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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 초나라 장왕, 공왕 시대의 명궁]양유기(養由基

Bawoo 2019. 3. 26. 21:47



양유기(養由基, ? ~ ?)는 중국 춘추 시대 초나라(楚)의 무장이며, 의 명수로 알려져있다. 양나라(養) 출신으로, 양나라가 초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 초나라의 장왕(莊王)과 공왕(共王)을 섬기며 대부(大夫)가 되었다. 이후 강왕(康王)이 즉위하자 궁구윤(宮廄尹)을 역임하였으며, 오나라(吳)와의 전쟁 도중 사망하였다.

일화

신궁(神弓)으로 유명하며,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를 남겼다.

기원전 606년 초나라(楚) 장왕(莊王) 시절 투월초(鬬越椒)가 위가(蔿賈)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양유기는 투월초에게 활쏘기 시합을 청하였다. 이후 투월초는 양유기에게 화살을 세 발 쏘았으나 명중시키지 못하였고, 양유기는 화살 한 발로 투월초를 죽였다.

이후 반왕(潘尫)의 아들인 반당(潘黨)과 활쏘기 연습을 할 당시 화살 한 발로 일곱 겹의 갑옷을 관통시켰다고 하며, 잠자리의 날개를 꿰뚫거나 백보 밖에서 활을 쏘아 버드나무의 잎을 적중시켜 '백보천양(百步穿楊)', '백발백중(百發百中)'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또한 초왕(楚王)은 흰 원숭이를 길렀는데, 원숭이에게 활을 직접 쏘아보았지만 원숭이는 날아오는 화살을

잡아 장난을 쳤다. 이에 초왕은 양유기를 불러 원숭이를 쏘게 했는데, 양유기가 활을 겨누어 화살을 쏘기도 전에 원숭이가 나무에 매달리며 울부짖어 '양유호원(養由號猨)'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그 뒤 기원전 575년 언릉(鄢陵)에서의 전투 당시 진나라(晉)의 여기(呂錡)가 초나라 공왕(共王)의 눈을 쏘아맞추자, 공왕은 양유기에게 두 대의 화살을 주며 여기를 쏘게 헸다. 양유기는 곧바로 여기에게로 가 활을

쏘아 여기의 목을 명중시켜 죽였고, 공왕에게 돌아와 나머지 화살 한 대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진나라의 군대가 초나라의 군대를 패퇴시키자, 양유기는 숙산염(叔山冉)의 요청으로 부대의 후위에서 활을 쏘아 진나라의 군대가 추격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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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장수. 성은 영(嬴). 씨는 양(養)이고, 자는 숙(叔).

시대를 대표하는 명궁으로 유명하다. 백발백중이라는 고사의 주인공이자 이후 묘사되는 백보 앞의 버들잎 맞춰 떨어뜨리는 고사의 원조격.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초장왕 시대에 투월초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투월초와 화살 3개의 일기토를 벌여 그를 사살한것을 시작으로 절대적인 명사수로의 명성을 드높였다. 투월초와의 대결에서 투월초가 먼저 사격을 했는데, 첫번째는 피하고, 두번째는 활로 막았으며 세번째는 날아오는 화살을 이로 화살을 물어(!)서 모두 방어해냈다. 이후 양유기의 차례에서 양유기는 첫발을 쏘는척 하며 화살 없이 활을 쐈고, 소리를 들은 투월초가 몸을 움츠리며 피할때 화살을 쏴서 한발로 투월초를 사살했다고 한다. 투월초 또한 활의 명인으로 이름 높았으니 대단한 활약을 한 셈. 어쨌든 이 일을 계기로 양유기는 활 하나로 잡병에서 대부가 되었다.

초장왕이 죽고, 초공왕이 재위 할때, 진과의 패권을 다투는 싸움 중 하나인 언릉 전투에서 눈의 화살을 맞은 초공왕이 한쪽 눈까지 잃는 큰 부상을 당하자 화살 한 대만을 가지고 적진으로 가서 공왕에게 상해를 입힌 장수를 순식간에 쏴 죽여 공왕의 복수를 했다. 이때 초공왕이 늑대 이빨로 만든 유니크한 화살 3대를 주며 복수를 명하는것을 단 한대면 충분하다며 거절하고 정말 단 한대만으로 적장을 쏴죽였는데, 초왕은 이를보고 언젠가 활로 흥한자 반드시 활로 화를 입으리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공왕 사후 상중을 타 동쪽의 오나라가 침입해오자, 이를 토벌하러 출전했는데, 적의 계책에 말려 패배하게 된 것을 일기로 분전하다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으니, 병사들은 분기탱천해 오군을 격퇴하였다.

[나무위키]


정보-책 풍몽룡의 동주열국지. 2: 진문시대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