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美術) 마당 ♣/- 작품[作品]

George Romney - Emma, Lady Hamilton

Bawoo 2019. 4. 30. 21:51




조지 롬니

〈엠마 해밀턴〉

Emma, Lady Hamilton


조지 롬니 〈엠마 해밀턴〉

조지 롬니 〈엠마 해밀턴〉

약 1785, 캔버스에 유채, 62.3×52.1cm

넬슨의 초상화 바로 옆에는 한 미모의 여성 초상화가 함께 걸려 있다. 넬슨의 부인일까? 그러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걸린 무수한 초상화 중에 부부의 초상화를 함께 걸어 놓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위대한 인물의 부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초상화를 걸 수 있을 정도로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 만만한 곳은 아닌 것이다. 해설을 읽어 보니 이 미모의 여성은 넬슨의 부인이 아닌, 넬슨의 애인 엠마 해밀턴(1765-1815)이었다. 두 초상화의 해설은 자못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었다. ‘18세기판 세기의 로맨스’라고 부를 만한 내용이었다.

1798년, 프랑스군의 나폴리 해안 침공을 막기 위해 나폴리에 갔던 40세의 넬슨은 영국 주재 나폴리 대사인 윌리엄 해밀턴 공의 아내이자 당대의 유명한 미인인 엠마 해밀턴과 사랑에 빠진다. 당시 해군 소장이던 넬슨은 엠마와의 사이에서 딸 허레이시아를 낳았고 해밀턴 공의 묵인 아래 엠마와 동거까지 했다. 물론 넬슨에게도 결혼한 부인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어느 모로 보나 불륜이었다. 이 스캔들은 군인 넬슨의 출세 가도에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에게는 깨끗한 사생활이 중요한데, 남의 부인, 그것도 명망 높은 귀족의 부인과 연애해 사생아까지 낳았으니 넬슨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좋을 수는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넬슨과 엠마의 스캔들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속사정을 알고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인간적으로 이해될 만한 것이었다. 대장장이의 딸로 태어났던 엠마는 타고난 미모 때문에 몇몇 귀족의 정부가 되었다가 서른 살이나 많은 윌리엄 해밀턴 공과 결혼했다. 그러니 아버지와 딸 같은 이 부부 사이에 남녀 간의 애정이 깊었을 리 만무했다. 실제로 해밀턴 공은 엠마를 아내라기보다 딸같이 대했던 모양이다. 그는 아내의 정부인 넬슨을 자기 집에 불러들여 같이 살기도 했고, 넬슨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을 고이 간직했다고 한다. 넬슨 역시 가난했던 청년 시절, 무일푼인 재정 상황 때문에 아이가 딸린 미망인 프랜시스와 결혼했던 형편이었다. 넬슨은 진정한 사랑을 얻은 대가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세간의 험담을 묵묵히 감수했다.

넬슨의 초상화 옆에 걸려 있는 엠마의 초상화는 그녀가 24세 때인 1785년에 그려진 것이다. 크고 아름다운 눈과 갸름한 얼굴형이 한눈에 보기에도 빼어난 미인이다. 엠마는 워낙 유명한 미인이라 화가들은 너나없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 초상화를 그린 화가 조지 롬니(George Romney)가 그린 엠마의 초상화만도 84점이나 된다. 넬슨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 자신의 연인 엠마와 딸 허레이시아를 걱정했다. 넬슨이 전사할 당시에 허레이시아는 다섯 살에 불과했다. 넬슨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엠마와 유일한 혈육 허레이시아에게 넘긴다고 유언했다. 그는 자신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만큼, 국가가 유족에게 그 보답을 해 주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엠마가 넬슨과 정식으로 결혼한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넬슨의 군인 연금을 엠마에게 지급하지 않았다. 넬슨이 자신의 이름 ‘허레이쇼’를 딸에게 물려준 것만 봐도 엠마와 허레이시아는 분명 넬슨의 유족이었건만, 영국 정부는 무정하게도 영웅의 가족들을 외면해 버렸다. 영국 정부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 묻힌 넬슨의 묘역에는 헨리 8세의 왕관을 가져다 장식하는 등, 온갖 호화로운 치장을 갖추었으면서도 정작 그의 연금은 엠마 대신 넬슨의 동생에게 지급했다. 낭비벽이 심했던 엠마는 넬슨이 남겨 준 집과 해밀턴 공의 유산을 모두 흥청망청 써 버리고 극빈자가 되어 알코올 중독으로 인생을 망치고 말았다. 그녀는 빚에 몰려 프랑스 칼레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이질에 걸려 54세로 숨을 거두었다.

