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
출간 당시 이적 출판물로 간주하여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탓에 책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도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알려졌을 거로 생각된 작품. 30년도 더 전인 내 나이 30 초중반이던가...?
그걸 70을 몇 달 앞둔 나이에 읽게 되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작가의 역량에 비해서는 작품성 면에서 많이 미흡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빨치산 출신인 부모와 부모 지인에게서 들은 빨치산 활동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엮은 느낌. 때문에 2권째는 굳이 정독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정도였다. 빨치산 관련 다큐성 작품으로는 '이태 씨의 남부군[남부군:이태]이 훨씬 낫다는 느낌. 아무튼 작가의 주옥같은 단편-"숲의 대화:정지아"-에 비하면 문학성은 한참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 초창기 작품이라는 걸 고려해도 기대치엔 많이 미흡했다. 30년 이상을 벼르다 읽게 된 탓에 기대가 너무 컸었나? ^^
복간판 서문
프롤로그 - 빨치산의 딸
제1부 조국이 부르다
1. 혼돈의 역사 / 2. 운명의 길 / 3. 5.10단선 반대투쟁 / 4. 한민족에게 총을 겨눌 수는 없다 / 5. 백운산의 봄 / 6. 지리산 호랑이 박종하 / 7. 남한 유격투쟁의 전범 9.16결투 / 8. 중앙당을 연결하라 / 9. 시련의 시기 / 10. 드디어 해방이다! / 11. 인민의 나라 / 12. 김일성 수상의 남반부 순시 / 13. 어머니의 눈물 / 14. 9.28후퇴작전, 그 짧고 무더웠던 여름 / 15. 다시 백운산으로 / 16. 곡성군당 위원장을 맡다 / 17. 빨치산 생활에 대비하다 / 18. 세계 최초의 세균전 / 19. 꿈 이야기 / 20. 공포의 네이팜탄 / 21. 지리산 파송작전 / 22. 드디어 남부군을 만나다 / 23. 곡성 해방작전 / 24. 수도사단의 대공세 / 25.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 26. 봉두산 분트 시절 / 27. 지하침투 제1호 / 28. 어쩔 수 없는 선택 / 29. 새로운 생활 / 30. 끊임없는 추적 / 31. 체포, 그리고 사형선고 / 32. 남한 사회주의자의 최후
제2부 지리산의 영웅들
1. 여자라는 굴레 / 2. 굴레를 벗고 / 3. 빨치산이 되다 / 4. 이현상과의 첫 대면 / 5. 우연한 만남 / 6. 너의 뒤를 따르리라 / 7. 불굴의 투사 / 8. 이현상부대 정치지도원으로 / 9. 새로운 사랑, 새로운 삶 / 10. 무주 입성 / 11. 전선을 향해 / 12. 낙동강 전선을 넘다 / 13. 머나먼 북상길 / 14. 후평리 반전 / 15. 남부군의 고향, 지리산으로 / 16. 남한 유격투쟁사에 빛날 영웅의 최후 / 17. 그리운 사람들 / 18. 어느 나팔수의 사랑 이야기 / 19. 기나긴 겨울, 머나먼 해방 / 20. 사지에 몰린 남부군 / 21. 피의 전적 원한의 대성골 / 22.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 23. 절망 속에 싹트는 봄 / 24. 상선 연락대의 전멸 / 25. 남부군을 떠나다 / 26. 남부군의 최후 / 27.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 / 28. 멀어지는 지리산
《빨치산의 딸》은 작가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계간 <실천문학>에 4회에 걸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내로라하는 작가라 할지라도 쉽게 쓸 수 없는 장편의 역사드라마를 어린 나이에 거침없이 써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현대사의 핏빛 소용돌이에 뛰어들어 모진 고초를 겪은 작가 가족의 수난사였기 때문이다. 남로당 전남도당 인민위원장이었던 아버지와 남부군 정치위원이었던 어머니를 둔 탓에 작가는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어린 나이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무게의 멍에에 짓눌려 어두운 성장기를 보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춘기의 작가가 부모님과 마음의 담을 쌓은 채 자기만의 세계로 칩거한 것은 어쩌면 가장 자연스런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이 들고 현실과 역사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떠가면서 작가는 순수한 대의를 위해 젊음을 바쳤지만 이루지 못하고, 죽음보다 더한 사회의 냉대 속에 쓸쓸히 늙어가는 노부모를 이해하게 된다. 지아, 남로당 빨치산의 거점인 지리산과 백아산에서 따온 자신의 이름자에서부터 덧씌워진 천형을 비로소 기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빨치산의 딸》은 바로 그 화해의 접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글에는 기교나 재주를 무색하게 하는 묵직한 진정성이 담겨있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지만 그 기쁨도 잠시, 조선은 곧바로 혼란에 휩싸인다. 민중의 뜻에는 아랑곳없이 나라는 강대국에 의해 사실상 둘로 쪼개지고, 해방 전보다 쌀 생산량이 늘어났음에도 민중은 더한 식량난에 허덕였으며, 전국적으로 총파업이 일어났다. 구례구 철도원으로 일하며 평범한 나날을 보내던 청년 정운창은 이런 혼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여기고 누구나 돈 없이도 무상교육이 가능하다는 이북행을 감행하나 실패한다. 비록 학습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는 그 과정에서 몇몇 좌익 지도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감화되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 '유혁운'으 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이옥남,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숙원이던 공부도 하지 못하고 종갓집에 원치 않는 시집을 가 고된 삶을 살아가지만 마음속엔 늘 남녀가 똑같이 대우받는 세상에 대한 꿈을 품고 있다. 어느 날 그녀는 태평양전쟁의 말엽에 강제징용됐다 좌익이 돼 돌아온 남편을 따라 남로당에 가입함으로써 '이옥자'라는 가명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유혁운과 이옥자. 그들은 각자 자신의 새로운 이름으로 겪어야 할 처절한 운명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선택은 정당한 것이며, 그 선택에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면 그것까지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똑같은 선택을 하고 고통을 나눠질 수많은 동지들이 그들과 함께 했다.
