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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로 듣는 우리 소설] 앞산도 첩첩하고 - 한승원

Bawoo 2019. 1. 14. 21:43

앞산도 첩첩하고 - 한승원


「앞산도 첩첩하고」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기구한 운명을 살아가는 한 인간 오달병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오달병의 인생유전, 그의 처가 된 장례의 기구한 운명, 그리고 달병과 장례의 딸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구한 운명의 유전을 그리고 있다. 작가 한승원은 이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의 행로를 결정하는 계기가 아주 우연한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운명의 장난이란 무엇인지 그려내고 있다. 




밤봇짐을 싸가지고 나간 딸아이를 찾기 위해 아이의 외가이자, 자신의 운명이 얽혀 있는 덕도를 찾아가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디서인지는 몰라도 아버지 등에 업히어’ 우연히 덕도에 들어온 인물 오달병. 「앞산도 첩첩하고」는 작품에 나오듯이 ‘명창 임방울이 자기의 사랑하는 기생이 죽었을 때 즉흥적으로 불렀다는 단가’ 제목이다. 사람들이 미치고 반하게 만드는 주인공 오달병의 소리 재주가 운명을 조종하는 끈이다. 주인공이 열여덟 살 되던 해, ‘가슴 절절하게 뽑아 대는 소리에 그 주인집 딸이 오줌을 벌벌 싸고 말았다더라는 말’이 소문으로 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도 모르나, 달병은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주인집에서 쫓겨나고, 다른 집 머슴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달병의 새 주인 우산양반네의 논밭이 장례네 논밭과 접해 있는 인연으로 그들은 결국 피할 수 없는 기막힌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런데 그 이튿날 달병에게 소집영장이 나와 군대를 간다. 제대하여 돌아와보니, 장례는 남편이 6?25전쟁 중에 죽어 친정집에 와 있다. 달병은 다시 우산양반네 집 머슴이 되어 장례와 혼인할 수 있도록 중매를 부탁한다. 장례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자, 장례와 함께 밤봇짐을 싸서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머슴살이를 하는 동안 장례는 딸을 낳고 산후욕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그 딸이 열아홉 살 되어 집을 나가고, 주인공 오달병이 딸을 찾아 외갓집(처가) 동네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운명의 대물림이 소설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운명이 유전되는 계기가 되었던 ‘앞산도 첩첩하고’라는 소리를 자신의 운명을 되풀이하고 있는 딸을 찾아 나서서 부르는 것은 하나의 원환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운명의 형식이 소설의 구조와 동질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한승원은 그의 단편집 『앞산도 첩첩하고』의 후기에서 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恨은, 물고기 같은 것이므로 그물을 치거나 낚시질을 하여 잡듯 건져낼 수 없으며, 냉이나 쑥잎 같은 것이므로 쉽사리 뜨어다 무치어 밥상에 올리듯 내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살도 아니며, 울분도, 증오도, 피를 토하는 듯한 통곡도, 이를 갈며 대드는 악다구니도 아니다. 어쩌면 짜낼래야 짜낼 눈물이 씨도 없이 말라버린 뒤의 ‘한숨의 앙금’이거나 ‘당함의 피멍’이거나 할 것이지만, 내 어설픈 따지기로서는 풀이될 수 없으리라.




오달병에게 ‘앞산도 첩첩하고’라는 소리는 풀이될 수 없는 그의 운명이 감각화된 것이다. 그것은 소리 속에 녹아들어가 도저히 풀이될 수 없는 무엇으로 자리잡고 있다. 예상과는 달리 번번이 빗나가는 인생 앞에서 첩첩이 둘러싸여 있는 운명을 대한다는 것은 크나큰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 인내 역시 소리 속으로 스며들어가 ‘한’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우연한 기회와 우연한 이끌림에 의해 어딘가로 가고 있을 때, 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앞산도 첩첩하고」의 오달병처럼 ‘앞산도 첩첩하고/뒷산도 첩첩한디/혼은 어디로 행하는가…’를 목이 터지라고 불러보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문장》

-권영민, 「토속적 공간과 한의 세계」, 『우리시대 우리작가 한승원』, 동아출판사, 1987.


