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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베첼리오〈바쿠스와 아리아드네〉 Bacchus and Ariadne

Bawoo 2019. 7. 20. 20:49


티치아노 베첼리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Bacchus and Ariadne         


티치아노 베첼리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1520-1523, 캔버스에 유채, 176.5×191cm

사랑이라는 감정은 때로 벼락같이, 전기에 감전되듯이 찾아온다. 이런 사랑의 감정을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1576)의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처럼 명쾌하고도 박력 있게 묘사한 그림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시원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이 그림은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가 술과 향연의 신 바쿠스를 만나는 순간을 담은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아리아드네는 영웅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장본인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테세우스는 괴물을 죽인 후 아리아드네를 두고 떠나 버린다. 실연당한 아리아드네는 슬픔에 잠겨 해변을 떠돌다 갑자기 천둥 같은 소리를 듣는다. 술의 신 바쿠스가 사티로스 무리를 이끌고 숲에서 놀다 아리아드네를 발견한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바쿠스는 질풍처럼 전차를 몰고 와 뛰어내린다. 그리고 “당신에게 진정 진실한 사랑을 주겠노라”고 다짐하면서 그 다짐의 징표로 아리아드네의 머리에 씌워진 관을 벗겨 하늘로 던진다. 하늘로 던져진 관은 바로 별자리가 되어서 신의 맹세를 멋지게 확인시켜 준다.

티치아노가 그린 것은 바로 이 순간, 바쿠스가 전차에서 내리면서 아리아드네의 관을 벗겨 하늘로 던지는 장면이다. 실로 다이내믹한 사랑의 맹세를 담은 그림인 셈이다. 그림의 주제만큼이나 내용도 역동적이다. 그림 한가운데에 있는 바쿠스는 투수가 공을 던진 직후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타오르는 정열처럼 붉은 망토가 그의 등 뒤에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흩날린다. 왼쪽에 있는 아리아드네(그녀 역시 바쿠스처럼 붉은 장식 천을 몸에 두르고 있다)는 이 청천벽력 같은 프러포즈에 당황하고 있는데 그녀의 머리 위에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동그란 모양의 별자리가 반짝이고 있다. 조금 전까지 아리아드네가 쓰고 있었던 관이 ‘왕관자리’가 된 것이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는 한눈에 보기에도 시원스럽고 호쾌하다. 이 그림이 시원하게 보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구도를 보자. 정사각형에 가까운 이 그림은 왼편 위와 오른쪽 아래, 두 개의 삼각형으로 나뉜다. 왼편의 삼각형은 아리아드네의 세계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푸른 바다는 아리아드네의 성정처럼 맑고도 순수하다. 푸른 망토를 걸친 아리아드네 역시 자연의 일부처럼 보인다. 반면, 오른쪽 아래의 삼각형, 사티로스와 표범, 개와 뱀 등이 몰려 있는 바쿠스의 세계는 무질서하고 방탕하며 어둡다. 이 삼각형을 채운 색은 침침한 갈색이다. 바쿠스 역시 이 세계에 속해 있는 인물이지만, 막 사랑에 빠진 그의 몸은 ‘갈색 삼각형’에서 ‘푸른 삼각형’으로 마구 끌려가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균형 잡고 있는 그의 몸을 휘감은 망토가 펄럭펄럭 소리를 내며 휘날릴 것 같다.

이 그림이 유난히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유는 캔버스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 푸른 하늘 때문이기도 하다. 티치아노는 마치 유리처럼 빛나는 푸른색으로 화면을 칠했는데, 이 푸른빛은 500년 전의 그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선명하다. 사실 이 푸른빛에는 남다른 비밀이 있다.

티치아노는 벨리니, 조르조네 등과 함께 16세기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던 화가다(오늘날 이들은 ‘베네치아 화파’로 불린다). 당시의 베네치아는 세계 각지의 신기한 물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들어오는 무역 강국이었다. 이 때문에 베네치아에는 다른 도시에는 없는 물감 상인, 즉 ‘벤데콜로리(Vendecolori)’들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 벤데콜로리들은 직접 안료를 섞어 새로운 물감을 만들기도 했고, 이 물감을 화가들에게 팔 뿐 아니라 다른 유럽 지역 화가들의 최신 동향을 전하는 소식통 역할까지 했다. 또 중세 이후로 베네치아는 유리 세공 기술의 메카였는데, 베네치아 화가들은 벤데콜로리의 도움을 받아 유리 세공에서 사용되는 분쇄한 모래나 유리질의 착색제를 물감에 섞어 사용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티치아노를 비롯한 베네치아 화가들은 유럽 어떤 지역보다 더 빨리 좋은 물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티치아노는 이탈리아 페라라 공국의 알폰소 공작에게 의뢰를 받아 〈바쿠스와 아리아드네〉를 그렸다. 알폰소 공작은 자신의 궁을 장식하기 위한 신화 연작을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의뢰했고, 티치아노도 이 의뢰를 받은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티치아노는 그리스 신화 속의 한 장면인 ‘바쿠스와 아리아드네’를 그리기 위해 고대 그리스 문헌을 꼼꼼하게 연구했다. 그림 오른편 하단에는 뱀과 싸우는 근육질의 남자 모습이 보인다. 이 남자는 1506년 로마 근교의 포도밭에서 발견된 라오콘 군상을 본뜬 것이다. 젊은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당시 라오콘 군상을 본 화가들은 꿈틀대는 듯한 근육질의 몸매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 군상은 이후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는 물론, 루벤스 등 후대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는 고대 신화의 한 장면을 담은 작품인 동시에, 밑그림 없이 바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만큼 뛰어난 화가 티치아노의 재능이 낳은 산물이다. 그러나 티치아노가 베네치아에 살지 않았다면 이 그림은 이토록 빛나는 색채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동시대와 동떨어진 신화나 예수 수난 등을 주제로 삼는다 해도, 그림은 역시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참, 이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아리아드네의 발치께에 고이 모셔진 금빛 단지, 이 단지에 ‘티치아노’라는 서명이 쓰여 있다. 화가라는 직업에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티치아노는 그림 안에 사인을 남긴 최초의 화가이기도 했다.


전원경 집필자 소개

언제부터인가 삶의 방향이 자꾸 영국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끼는 작가다. 연세 대학교와 런던 시티 대학교 대학원(예술경영 및 예술비평 전공)을 졸업하고 월간 『객석』 및 『주간동아』의 문화팀 기..펼쳐보기

출처

런던 미술관 산책
런던 미술관 산책 | 저자전원경 | cp명시공아트 도서 소개

내셔널 갤러리, 코톨드 개럴리, 국립 초상화 미술관, 테이트 브리튼, 테이트 모던 등 영국 런던에 자리한 미술관으로 우리를 이끄는 런던 미술관 산책기다. 미술 작품들..펼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