정부의 끈질긴 토벌작전으로 와해 위기에 처한 구빨치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다시금 활기를 띠었고, 부산을 제외한 전국이 북한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그들로서는 새로운 해방을 맞는 듯했다. 그러나 50년 9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퇴로가 막힌 인민군이 대거 합세하면서 규모가 커진 빨치산이 후방 교란작전을 펴자 이에 큰 위협을 느낀 연합군은 전방부대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단행한다. 결국 빨치산은 믿었던 북로(북조선노동당)의 배신과 남한 군경 합동의 거센 공격 속에서 허망한 최후를 맞는다.
《빨치산의 딸》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 민족이 하나 된 세상을 꿈꾸었던 민초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그 순수한 신념만으로 처절한 역사의 비극 속에 맨몸으로 뛰어들었고, 자신들의 꿈이 이미 좌절되었음을 알고도 묵묵히 자신의 열정과 뼈를 산줄기 마디마디에 묻었다. 문학평론가 김형수는 이 책에 대해 "통렬한 과거사가 우리의 오늘을 만들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평했다. 역사는 그들처럼 배반당한 꿈을 위해 모든 인생을 걸었던 이름 없는 민초들이 흘린 피와 눈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소설의 형식을 띠기는 했지만 빨치산 활동에 직접 참여했던 인물들의 체험과 증언에 의해 철저히 뒷받침됐다. 전개되는 사건의 흐름과 지명,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물론, 사용된 단어나 구호까지 당시 빨치산들이 쓰던 대로 최대한 살렸다. 따라서 독자들은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을 넘어 한동안 그늘에 감춰진 채로 사장될 뻔했던 우리의 과거사를 다시 들여다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비이성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을 넘어 개방된 민주주의 시대로 나아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민족공동의 역사로서 객관적인 재해석을 필요로 한다.
책속으로
14연대가 외곡으로 들어오는 기동로를 차단하고 보급투쟁을 시작한 뒤 박귀성과 그는 한지공장으로 갔다. 선전부에게는 식량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종이였다. 개 짖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문을 두드리자 주인영감이 후닥닥 뛰어나왔다. 두 정정이 어둠 속에 시커멓게 버티고 섰는데도 영감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산에서 오셨그만이라? 고생이 많소. 뭐가 필요하신 게라? 쌀이야 우리 묵을 것도 없고, 경찰 놈들이 쌀 갖고 있으먼 산사람들만 존 일 시킨다고 싹 가져가뿌렀응께. 우리 묵던 보리는 쪼깐 있을 텐디 그거라도 좀 드리끼라?"
"식량은 됐습니다. 지금 종이가 얼마나 있습니까?"
"산에서 먼 종이가 필요허다요? 한두 뎅이 될란가 모르것는디.... 따라와보씨요."
"한 덩이에 얼마씩이나 허요?"
"이천 원은 받제라."
"여그 있소."
그들이 종이값으로 사천 원을 내밀자 주인영감은 굳이 그 돈을 받지 않았다.
"나야 촌영감이 되나서 잘은 모리지만 산사람들이 우리 겉은 민초들 잘 살자고 고생하는 것이야 알고 있소. 근디 나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먼 돈을 받것소. 우리 동네가 오늘밤 식량을 대주는 모양인디 딴 사람들 심정도 다 그럴 것이요. 그 돈은 뒀다가 나중에 더 존 데 쓰시오. 종이 두 뎅이 없다고 나 안 굶어 죽소." (1권 137~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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