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
일제 강점기 시절 자발적으로 체제에 순응해 남양까지 취업해 간 한 조선인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 기록.
내용의 충실도나 문장력 모두 미흡하지만, 강제 징용이 아닌 자발적인 일본 회사 취업으로 남양 지역에 가서
생활하고 정착한 한 조선인의 삶이 담겨져 있다는 걸로 만족하며 읽었다. 만약에 저자가 문학적 소양이 있었거나, 자신의 삶을 대신 기록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를 만났다면 대단한 분량이 될 수도 있는 내용이 너무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는 게 너무 아쉽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소개 -다음 책]
『남양섬에서 살다』는 일제 강점기를 살던 어느 조선인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그가 묘사한 사소한 장면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 당시의 노동자 임금이나 물자의 가격, 일본군과 일본 회사의 경영 행태, 남양군도에 가게 된 조선인들과 그에 수반하는 모집책, 일본과 조선, 태평양 섬을 이동하는 교통편이나 남양군도에 살던 현지 주민의 삶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그의 자필 회고록은 개인사 속에 펼쳐진 역사가 구체적이고 생생하기에 마치 어제 일을 보는 것처럼 잘 읽힌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개인이 보고 느낀 남양군도의 사회와 문화 및 역사를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전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하다. 또한 일제 강점기를 살던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자기 정체성의 혼란이나 인간적인 모습 등은 문학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의 삶이 모여 역사가 되고, 개인의 기록이 모여 역사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기억해야만 그 시간이 사라지지 않고 후세로 이어진다.
목차
남양군도 연구에서의 회고록의 가치
회고록 서문(1981년)
회고록 서문(1995년)
어린 시절 회고
만주로 가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는 단기대학으로 가다
동경고등척식학교
만주의 꿈은 수포가 되고 귀향
고향을 등지고 일본으로
남양무역에 입사
사이판 지점으로 전근사령(轉勤辭令)을 받고
사이판섬에 상륙하여 상하(常夏)의 나라를 구경하다
파간섬으로 첫 부임사령(赴任辭令)을 받음
파간도(島) 상륙과 남양무역사무소
도민 인부들과의 충돌
파간섬에서 6개월 동안
자살한 오키나와 사람을 목격
일본인 하라(原))라는 자의 가면(假面)
사리간섬에서 3년을
사사모토는 관리인일 뿐 나는 남양무역회사 사원 견습인
사리간의 실태
양돈과 면화 재배의 실태
들쥐(野鼠) 퇴치(退治)
사사모토(笹本) 가족의 반목을 해소
인부들에게 오락을, 자녀들에게 간이초급 교육을
3년에 한 번인 귀성(歸省)이 연기되어 한 달 동안 사이판 지점에서 휴가, 돈 10 일여에 바닥
섬사람은 섬에서 먹고 살아갈 수가 있다.
아라마간섬으로 영전(榮轉)
신임(新任)된 후 새 출발을 구상
전쟁 시국 하에서 벗어난 이도(離島)는 평화의 나날이다
年中行事로 오락과 위안을
낚시와 쏠창 대회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설날을
종자 돼지 새끼 도살 사건
정사(情事) 혐의(嫌疑) 소동
손손 부락에서 일어난 감독 가족과 다른 가족의 항쟁
마리아나군도(群島)는 적군 점령이 되려는 날만 가까워
육군 조사대 아라마간섬 상륙
시라미 함대(艦隊) 유인(誘引)으로 대환영하는 밤
드디어 예상했던 징용령이 내렸다
파간 섬에서 14개월 동안 생애 처음의 전쟁 경험
파간섬 미 기동대(機動隊)의 공습 하에서 생사의 투쟁(斗爭)으로
매일(每日)이 비행장 폭탄 맞아 뚫린 구멍 메우기 작전
야간작업(夜間作業)
돼지 잡이 일대 사건
비행장 수리작업을 포기하고 해군 진지 구축으로
1944년 9월이 아닌가. 설부대 소량배급도 종말(終末)
파간섬 남단(南端)으로 이동작전
만사는 오케이. 야마다와 나, 카누 선장 오하라, 일체감
바리야르 격절지(隔絶地)에서의 희비극
육군 내부의 갈등과 카누 1대 변상의 말다툼
현재의 처와의 애정, 드디어 결혼
아라마간섬 인부들을 위해 운명을 같이 해
만사(萬事)는 실패로 나는 송송으로 출두, 군법 재판을
일개인으로 전락(轉落) 생활에서 가지가지
일본 육군과 해군의 차이점과 기질
해방(解放)이 온다, 복잡했던 심경
파간 일본군 백기 게양(揭揚), 선상에서 항복서명
LST 미선(米船)으로 도민(島民)들 사이판으로 인양(引場)
사이판섬 상륙의 초보(初步)까지
백여 일 동안 민간 포로(捕虜)로서 사이판 한인캠프(Saipan Korean Camp)에서 지내던 기억.