-김상태, 「한승원론-패설 속의 신화」, 『한국현대작가연구』, 문학사상사, 1991.


-우한용, 「생명과 자유의지의 언어형상」, 『한국소설문학대계』59, 동아출판사, 1995.



밤 봇짐을 싸가지고 나간 딸아이가 갈 데가 그리도 없어 외가엘 갔을까마는, 아버지(오달병씨)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외가가 있는 덕도 쪽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 아이를 잡기만 하면, 아이를 꾀어 가지고 나간 놈을 잡아 죽여야 한다고 이를 가는 그의 가슴엔 응어리진 것이 있었다.


스무 해 전의 갯벌밭은 아득한 들판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게 변했다고 놀라고 있는 자기가 우스워 아무렇게나 고개를 주억거려 봤다. 아내와 함께 이 덕도를 등진 것이 벌써 이십 년이요 그 아내가 죽은 지 십 년 팔 년이며, 그 때 핏덩어리이던 딸아이가 열아홉 살로 시집갈 나이가 되어 있다.

막걸리를 두어 잔 걸친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져 있는데다, 딸과 아내의 생각이 겹쳐지고, 여기가 아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면서, 아버지 등에 업혀와 머슴살이를 하고 아내와 정이 맺어진 곳이라는 감회가 가슴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응어리진 멍울이 들썩거리고 가라앉히기 위해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디……

그것은 예전 그가 나이 많은 머슴들한테 들어 배운 것으로 적벽가 중 새타령의 곡조 비슷한 것에 누군가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그의 목청은 덕도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빼어났다. 짜릿하고 고운 그 목소리는 향 맑은 촉기가 어리어 있어, 듣는 이의 심중을 저릿저릿 전율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뽑는 소리를 듣고 미치고 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뽑은 소리를 듣고 오줌을 지리지 않은 여자가 없다 할 정도였던 것이었다. 그 스스로도 자기의 소리에 미치고 반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꾸 부르고 또 불렀다.

따지고 보면, 그 미치고 반할 소리 때문에 그의 기구한 팔자는 시작된 것이다. 소리를 할 줄 모를 때까지만도 탈 없이 보낼 수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배우면서부터 뜻 아니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맨 먼저 당한 박해는 (장인어른)인, 당시에는 주인어른인 강진 양반의 매질이었다. 장례라고 그와 동갑으로 근동에서는 빼어난 미모였다. 별로 바깥일을 하러 다니지 않던 처녀인데 마지못해, 그 날은 수숫대 거두는 일을 거들게 하였던 모양이었다.

한데, 일은 주인이 없는 사이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주인집 딸 때문에 신이 나서 힘껏 그것을 뽑아 대면서 연방 소리를 뽑아 대었다. 그는 옥중가며, 호남가며, 새타령이며 되는대로 불렀고, 주인 아들과 주인 아주머니는 소리하는 그의 신바람을 돋구어주었다. 했는데, 머슴살이 하는 놈의 소리가 아무리 출중하기로니, 주인집 미모의 딸이 반할 리가 있으랴마는, 누가 지어 퍼뜨린 말인지는 몰라도 주인집 딸이 오줌을 벌벌 싸고 말았다는 말이 나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말이 싫진 않았지만 혹시 주인어른의 귀에 들어가면 정말 자기는 뼈도 못 추릴 것이니 그럴 일이 없었다고 입을 막아 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그 말이 주인 귀에 들어갔던지, 한밤중에 그는 주인어른한테 얻어맞아 쓰러졌다.

왜 때리는지 한 마디의 말을 던질 사이도 주지 않고 주인어른은 그를 녹초로 만들어 버렸다. 다시는 무슨 노래를 부른다거나 하지 않고 그저 시키는 일만 하겠다고 빌어 볼 생각을 하였을 뿐이었다. 어디서 살다가 어떻게 아버지 등에 업히어 왔는지도 알지 못한 채 이렇게 살고 있는 자기가 당장 나간다면 어떻게 밥을 빌어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를 더욱 괴롭히는 것은, 밑도 끝도 없이 생겨나서 마을 안을 감도는 소문이었다.

