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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홀바인 2세 - 〈밀라노 공작부인 크리스티나〉 Christina of Denmark, Duchess of Milan

Bawoo 2019. 6. 9. 21:56


한스 홀바인 2세

〈밀라노 공작부인 크리스티나〉

Christina of Denmark, Duchess of Milan

한스 홀바인 2세 〈밀라노 공작부인 크리스티나〉

한스 홀바인 2세 〈밀라노 공작부인 크리스티나〉

1538, 오크에 유채, 179.1×82.6cm



1536년부터 죽기 전까지, 헨리 8세의 궁정화가였던 홀바인 2세는 영국에 진정한 르네상스 미술을 소개한 화가였다. 이미 1450년대 후반부터 유럽 대륙에서는 다 빈치와 라파엘로 등에 의해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르네상스 미술이 만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독일 태생인 홀바인이 1526년 런던에 오면서, 대륙보다 한 세대 늦게 비로소 르네상스 미술이 시작되었다.

영국인들은 왕이든 귀족이든 간에 홀바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고 싶어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홀바인이 놀라울 정도로 그림을 빨리 그리는 화가였기 때문이다. 〈대사들〉의 주인공인 댕트빌과 셀브 주교도 불과 한나절 정도만 포즈를 취했다고 한다. 물론 홀바인이 그림을 완벽하게 완성시키는 데는 몇 달이 걸렸지만, 의뢰인의 입장에서는 서너 시간만 화가 앞에 앉아 있으면 되니 이래저래 편리했던 것이다. 동시대인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무려 4년간 〈모나리자〉에 매달려 있었던 사실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홀바인의 솜씨는 신기에 가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밀라노 공작부인 크리스티나〉 역시 홀바인의 재빠른 데생 솜씨가 빛을 발한 작품이다. 영국사에서 가장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스토리 하면 역시 ‘헨리 8세와 그 여인들’인데, 헨리 8세를 비롯해서 아라곤의 캐서린, ‘천 일의 앤’인 앤 불린, 메리 여왕과 엘리자베스 공주, 그리고 좀 더 뒤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등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헨리 8세와 그 여인들’에서 크리스티나 역시 단역으로 잠깐 얼굴을 비춘다.

잘 알려진 것처럼 헨리 8세는 38년의 재위 기간 동안 무려 여섯 명의 왕비를 갈아 치웠고 그중 두 명을 간통죄 명목으로 처형했다. 이 비극의 여섯 왕비 중 그나마 행복했던 사람은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와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다. 제인 시모어는 헨리가 고대하던 아들(에드워드 6세)을 낳았지만 아들을 낳은 직후 숨을 거뒀다. 그리고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는 헨리 8세보다 오래 살았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 중 둘(아라곤의 캐서린, 클레브스의 앤)은 이혼당했고, 또 다른 둘(앤 불린, 캐서린 하워드)은 처형당했다. 영국 초등학교의 역사 시험에는 이 여섯 왕비의 이름을 외워 쓰는 문제가 곧잘 나온다.

이 초상화의 정식 명칭은 〈밀라노 공작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다. 크리스티나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와 이사벨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다. 1522년생인 그녀는 겨우 열한 살인 1533년에 밀라노 공작과 정략결혼을 하지만, 공작이 1535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열세 살 나이로 과부가 되고 말았다. 이 초상화에서 크리스티나가 검은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덴마크와, 또 밀라노와도 상관이 없는 영국의 궁정화가 홀바인이 왜 크리스티나의 초상화를 그렸던 것일까? 이 초상화가 그려지기 1년 전인 1537년, 헨리 8세의 세 번째 왕비 제인은 왕이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을 낳고 숨을 거둔다. 마흔여섯 살의 헨리 8세는 네 번째 왕비를 찾게 되고, 신하들은 “사랑만 찾지 마시고 이번 기회에 유럽 군주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십시오”라고 권했다. 그래서 미망인인 크리스티나 공주가 헨리 8세의 신부 후보 중 한 사람이 되었고, 크리스티나의 미모가 궁금했던 헨리 8세는 홀바인을 보내서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오게 했던 것이다. 홀바인은 번개 같은 솜씨를 발휘해서 3시간 동안 크리스티나를 데생한 후 이 초상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 초상화에는 당시 그려진 다른 초상화들과는 달리 배경이 없다. 워낙 급박하게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홀바인의 초상화 속에서 크리스티나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분홍빛 뺨의 소녀다. 비록 한 나라의 공주 신분에, 또 미망인까지 된 처지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명랑하고 밝은 소녀로 보인다. 검은 상복과 두건으로도 열여섯 살 젊음이 발산하는 발랄함은 감춰지지 않는다. 헨리 8세는 이 초상화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헨리 8세와 크리스티나 공주의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헨리 8세는 네 번째 부인으로 독일 뒤셀도르프 근처에 있는 클레브스 공국의 앤 공주를 택했다. 이 초상화가 탐탁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크리스티나의 초상화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 헨리 8세는 앤과 결혼한 후에도 자신의 궁정에 이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고 한다.

사실 신붓감의 미모는 결혼 성사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정략결혼에서 중요한 것은 영국과 상대방 국가 간의 관계였다. 헨리 8세의 총신 토머스 크롬웰은 덴마크보다는 독일과의 관계 개선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했고, 크롬웰의 조언을 받아들여 헨리 8세는 25세의 앤 공주와 네 번째 결혼을 했다. 홀바인은 클레브스로 ‘출장’을 가서 앤 공주의 초상화도 그려 왔는데(이 초상화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나중에 막상 결혼하고 보니 앤은 그림과는 달리 영 못생긴 여자라 헨리 8세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워낙 미모가 달리는 데다, 영어도 못하는 독일 공주는 결혼 직후부터 헨리의 눈 밖에 났고, 결국 이 결혼 역시 이혼으로 끝나게 된다.

한편 크리스티나는 1541년에 로렌의 프랑수아 공과 재혼하지만, 프랑수아 역시 1545년에 죽어서 그녀는 두 번째로 과부가 되는 불운한 처지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헨리 8세와의 결혼이 틀어진 것은 크리스티나로서는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중매가 오가던 당시인 1538년에 헨리는 이미 마흔일곱 살로 그녀의 아버지뻘이었다. 아무리 국가 대 국가의 정략결혼이라지만 크리스티나 입장에서는 아버지 같은 남자, 더구나 아내를 죽인 경력까지 있는 남자의 네 번째 부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죽은 프랑수아 공에게 로렌 영지를 물려받아 군주가 된 크리스티나는 그 후 계속 혼자 살다가 1590년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글 - 전원경/ 출처 - 런던 미술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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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na of Denmark


Christina of Denmark (Danish: Christine af Danmark; November 1521 – 10 December 1590) was a Danish princess, the younger surviving daughter of King Christian II of Denmark and Norway and Isabella of Austria. She became the duchess-consort of Milan, then duchess-consort of Lorraine. She served as the regent of Lorraine from 1545 to 1552 during the minority of her son. She was also a claimant to the thrones of Denmark, Norway and Sweden in 1561-1590. Finally, she was sovereign Lady of Tortona in 1578-1584.


Christina of Denmark


Christina of Denmark Duchess of Milan and of Lorraine 1558, by François Clouet

Christina about 1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