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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시대 - 초나라 재상(영윤)]손숙오(孫叔敖)

Bawoo 2019. 3. 26. 00:02


손숙오(孫叔敖, ? ~ ?)는 중국 춘추 시대 초나라의 관료이다. 성은 (羋), 씨는 (蔿)이며 휘는 (敖) 또는 애렵(艾獵)이고 손숙(孫叔)이다. 위고(蔿賈)의 아들이며, 위오(蔿敖) 또는 위애렵

(蔿艾獵)이라고도 한다.


사적

머리가 둘 달린 뱀

어느 날, 어린 손숙오는 놀러 나갔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발견하였다. 손숙오는 뱀을 죽이고 땅에 묻은 다음 집에 돌아가 엉엉 울었다.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이렇게 말하였다.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하던데, 제가 그 뱀을 보고 말았으니 어머니와 헤어질까 두렵습니다.

어머니가 뱀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니, 손숙오는 다른 사람이 볼까봐 죽이고 땅에 묻었다고 답하였다.

어머니가 말하였다.

남몰래 착한 일을 한 사람은 하늘이 복을 내려준다고 하니, 너는 죽지 않을 거란다.

어진 정치

손숙오는 장왕 때 영윤(令尹; 초나라의 재상) 우구자의 천거로 후임 영윤이 되었다. 백성을 교화시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화합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정치는 느슨하였지만 간신도 도둑도 생기지 않았다. (晉)나라의 사회(士會)는 손숙오의 치세를 크게 칭송하였다.

어느 날, 장왕이 화폐가 가볍다고 생각하여 크고 무겁게 만들었다. 백성은 이를 불편하게 여겨 쓰지를 않았고, 시령(市令; 시장을 감독하는 관리)이 이를 손숙오에게 보고하였다. 손숙오는 장왕에게 간언하였다.

전날 화폐를 바꾼 것은 이전 화폐가 가볍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령이 보고하기를 시장이 혼란해져 백성은 편안히 있을 곳이 없고 장사를 계속할지 그만둘지 결정할 수가 없다고 하니, 예전으로 돌려주십시오.

장왕은 이를 허락하였고, 명령을 내린 지 사흘 만에 시장은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초나라 백성은 습속이 비거(庳車; 수레바퀴가 작고 낮은 수레)를 좋아하였는데, 장왕은 비거는 말이 끌기에 불편하다고 여겨 법령을 내려 이것을 높이려 하니, 손숙오가 간언하였다.

법령을 자주 내리면 백성은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게 되므로 좋지 않습니다. 왕께서 꼭 수레를 높이고자 하신다면, 그 마을의 문지방을 높이도록 하십시오. 수레를 타는 사람은 모두 군자이고, 군자는 자주 수레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장왕이 이를 허락하니, 반 년이 지나 백성은 모두 자발적으로 수레를 높였다.

사후

손숙오는 죽기 전에 아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죽으면 왕께서는 많은 영지를 내려주실 테지만, 너는 침구(寢丘)[1] 땅만 받도록 하거라.

과연 손숙오가 죽으니, 장왕은 손숙오의 공을 기려 많은 상을 내려주려 하였다. 손숙오의 아들 아버지의 말대로 침구 땅만 받았고, 이후 영윤이 되었다.

훗날 초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침구는 너무 토지가 척박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탐내지 않아 손숙오의 집안은 항상 정쟁을 피할 수 있었다. 또 초나라가 오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에 다다랐을 때, 침구는 땅의 이름이 불길하였기 때문에 오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손숙오의 자손은 크게 번성하였다.

출전

  • 열어구, 《열자》 권8 설부편(說符篇)
  • 사마천, 《사기》 권119 순리열전(循吏列傳)
  • 유향, 《신서》(新序) 권1 잡사(雜事) 제1
  • 각주

  • 초나라의 가장 척박한 땅이었다.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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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추시대 패자였던 초장왕의 명신. 춘추시대 초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명신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초장왕을 춘추오패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손숙은 그의 자인데, 춘추시대의 습관 중 하나가 자+휘로 사람을 부르는 것으로 손숙오도 그 예이다.