그가 쫓겨나 사랑방에 쳐 박혀 끙끙대고 있는 동안, 누군가 밤에 살짝 약풀을 뜯어다 준다느니, 먹을 것을 살짝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다느니, 그러니 쫓겨나기 전에 그 집 딸하고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둥…… 장례 어머니나 아버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말 흘러나온 구멍을 캐러 다녔고 나중엔 울며 겨자 먹기로 지쳐 물러나고 말았다. 장례 집에서 쫓겨나 달병이는 양반네 집으로 들어가 머슴살이를 했는데 그것이 또 점례와의 기막힌 인연을 맺게 하였던 것이었다.

우산 양반 집으로 옮기고부터 전처럼 웃거나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 소리 때문에 쫓겨났는데 그게 목숨 걸고 하여 댈 것이 무엇인가 하고서 말이었다.

머슴들이 따돌리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소리를 뽑아야 했고, 그도 그러면서 답답한 가슴이 풀어지곤 했다. 그러다 소리하기에 또 버릇이 되었고 시도 때도 없이 뽑았다. 마을의 모든 머슴들은 그와 함으로써 흥겨운 가운데 하고 싶어 했고 주인들은 자기 머슴이 그를 데려와 같이 일하기를 원했었다.

장례 집에 중매쟁이들이 빈번히 드나든다는 소문이 있더니 곧 시집가게 될 모양이더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정말 그래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가슴이 꽉 막혀 있던 것이었다. 그는 괜히 무척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장례가 시집가게 된다는 생각을 하자 응어리지려는 설움을 소리로 내었고 그 날 저녁 장례가 수수를 베러 혼자 나왔을 때 그의 가슴을 설레기 시작했다. 그는 수수밭으로 들어가 저질러선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워메, 어째사 쓸꼬, 너 죽을라고 환장했냐? 누구 오먼 어쩌라고.” 장례가 몸부림치는 것을 덮쳐누르면서 여객선을 타고 멀리 도망가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얼마 후, 수숫대 사이에 얼굴 묻고 우는 장례를 그런 말로 달랬다.

그는 이튿날, 아닌 밤의 홍두께로 영장을 받아 군대에 갔다. 전쟁이 휴전이 되면서 제대한다고 돌아왔다. 장례의 집에 가서 인사를 드렸는데 혼자만의 생각, 장인 장모를 뵙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때 뜻밖에 장례가 친정엘 와 있었다. 이 날 밤, 그는 사랑방에서 장례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기쁜 일인지 몰랐다. 장례와 자기 사이에 중매를 서 달라고 하려고 우산 양반 댁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했다. 우산댁은 장례 집에 다녀오더니 표정이 밝지 않더니만, 좋은 데 있으면 중매를 서 준다고 했다.

이튿날 저녁, 장례와 건장막 안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나한테 시집 올 생각 없소? 나는 깅쿵 장례하고 살아사 쓰것소.” 하고 끌어안았다. 그로부터 사흘째 되던 날 밤, 그들은 밤 봇짐을 쌌고, 줄행랑을 쳤다. 자기는 머슴살이를 했고 장례는 이집 저집 돌며 안일을 거들어 주며 두 해를 지났다. 한데, 장례는 배가 불러 버렸고, 늦은 겨울 몸을 풀었다. 남의 집 불도 지피지 않은 방에서 몸을 푼 장례는 온몸이 붓기 시작하더니 닷새를 못 넘기고 눈을 감아 버렸다.

심 봉사가 심청이를 키우듯 키워 온 딸이었는데 하모니카장이를 따라 밤 봇짐을 싸가지고 나가 버린 것이었다. 딸아이를 꾀어간 놈을 찾아 죽여 놓고 말겠다고 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아내의 하얀 얼굴이, 그 얼굴을 빼어다 박은 딸아이의 얼굴과 함께 떠올랐다. 그는 소리를 빼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뽑은 소리의 한 가닥은 하늘을 향해 사위어 갔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디.「앞산도 첩첩하고」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기구한 운명을 살아가는 한 인간 오달병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오달병의 인생유전, 그의 처가 된 장례의 기구한 운명, 그리고 달병과 장례의 딸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구한 운명의 유전을 그리고 있다. [출처:munjang.or.kr/archives/244885    사이버 문학광장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