캠프 자치 행정 조직
사법주임(司法主任)이란 감투를 쓰고
사법주임 행세(行勢) 중 기억이 나는 몇 가지
Camp 속의 인물들
우리 한민족은 해외에 살아도 단합(團合)이 힘들어
우리 캠프에서 보고 들은 소감(所感) 몇 가지
본국으로 인양(引揚)하는 교포들과 작별 후 이도(移島)
마쓰모토 라는 성으로 된 삽화
일제시대하 보고 들은 소견
회고록을 마치며
[출판사 서평]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36년 동안,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삶은 어땠을까. 어떤 이는 친일파로 살며 일신의 안위를 꾀하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벌인 태평양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청춘을 빼앗기고 아까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여기에 그 시절을 살아냈던 어느 조선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전경운이다.
한때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평안도의 오산고보 24기 졸업생이었는데 중학 시절에는 홍준명, 이중섭과 함께 임파 임용련 선생의 그림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그림은 취미에 그쳤다. 이중섭은 그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화가가 되었다. 그 또한 일본으로 유학하였지만 동경고등척식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생 전경운은 스물 다섯이 되던 1939년에 사이판섬으로 간다. 태평양의 섬들을 남양군도라고 칭하며 세력을 넓혀가던 일본 제국은 태평양의 섬을 개간할 회사로 남양무역주식회사를 지원했고, 그 회사에서는 그곳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전경운은 남양무역주식회사의 사이판 지점에서 야자원 관리인이 되었다.
전경운은 일본 회사에 입사한 조선인이면서, 야자원에서 일하는 원주민 인부들에게는 일본인 관리자였다. 하지만 그는 조선인 또는 일본인이라는 입장에서보다는 어떤 조직의 관리자로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에 대한 열중한다. 그는 사이판섬 북쪽 5도에서 근무하며 야자원 관리에서의 효율화를 꾀한다. 그의 방법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주변은 빠르게 변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 사이판섬 또한 전쟁터로 변했다.
그가 있던 사이판의 주변 섬에는 미군이 상륙하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은 그를 포함한 농장 인부들을 동원하여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려 한다. 그는 징집 명령을 받게 되었고, 일본 회사의 사원이었다가 일본군의 명령을 받는 존재가 된다. 그는 야자원에서 일하던 인부들을 인솔하여 일본군을 도우러 나갔고, 비행장 공사와 일본군의 식량조달 등의 일을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미군은 그를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분류한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의 결혼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후로 그는 티니언섬으로 이주해 갔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친다.
1939년에 조국을 떠난 이후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은 그로 하여금 지난 삶을 기록하게 한다. 1981년에 쓴 그의 회고록의 제목은 <남양살이 40년을 회고>였다.
10여 년이 지난 후, 자신이 쓴 첫 회고록을 잃어버린 그는 두 번째의 회고록을 쓴다. 그 10여 년 사이 그는 조국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고, 6.25 때 월남하여 한국에서 살고 있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 만남 이후, 그는 첫 번째의 회고록에서는 쓰지 못했던, 평안북도 정주에서 살던 시기, 오산학교에 다니던 때의 추억을 덧붙인 두 번째의 회고록을 쓰게 된 것이다.
