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리해(百里奚, ? ~ ?)는 중국 춘추 시대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자는 정백(井伯)이며 완(宛) 사람이다.
진나라 임관 이전
장성한 후 아내 두씨(杜氏)와 아들 한 명(백리시(百里視, 맹명))을 두었다. 그러나 계속 가난에 시달렸고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도, 천거해 주지도 않자 그는 우나라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아내의 격려를 얻고 그는 제나라로 향했다. 당시 제나라 임금이었던 제양공이 죽고 공손무지가 제나라 임금이 되었지만, 제나라에서 알게 된 건숙(蹇叔)의 조언으로 임관하지 않았고 변란을 피할 수 있었다. 이어 주나라 왕자 퇴를 섬기려 하자 건숙의 만류로 섬기지 않았다. 그 후 다시 우나라로 돌아갔고 궁지기의 천거로 대부 벼슬을 얻었다. 그 후 진(晉)나라의 침략으로 우나라가 멸망했지만, 계속해서 우공을 섬겼다.
하지만 그의 충성심을 시기하는 사람에 의해 진(秦)나라 목공의 결혼식에 남자 종의 신세가 되었고, 진나라로 가는 길에 초나라로 도망가서 소를 치면서 있다가 초성왕(楚成王)이 백리해를 어인으로 삼아서 말키우는 일을 시켰다.
그 후 진나라에서 명단에 있던 백리해가 없는 것을 알게되었고 당시 대부로 있던 공손 지의 조언으로 염소가죽 다섯 장을 초나라에 예물로 보내서 진나라로 데려온다.
진나라 임관 이후
진나라에 임관된 이후 건숙을 진목공에 천거하였고 백리해와 건숙은 각각 좌서장과 우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빨래하고 있던 아내와 상봉하였는데 아내는 백리해를 만나기 위해 단상에서 노래를 불렀다.
백리해, 염소가죽 다섯 장. 이별하던 그 날을 기억하는가? 알 밴 암탉을 잡고 노란 좁쌀밥 짓고 문으로 불 때던 그 때를. 이제 부귀하니 나를 잊었구나.
이 노래를 들은 백리해는 아내와 상봉하였고 아들과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후에 진목공이 정(鄭)나라를 치려하자 만류하였지만 진목공은 듣지 않고 정나라를 공격했으나 진(晉)나라에 의해 대패하였고 그 후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고 죽은 뒤 수많은 백성들이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통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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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 백리씨라고 전해진다. 이름은 해며, 자는 정백(井伯)이다. 춘추시대 우나라 사람이다. 원래 춘추시대 우나라의 대부였으나, 후에 진(秦)나라의 대부가 되었다.
백리해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제나라 사람인 건숙(蹇叔)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였다. 그는 초기에 공손무지(公孫無知)를 섬기려고 하였으나 건숙은 그가 오래가지 못할거라고 조언했고, 그것이 들어맞았다. 그리고 백리해는 소치는 것을 좋아하는 왕자 퇴를 섬기려 했는데, 그 이유는 백리해는 목축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건숙은 왕자 퇴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왕자 퇴도 주혜왕의 반격을 받아 몰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리해는 찢어지게 가난해 자신의 몸조차 돌보기 힘들 지경이었다.[2] 고국인 우나라에서 벼슬을 살려했다. 건숙은 처음에 그것을 말렸으나 백리해는 굶주림을 면하고자 우나라에서 벼슬을 살았다.[3]
주 혜왕 22년(기원전 655년), 진(晉)나라가 괵나라를 멸하고 우나라 또한 멸망시켰다. 그리하여 백리해는 포로로 전락했다. 그는 우나라 공작을 끝까지 섬기려 했으나 그는 진목공(秦穆公)이 진헌공(晉獻公)의 딸과 결혼할 때 그는 노비로 팔려갔다.[4] 백리해는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초나라로 도망가서 거기에서 소를 치며 살았다. 그런데, 진 목공은 노비 목록에 그가 없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의아해해 백리해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그가 현자임을 알아보고 그를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초나라에서 소를 친다는 소식을 듣고 후한 예물로 초빙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그렇게 하면 초나라에서 백리해가 현자인줄 알아본다면서 도망친 노비를 추노한다는 구실로 검은 염소 가죽 5장으로 사오게 했다. 진 목공은 사람을 보내 초성왕(楚成王)에게 검은 염소 가죽 5장을 아직 백리해가 유능한지 모르는 초 성왕은 백리해를 검은 염소 가죽 5장을 받고 백리해를 넘겨주었다. 진 목공은 그를 노비에서 풀어주며, 후하게 대후해 대부로 삼았다. 그리고 백리해는 별명이 오고대부(五羖大夫)가 되었다. 백리해는 건숙의 지혜와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진 목공에게 이야기하여 건숙도 등용하게 했다.