왜 당대 최고의 미인이자 남편도 있었던 엠마는 넬슨에게 반했던 것일까? 넬슨은 훌륭한 군인이기는 했지만 귀족도 아니었고 멋진 외모나 큰 재산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엠마를 만났을 때 넬슨은 빈센트 해전 도중에 입은 부상으로 오른팔을 잃고 한쪽 눈도 먼 상태였다(넬슨은 전투 도중 종종 보이지 않는 눈에 망원경을 대고 “음, 적선은 보이지 않는군” 하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전시된 넬슨의 초상화는 한쪽 팔이 교묘하게 가려진 모습이다. 단순히 지위나 배경만으로 비교해 보면 넬슨보다는 엠마의 남편인 해밀턴 공이 훨씬 나았다.

그러나 넬슨에게는 해밀턴 공이 가지고 있지 않은, 아니 평범한 남자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중요한 미덕이 있었다. 그는 진정 용기 있는 남자이자 진짜 군인이었다. 넬슨은 전술의 천재였을 뿐 아니라, 전투에 임한 일개 수병부터 장군까지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고 독려하는 능력을 갖춘 사내였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맞은 최후의 순간은 넬슨이라는 남자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확실하게 알려 준다. 넬슨은 어깨를 뚫고 들어간 총탄이 폐를 관통해 척추에 박힌 상황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고 네 시간 동안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승전을 확인하고서야 쓰러진 넬슨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신께 감사하네. 나는 내 의무를 다했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엠마가 사랑했던 것은 그의 지위나 배경, 매력이 아니라 이 같은 남자다움이었을 것이다.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걸려 있는 초상화(엠마를 만난 해인 1798년에 그려진 것이다) 속에 서 있는 넬슨은 과묵해 보이는 영국 남자다. 넬슨이라는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진 초상화이지만, 꾹 다문 입술에서 군인다운 담백함과 의지가 느껴진다.

워낙 세기의 스캔들인 만큼, 영국에서는 넬슨과 엠마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심심찮게 제작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윈스턴 처칠이 대본 작업에 참여하고,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언 리가 각기 넬슨과 엠마 역으로 출연한 영화 〈해밀턴 부인〉(1941)이다.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언 리는 사랑에 빠져 훗날 결혼을 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영화 내용과 똑같이, 두 배우는 촬영 당시에는 각각 다른 사람과 결혼한 몸이었다고 한다. 때로는 ‘영화 같은 인생’이나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가 정말로 있는 것이다. 아무튼 넬슨이 영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위인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그가 남긴 위대한 승전보와 빈한한 가정 출신의 아이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올라선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 외에도, 한 여자에게 진정한 사랑을 바친 인간적 면모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글:전원경

출처

Emma as Circe, by George Romney, 1782

  • Emma as a Sibyl by George Romney, circa 1785

  • Emma as a Bacchante by George Romney, 1785

  • Emma as a Bacchante by George Romney, 18th century

  • Lady Emma Hamilton, as Cassandra, by George Romney, 18th century

  • Lady Hamilton as a Bacchante, by Marie Louise Élisabeth Vigée-Lebrun, 1790–1791

  • Lady Hamilton as The Magdalene, by George Romney, before 1792

  • Lady Hamilton as Titania with Puck and Changeling, by George Romney, 1793

  • Pastel by Johann Heinrich Schmidt, c. 1800, owned by Nelson


  • Emma Hart, Lady Hamilton (c 1765-1815), as Circe at Waddesdon Manor.
     This is the first portrait in which Romney painted Emma in this guise, painted in July to August 17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