  • 본래 이름은 위오(蔿敖)로 위씨[1]는 초왕 분모 이후로 대대로 유력 세경가 중 하나였다.[2]

    그러나 초장왕이 왕위에 오르고, 당시 영윤이었던 투월초(鬪越椒)의 세력이 줄자, 이에 불만은 품은 투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군 총 책임자였던 사마 위가(蔿賈)[3]를 가장 먼저 제거하자 위오는 도성을 탈출해 살아남았다.

    투월초의 반란이 진압되고 초장왕이 나라를 안정시킬 인재를 뽑았을때 당시 영윤(초나라 재상의 호칭)이었던 우구가 천거하여 영윤자리에 올랐다.[4]

    그가 세운 업적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토지 개간과 화폐 개혁이 있다.

    토지 개간은 내전으로 황폐화된 도읍 영성(삼국지로 치면 강릉)의 농지를 복구하고 땅을 다듬어 민생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화폐개혁은 그간 무거웠던 화폐를 경량화시켜 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하여 형주지역[5]의 교통까지 자연스레 활발하게 만드는데 지대한 공을 하였다.[6]

    이를 두고 초장왕이 "제환공에게 관중이 있었고, 초성왕에게 자문[7]이 있었듯이 내게는 손숙오가 있도다."라고 할 정도. 게다가 제환공과 초성왕을 본받아 초장왕도 초나라 사람이면 함부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군사적 능력으로는 정치적 능력만큼 뛰어나지는 않았는지 진(晉)나라와 일대 결전을 벌인 필(邲)의 전투에서는 일개 장수였던 오삼에게 일등공신 자리를 내준다. 어쩐지 제갈량이 생각나는 대목.[8]

    후에 죽을 때는 그릇 하나 성한 것이 없고, 또한 가진 재산이 없어 집이 깨끗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생긴 단어가 청빈. 또한 위씨 집안의 후계자를 자신의 아들인 손안에게 물려주지 않고 철저히 능력 위주로 물려줘 조카 위빙에게 물려주었으며 이 일로 초장왕은 그를 잃은 것을 더욱 애달퍼하였다. 사서마다 민간에 전해지는 내용이 각자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궁중배우 우맹이 손숙오의 아들의 비천한 삶을 구해주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9]

    [1] 한자 표기는 蔿(애기풀 위)=薳(애기풀 위) 두 가지로 하는데, 薳은 '원'으로도 읽히기에 원씨라고 읽기도 한다.[2] 당시 세경가는 자국의 왕공족 출신이 대부분이지만 초나라는 그 경향이 아주 심했다. 가장 대표적인 춘추시대 초나라 세경가인 투씨(鬪氏), 성씨(成氏), 굴씨(屈氏), 위씨(蔿씨)와 전국시대 세경가인 굴씨(앞의 굴씨 맞다), 소씨(昭氏), 경씨(景氏) 모두 그 뿌리를 초나라 왕실에 두고 있다.[3] 손숙오의 아버지.[4] 손숙오가 침(沈) 땅에 은거하고 있을 시절 머리가 2개인 뱀(양두사)를 보고 죽여서 음덕을 세워 영윤에 올랐다는 민간이야기가 여기에서 전해진다.[5] 주나라 기준에서의 천하 9주를 말한다.[6] 사마천의 사기에서 둔리열전에 따로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7] 관중과 나란히 비견되는 인물로 초성왕 시절의 명신이다. 이름은 투곡오도며, 뜻은 호랑이 젖을 먹은 사람이란 뜻으로 역사서마다 곡어토, 누오토 등으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8] 좌전에서는 손숙오가 영윤이 되자 영전(令典)이 바로잡혔다고 기술할 정도.[9] 역사가들이 각자 다른 버전의 민간전승을 채택해서 기술하였기 때문에 이야기의 차이가 존재한다.[나무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