그가 볼펜으로 쓰고 여러 번 복사해 묶은 회고록은 그 후 한국의 방송이나 역사가들에게도 전해졌고, 그가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정착해 살았던 티니언섬에도 일부 지인들에게 남아 있었다. 남양군도 연구, 특히 일제 강점기에 남양군도에 갔던 조선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조성윤 교수가 전경운이 남긴 회고록을 입수하였고, 내용을 편집하여 <남양 섬에서 살다, 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를 살던 어느 조선인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그가 묘사한 사소한 장면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 당시의 노동자 임금이나 물자의 가격, 일본군과 일본 회사의 경영 행태, 남양군도에 가게 된 조선인들과 그에 수반하는 모집책, 일본과 조선, 태평양 섬을 이동하는 교통편이나 남양군도에 살던 현지 주민의 삶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그의 자필 회고록은 개인사 속에 펼쳐진 역사가 구체적이고 생생하기에 마치 어제 일을 보는 것처럼 잘 읽힌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개인이 보고 느낀 남양군도의 사회와 문화 및 역사를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전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하다. 또한 일제 강점기를 살던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자기 정체성의 혼란이나 인간적인 모습 등은 문학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의 삶이 모여 역사가 되고, 개인의 기록이 모여 역사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기억해야만 그 시간이 사라지지 않고 후세로 이어진다.
그의 회고록은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백성이었던 조선인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그 시간을 견디고 살아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다양한 모습에서 복잡하고 다채로운 인간, 그리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게 한다. 어떤 사람의 개인사 속에서 사람을 보고, 그 너머의 역사를 보는 경험을, 이 책에서 하게 될 것이다.
ㆍ엮은이의 글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시절에 지금은 미크로네시아Micronesia라고 부르는 태평양 섬 지역으로 이주했던 한국인들을 조사해 왔다. 그 시기 일본은 그 지역을 남양군도(南洋群島)라고 불렀다. 우리에게 남양군도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노동자로, 병사로, 위안부로 끌려갔고,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간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된 지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남양군도에서 죽어간 이들을 잊고 있었다.
-티니언섬에서 나는 몇 명의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90년 이후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그 분들은 10년 이상 현지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 사정에 밝았다. 일단 그분들로부터 정보를 얻은 다음 한 분씩 집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남양군도 시절에 이주해 와서 1945년 전쟁이 끝난 다음에 돌아가지 않고 남은 한국인 남성은 모두 원주민 여성과 결혼한 경우였다. 1세대로 남양군도 여러 섬에서 생활한 전경운(全慶運)의 회고록 필사본은 읽기 시작하자 손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인생이었구나, 감동과 연민과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마쓰모토라는 이름을 쓰는 조선인을 재발견하는 시간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어졌다.
-그의 회고록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남양군도 시절 이야기이다. 두 번째는 1945년 수용소 캠프 시절부터 1951년 티니언섬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적었다. 마지막 세 번째가 티니언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이야기였다. 세 시기가 모두 특징이 있고, 각각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던 이야기들이 넘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세 번째의 농업 이야기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전경운이 회고록을 적어가는 태도를 보면, 자신이 맡아서 했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들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일들에서 부딪친 문제, 또는 자신이 나서서 해결한 일들을 아주 상세하게 적어갔다. 특히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가 문제를 해결했던 일들은 마치 소설을 쓰듯이 실감나게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는 어떤 국면에 처하든지 부딪치는 일을 적극 해결해 나갔다. 매우 열정적인 자세를 보이지만, 때로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가족을 돌보는 일은 물론 자신의 건강마저 해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특히 농업과 관련한 부분을 보면 그가 어떤 시도를 했고, 어떤 부분에서 실패하고, 또 실패를 딛고 다시 도전했는지를 잘 읽을 수 있다.
ㆍ본문: 전경운의 회고글
- 저는 일본말로 쓰는 게 쉽지만 그럴 수도 없어 한글로 써 보았습니다. 이 글은 일본말, 한자가 많이 들어있고 더구나 일제강점기의 섬 이름이나, 일본인을 대상 했던 만큼 일본말로도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위해서는 약도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읽기에 매우 힘들 것입니다.
