 유럽 각계에서 압델 카데르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왔으나 그는 사사로운 영예나 훈장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슬람인 그가 크리스천들을 보호한 것은 만인이 신의 인간이라는 그의 신념, 프랑스군에 대한 항쟁 시에도 포로를 보호하고, 여성 포로는 그가 가장 믿었던 어머니에게 맡긴 그의 인류애의 발현이었다고 평가된다.

 

이제 비록 그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식민 지배에 대한 알제리인들의 항쟁은 1847년에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 식민지배의 교묘한 농토 수탈과 이에 따른 궁핍화로 농민들은 유랑했으며, 1867년과 1868년의 대기근으로 민중의 상태는 더욱 처참해지자 카빌의 봉기가 일어났다. 1864년 서부 오랑 주에서는 시디 세이크 지휘 하의 항쟁이 10년을 계속했다. 그러나 식민지의 민족운동은 1차 세계대전 후 정치 운동으로 방향을 틀었고, ‘북아프리카의 별’이 알제리 최초의 민족운동 조직으로 나타났을 때 이 운동은 에미르의 손자 엘 에미르 칼레드의 지도력에서 구심점을 찾았다. '북아프리카의 별'은 비록 단명했으나 파리의 이민 노동자들과 소수 알제리의 지식인들이 하나 되려는 민족운동이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통일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밝힌 정치조직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메살리 하즈와 페르하트 압바스의 두 갈래 정치운동이 뿌리를 내리고, 이슬람의 지적 유산이 다시 민족운동에 합류한다. 1954년 시작되어 7년 반의 무장항쟁으로 1962년 7월 식민지 해방을 이룬 알제리 민족주의의 도도한 흐름은 패배하고 쓰러진 19세기의 무장항쟁으로 거슬러 오른다.  


알제 광장에 세워진 압델 카데르의 기마상<출처: (cc) Lakamira at fr.wikipedia.org>

알제 광장에 세워진 압델 카데르의 기마상
<출처: (cc) Lakamira at fr.wikipedia.org>

 

그런 만큼 1966년 7월 독립 축제를 맞아 알제리 정부가  에미르의 유해를 시리아의 다마스에서 알제의 엘알리아 묘지로 이장한 것은 신화 만들기가 아니라 자존의 표현이었다. 알제 광장의 뷔조 장군 동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압델 카데르의 기마상을 세운 것은 총칼, 또 기술력에 예속되었지만 알제리 그 땅에 전투의 역량이 있었고 전쟁을 넘는 인본의 도량이 실재했다는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참고문헌
이브 라코스트 지음, 김정숙 옮김, [마그레브 북아프리카의 민족과 문명], 한울아카데미, 2011;  김화영,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마음산책, 2006; 영화, 질로 콘테코르보 감독, [알제 전투], 1996; 영화, 무스타파 아카드 감독, [사막의 라이온], 1981; 영화, 라시드 부샤렙 감독, [영광의 날들], 2007.

 

 

 

노서경 / 강릉원주대학교 사학과 강사
불문학과를 나왔고 서양사학과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사이에 일간지 신문기자를 지냈으며, 외국기관에서 공보직책에 관한 일을 맡기도 했다. 서구 사회주의와 관련된 정치사에 관심이 있고 식민지 치하의 북아프리카 정치상황을 함께 공부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장 조레스, 그의 삶], [이븐 할둔] 등이 있다.

 

 [정보 출처-책제국과 낭만  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