진 목공 9년(기원전 651년), 진(晉)나라의 군주인 진 헌공이 죽자 여희는 그 아들인 해제를 세웠으나 해제가 이극(里克)에게 살해당했다. 순식(荀息)은 여희의 여동생의 아들인 탁자를 내세웠으나 이극은 이번에는 순식, 탁자는 물론 여희 일가를 깡그리 제거했다. 그리하여 백리해는 병사를 일으켜 공자 이오를 군주로 올렸다. 그가 바로 진혜공(晉惠公)이다. 그는 하서[6]의 5개 성을 진(秦)나라에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여이생과 극예 등의 말을 듣고 주지 않았다.[7] 그리고 이극과 그 동조자를 죽여 진 혜공의 위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진 목공 12년(기원전 648년), 제(齊)나라의 관중과 습붕이 죽고 진(晉)나라에 가뭄이 들자 진목공이 진(晉)나라에게 양식을 보내려 하자 진혜공에게 죽임을 당한 비정보의 아들 비표가 거절했으나 공손지는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수로를 통해 진(晉)나라에 원조했다. 그 다음 해에는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어 진(晉)나라에 원조를 청하자 진 혜공은 무시했다. 결국 한원 전투가 일어나 진 혜공은 진 목공에게 패했고, 진 목공은 공자 중이를 진(晉)나라의 군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진문공(晉文公)이다.
진 목공 33년(기원전 627년), 봄 진나라가 정나라를 치려 하나 백리해와 건숙은 진(晉)나라를 거쳐 가야한다며 반대했으나 진 목공은 듣지 않아 효산에서 패배했다.
진 목공은 36년(기원전 624년)에 다시 진(晉)나라와 싸워 이겼다. 그리고 이때를 끝으로 그의 기록은 없다.
[주]
건숙(蹇叔): 생몰년도 불명
중국 춘추시대 송(宋)나라 질읍 사람. 그는 백리해(百里奚)를 거둬주면서 친하게 지냈고, 그 인연으로 나중에 진(秦)나라의 군주인 진목공(秦穆公)을 섬겼다.
건숙은 백리해와 그 가족을 거둬주었다. 그러나 본인도 가난하여 거두는 데 한계가 있자, 백리해가 가난을 못 이겨 제양공을 죽인 공손무지를 섬기려 했으나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말렸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후일에 주혜왕을 내쫓은 왕자퇴가 목축하는 재주를 지닌 사람을 좋아해 마침 목축하는 재주를 가진백리해가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또한 민심을 얻지 못했으므로 섬기지 말라고 만류했다. 과연 주 혜왕은
왕자 퇴를 죽여 그대로 되었다. 백리해는 생계가 유지되지 못하자 고향인 우나라에서 벼슬을 살려했다.
건숙은 우나라 공작이 어리석음을 알고 말려보려 했으나 백리해는 정말 찢어지게 가난해-아내와도 헤어진다-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건숙은 더는 말리지 못했다. 우나라에서 벼슬한 백리해는 우나라가 진(晉)나라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백리해 스스로 다른 나라로 도피하지 않았다.
그 뒤 백리해는 잉신[1]으로 전락했는데, 그 처지를 부끄럽게 여기고 초(楚)나라로 몰래 달아나 살았다. 그런데, 진목공이 그를 알아보고 등용하자 백리해가 건숙이 자신보다 지혜로운 점을 들어 초빙토록 하여 건숙 또한 진(秦)나라에서 벼슬했다.(열국지에는 백리해 때문에 잠시만 하기로 하는 걸로 나옴)
건숙은 진 목공에게 천하 재패의 책략을 내놓았다. 훗날 진 문공이 죽자 진 목공은 정나라를 치려했다.
백리해와 함께 말렸으나 듣지 않고 공격했으나, 활나라만 멸망시키고 귀국하다가 진(晉)나라 군대에게
대패했다.
.
[주]
[1] 제후 간에 결혼할 때 딸려가는 몸종이다.
[출처]정보-신동준 역주 동주 열국지 2권 진문시대 /수집-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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