원래 저는 문필가는 아닙니다. 또 고향을 떠난 이후 우리말을 쓸 수도 없었고 듣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거의 잊어 버렸습니다.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휘도 매우 변한데다 한국 표준말도 아니고 평안도 정주 방언이 섞여 있습니다. 그뿐인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회고록이니 만큼 문법에서도 많이 틀리고, 오자 탈자도 많아서 읽기에도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양해하고 천천히 읽어가며 전후가 맞지 않는 점을 미루어가며 이해하십시오.
-저를 소개한다면 1915년에 출생하여 당시 을묘생이라 하였습니다. 학력은 오산고보 24기(고교)를 졸업, 1935년 일본 동경으로 가서 2년간, 단기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당시 만주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아서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중국어와 기초 지식을 배웠습니다. 당시의 일제는 우리말을 말살하는 정책을 폈지만, 오산학교만이 비밀로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쳐 준 것이 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양에 나와 있어서 60여 년을 우리말을 별로 써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조건 하에서 우연히 기회가 찾아와, 1975년, 36년만에 처음으로 서울에 갔습니다. 남하한 우리 가족들과 친지는 물론 모교 오산학교의동기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재회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과 대화에서는 알아듣기는 했으나 말문이 막혀 진땀을 흘린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후 부터는 한글 책자와 신문 등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겨우 말문이 열린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의 이야기를 써 보려 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을 빕니다.
-내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 육성동이다. 생년월일은 1915년 10월 15일 을유생이다. 그때는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합병되어 식민지로서 수탈이 본격화 될 때요, 경부선과 경의선이 개설되어 있었고, 정주에는 철도기관 수리정비 기관이 설치되어 다른 곳보다 개화의 물결이 빠르게 진전되었다. 내가 난 시골은 정주 읍에서 20 리 정도 떨어져 있고 어느 읍이건 20 리를 걸어야 할 만큼 한촌 그대로여서 내 나이 네 살 때까지 삭발을 하지 않고 검은 댕기 머리털을 땋았던 기억도 난다.
-나는 척식과(拓植科) 소속이었다. 주로 야자원(椰子園)으로 간다고 했다. 포나페, 사이판 이 두 지점 어느 쪽이 될 것이다. 그러는 어느 날 사장이 나를 부른다기에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은 초면인데 대략 내 신분내력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엔 포나페 섬으로 보낼 것이었는데, 그 섬은 일본사람이 적게 사는 섬이고 신입 사원이라 사이판 섬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러나 사이판은 동경 시다마치와 다름없고 일본 사람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많다고 했다. 특히 임(林)모는 조선인은 남무(南貿)에서 매우 인기있는 인물이라며, 나도 우리 회사를 위하여 분발하여 달라는 격려의 말씀을 들었다.
- 회사에 입사하여 초봉이 46엔이었다. 수당 가산을 하면 약 70엔 정도로 매달 말에 봉투에 들어있다. 이것을 두 번 받았다. 전근을 가게 되니 사이판 지점에 도착하기까지 체재비와 월급 외에 지도금(支度金)으로 본사에서 70엔, 지점에서 70엔이 지불된다고 하였다. 나는 여름의 나라로 가는 고로 서둘러서 마로 만든 하복을 준비하였다.
-당시는 중일전쟁이 터진 지 1년 남짓, 일본 동경에서는 계란 배급이 시작되었다. 사이판은 항구도시로서 남양청이 있는 팔라우, 얄트, 포나페, 축, 얍 섬 등으로 가는 현관이었다. 5,000톤 선박이 매주 2-3회 사이판에 들렀다. 사탕수수 제당회사가 티니안, 코타까지 들어서 있어서 상주인구는 3만 이상이었다. 출입인구를 합쳐 5만이 넘었고 일본해군 23만(2-3만?)이 주둔하고 있어 명목상 항구도시로서 번창했다. 특히 환락설비가 불야성으로 네온싸인이 손님들을 유혹하고 물건과 식품이 풍부해 어디서도 전쟁 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육상교통은 버스와 경편철도로 섬 전체가 활기에 넘쳐 언제나 여름인 곳. 바닷물은 맑고, 산호가 넓어 고기떼 노는 것이 선명히 보인다. 지상천국에 왔다고 생각했다.
