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쭝런[ 李宗仁, 한어 병음: Lǐ Zōngrén]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1923년 10월 중국 국민당에 가입, 이 시점에서 광서성의 삼대 세력 중 하나로 떠올랐고 먼저 심홍영과 연합하고 루룽팅 세력을 축출했으며 이후 심홍영까지 몰아내면서 광서의 최대 실력자가 되었다. 1924년 11월 광저우 대본영 대원수 대리 후한민으로부터 광서전성수정독판 겸 광서육군 1군장으로 임명되어 광서정계군을 조직했다. 1925년 말, 광서를 노리고 쳐들어 온 전계군벌 탕지야오를 격퇴하고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심홍영, 루룽팅의 잔여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여 광서성을 장악, 자치, 자족, 자위를 구호로 삼고 공업 장려, 교육 발전, 범죄 소탕, 징병제 실시, 탐관오리 척결 등의 정책을 시행해 광서성의 정치개혁과 경제건설에 착수하고 독일인 군사고문들을 청해 광서군을 훈련시키는 등 개혁적인 군벌로 평가되었지만 광서성에서 양복 착용을 금지하는 등 일부 반동적인 정책도 행했다.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수립되고 성정부 조직법이 제정되자 이에 따라 광서성 정부를 조직하여 완전히 국민정부 산하에 들어갔다. 1926년 3월, 산하의 광서군을 국민혁명군 제7군으로 개편하여 국민혁명군 7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2.2. 국민혁명
1926년 7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의 대권을 차지한 장제스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자 7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4군 군장 리지선과 함께 8군 군장 겸 전적총지휘 탕성즈를 원조하여 호남으로 진격했다. 우한 삼진이 함락된 이후에 강서성으로 진격했으나 군비 문제로 장제스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고[1] 1927년 1월 1일에 개최된 난창 군무선후회의에서 장제스와 군비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절강성 진공이 시작된 이후 장제스가 직접 지휘하는 중로군 산하 강좌군의 총지휘를 맡아 상하이로 진격했다.
상하이 함락 이후 우한 국민정부로부터 안휘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어 국민당 좌파의 회유를 받았다. 3월 말 장제스가 청당을 위해 거사가 필요하다는 의사를 타진하자 처음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4군 군장 리지선이 장제스를 적극 지지하였고 결국 장제스의 지시로 7군 주력부대를 이용하여 난징의 2군과 6군을 난징에서 축출하고 난징의 공산당원들을 체포, 수비군을 무장해제시키고 4.12 상하이 쿠데타에 참여,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참했다. 이후 탕성즈 등이 난징을 공격하려 하자 서정토공을 외치며 이들과 대치했으나 양 국민정부가 모두 북벌에 나서면서 일단 북양군벌들을 상대하게 되었고 국공결렬 이후 후한민, 장제스 등과 함게 우한 국민정부에게 2기 4중전회를 개최하여 평화적으로 분열을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1927년 8월, 쑨촨팡과 탕성즈, 장파쿠이 등의 공격을 동시에 받은 장제스가 위기에 처하자 장제스의 우한 공격 명령을 거부하고 답은 하야 밖에 없다고 장제스를 압박하여 하야하게 한후 우한 측과 영한합작을 논했다. 쑨촨팡이 난징 점령을 시도하자 허잉친과 함께 4월 30일, 이들을 크게 격퇴하였고 8월의 용담전역에서 승리하여 영향력이 크게 성장함으로 난징 국민정부의 실세가 되었다. 9월 15일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가 설립되자 탄옌카이, 쑨커, 장췬, 셰츠 등과 함께 이를 주도하고 국민당의 통합을 꾀했으나 이 과정에서 우한 정치분회를 중심으로 난징 합류를 거부하던 탕성즈가 무단으로 안휘성을 점령하고 휘하의 허젠을 안휘성 주석으로 삼자 긴급회의 끝에 토벌을 결정, 1927년 10월 당계전쟁을 일으켜 탕성즈를 몰아내고 호남과 호북을 장악하여 우한 정치분회 주석, 제4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장제스와 군비 문제라거나 여러 불화가 있었기 때문에 1927년 11월, 장제스가 일본 외유를 떠나 장제스-다나카 회담을 개최하자 일본의 힘을 빌려 자신들을 토벌하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길 정도였고 장제스가 복귀하는 과정에서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에 연루된 광동파를 감싸는 모습에 크게 불만을 품었으나 이미 장제스의 복귀는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서산회의파와 결렬하고 다시 장제스를 지지하여 장제스의 우위를 인정했다. 1928년 4월,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선포되자 다시 북벌에 참여했다.