-조그맣고 초라한 일본식 숙사, 차모로식 생활, 먹는 것도 야채는 없고 물고기와 코프라 요리 뿐이니 자취하는 것도 문제가 많다. 처음으로 사사모토(笹本) 가족 일원이 되어 차모로 식사를 먹게 되었다. 숙소와 취사장은 떨어져 있었다. 저녁밥을 먹자고 사사모토가 안내하였다. 집은 야자 잎으로 지붕 벽이 되어 있다. 우리나라 돼지우리 크기 정도의 12척 곱하기 12척 정도의 크기에 마루만이 일본 목판으로 깔려 있을 뿐, 재료는 전부 섬에서 얻은 나무로 지어졌다. 외모는 보기 싫었으나 안은 매우 신선하였다. 조그마한 탁자상이 놓여 있다. 앉아서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놀란 것은 밥상이 더러운데다 새까맣다. 칼로 긁은 것처럼 밥그릇 녹슨 것이 조심스러웠다. 반찬은 코프라 요리로 된 생선국이다. 야채는 없고 밥뿐이다. 시장한지라 먹긴 했지만 내 맛이 아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가 해가 지는 무렵이었다. 야서군(野鼠群)의 습격(襲擊), 대형 쥐 대열이 기둥으로 올라가 밥상으로 떨어졌다. 놀랍게도 그 수가 100마리이다. 잠시만 눈을 팔면 태연하게 밥상으로 올라와 생선찌꺼기를 가로챈다. 그러므로 한 손을 단단한 회초리를 들고 쫓아 내지 않으면 손가락이 물린다. 나는 겁이 났다. 쥐를 쫓지 않으면 제대로 밥을 못 먹는 곤궁에 빠졌다. 그제야 밥상 위가 칼로 된 것이 아니고 쥐 발톱 흔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가 지는 무렵 우리는 모닥불로 사무실 앞뜰을 밝히고 축음기에서는 군가가 연달아 울렸다. 부대(部隊)들은 황홀한 기분으로 먹고 싶은 대로 먹었다. 감독은 능숙한 일본말로 하나하나 설명을 해 주었다. 야자주가 나오고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인부들이 노래를 시작했다. 남양 고유한 나체 춤이 나오는가 하면 일본유행가가 나온다. 병대(兵隊)들은 깜짝 놀랐다. 노래와 춤이 다양했다. 군데군데에서 밤늦도록 담소가 이어져 밤 가는 줄을 몰랐다. 군인들은 이런 섬에서 인품 좋은 우대는 처음이라며, 다시 사이판으로 돌아가 불편한 식량으로 단일하게 먹게 될 터이니 애석하다고 말을 한다. 그들은 우리들의 환영에서 본선(本船)에 오르기까지 손수건을 흔들며 석별을 슬퍼했다. 그들은 4개월 후 사이판에서 옥쇄했을 것이다.
-제1차 징용 8명이 티니언섬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못 되었는데 체격 좋은 그들이 돌아올 때는 뼈만 남았다. 징용 고역(苦役)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인부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하루 12시간 중노동을 해야 했고 휴일도 없다. 거기에다가 일본말이 능숙하지 못한 데다 소수이다 보니 일본인 노무자의 행패가 심했다 한다. 때리고 차고, 죄수 이상으로 취급(取扱)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도저히 체력유지를 못할 식량배급 하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비행장 공사장으로 갔다. 아직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일을 빨리 하여 성적을 올리자, 그런다면 우리는 몇 달 후면 섬으로 돌아갈 수 있다. 모범을 보이자. 누구나 힘들다. 불평을 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 뒤에서 무슨 문제도 타개(打開)할 것이다. 이런 훈화(訓話)를 하였다. 비행장 공사의 책임은 육군이다. 오전 7시 현장사무실을 찾아, 코지마 부대 대장과 면접하여 작업용구(삽,곡괭이 등)을 받아가지고 지정된 장소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오전 8시였다.
-해가 질 무렵 숙소로 돌아왔더니 시가지는 그대로 남았다. 사상자가 50여 명이라 했다. 격납고에서 신음하던 군인 환자들이었다. 그 외는 별고가 없었다. 그러나 식량은 전부 타버렸다고 했다. 다음날은 비행장 파괴 수습작업을 하라는 설부대의 명령으로 우리들의 일이 시작되었다. 매우 무서웠다. 매일 한 차례씩 강습(强襲)한다. 하루 3차례 습격(襲擊)을 하고 연 280기가 습격을 가했다. 견디다 못해 산 속으로 모두 피난하여 하루종일 보냈다. 저녁에 돌아왔는데 식수가 불결한 탓으로 무서운 배앓이가 나서 식사를 못했다.
-너희들은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가 기다리고 있지만, 도민(島民)이 죽으면 소나 말, 개처럼 길가에 묻거나 팽개친다. 도민(島民)들은 소나 말과 다름없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지. 기억해 둬. 도민도 인간이야. ... 나는 미친놈이 되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두 달 동안 일본인이라며 행세하는 통에 나 역시 조선인이라고 멸시를 받았다. 고만(高慢)한 그들의 태도에 화가 났다.
-장인은 전라남도 나주 출신으로 인부 모집에 응해 남양의 섬에 왔다. 1917년 일본 해군은 세계 제1차 대전 시에 남양군도를 독일로부터 점령, 유엔신탁으로 99년 동안 위임통치권을 얻었고 남진정책을 펼쳤다. 당시 시모노세키시에는 마구로 어업회사가 니시무라(西村)척식을 만들었는데, 이 회사는 사이판, 티니안, 로타섬에다 사탕수수, 면화 재배를 하며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회사의 총주임이었던 야마시다(山下) 씨는 광주 형무소 경관이기도 하였다. 그는 광주를 중심으로 인부 모집을 했고 장인은 그 제1진 70명 중 한 사람으로 마리아나군도에 왔다. 장인은 처음에는 사이판섬, 다음에는 로타섬에서 주로 면화 재배 인부로서 5~6년을 일하며 지냈다.
-파간섬에는 군인이 2,500여 명이 있었다. 처가 아무리 정숙을 지킨다 해도 오래 못 간다. 벌써 십여 명의 일본인 처녀들이 군인과 성관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동물이다. 일본 패망은 틀림없다. 다시 살아 고국으로 돌아갈 리가 만무하다. 미군하에서 살든지 죽든지 앞은 암담하다. 나는 애정의 맛에 사로잡혔다. 결심을 했다. 장인이 반대해도 당 본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우리 처를 포옹하고는 너와 나 전쟁시에 죽어도 같이 죽다고 하였다. 처는 아무 말없이 나를 두 손으로 끌어안지 않는가.
-1945년 12월, 차랑카노아 성당에서 세례식이 거행된다. 그 의식에서 나는 어린애로 돌아간다. 나를 하나님 나라에로 이끄는 두 교부(敎父)와 한 敎母(God Father, God Mother. 토어로 발리누, 말리나)와 동반(同伴)하여 성단(聖段)에 무릎을 꿇었다. 먼져 신부가 나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기에 한국 성명 그대로 전경운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때 전입니다 하였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크게 잘못되어 버렸다. 신부는 나이 많은데다 귀가 멀어 나는 큰 소리를 내야 했다. 그러나 이 서반아(西班牙,스페인) 노신부는 우리말 발음이 어려워 졍경경 ? 이라고 세 번이나 반복이다. 그러자 많은 신자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상기되어 수습할 바를 잃고 멍하여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러자 옆에 앉은 敎父(발리누) 한 분이 마쓰모토 라고 하였다. 그 당시 일본말로 나를 젠 이라고도 하고, 마쓰모토 라는 두 이름으로 불러왔던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따랐다. 그러자 교명(敎名)은 "헤수수, 마쯔모토"로 등록부(登錄簿)에 올려졌다.
그 당시 내 이름이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자녀들을 낳고 기르면서 자식들이 성인이 되자, 먼저 내 자식들이 마쓰모토 라는 성이 싫다며 나무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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