베이징 함락 이후 사실상 북벌이 완성되자 1928년 6월 27일, 우한에서 베이핑으로 북상 중이던 장제스와 회담하여 재병에 관해 논의했고 장제스가 본격적으로 재병론을 내세우자 표면적으로는 찬성했으나 속으로는 불만을 품었다. 7월 6일, 장제스의 주재로 펑위샹, 옌시산 등과 함께 베이핑에서 탕산회의를 개최, 편견회의에 대해 합의했고 1928년 8월 1일, 난징에서 열릴 예정인 오중전회 참석을 위해 난징에 도착하여 오중전회에 출석했다. 여기서 정치분회 해체가 논제로 오르자 노골적으로 반대하였으나 결국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상하이로 떠나 우징헝, 장런제 등과 회동했다. 1928년 9월 18일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가 개최되자 후한민, 차이위안페이, 리스쩡, 다이지타오, 쑹쯔원 등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중화민국국민정부조직법, 중화민국당훈정요강 등을 의결통과시켰다. 1928년 10월 8일 중국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가 발표한 국민정부 조직법에 따라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 10월 18일에 군사참의원 주석에 임명되었다.[2]
2.3. 반장전쟁[편집]
장제스가 유화책을 제시하면서 리쭝런은 초기에 정치분회의 폐지를 포함한 중앙의 조치에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으나 상하이에서 장제스가 중앙의 위신을 위해 잘못을 시인하고 탄옌카이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하자 자신의 조치엔 조금도 잘못이 없다고 맞섰다. 장제스는 리쭝런에게 난징으로 돌아와 사태를 해결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리쭝런의 조사를 면제해주었으나 결국 3월 26일 바이충시, 리지선 등과 함께 리쭝런에 대한 면직, 조사 처분 및 광서파에 대한 토벌령이 내려져 1차 장계전쟁이 일어났다. 리쭝런은 패배하여 호남을 잃고 5월에 광서까지 밀렸다. 리쭝런은 바이충시, 황샤오훙과 함께 호당구국군을 선포, 결국 중앙군에 대패하여 영국령 홍콩으로 달아났고 3전대회는 리쭝런과 바이충시의 당적을 박탈했다.
리쭝런의 잔여세력은 장파쿠이와 합세해 2차 장계전쟁을 일으켰다가 허잉친에게 진압당했다. 하지만 리쭝런은 포기하지 않고 1930년 2월 21일 황샤오훙, 바이충시, 장파쿠이, 호종탁 등과 연명으로 장제스의 하야와 옌시산의 전국 육해공 총사령 취임을 요구하면서 중원대전에 참여했다. 1930년 3월 15일 리쭝런은 펑위샹과 함께 육해공 부사령관에 추대, 3월 21일에 취임했다. 리쭝런은 바이충시, 장파쿠이의 병력을 규합하여 광서성에서 봉기, 호남으로 진군하여 형양, 장사, 악주를 차례로 점령하고 우한을 위협했으나 호남성 정부주석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사이 훈련총감 겸 우한 행영주임 허잉친이 8로군과 4로군을 지휘하여 이들을 격퇴했다.
1930년 9월 15일 베이핑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옌시산, 펑위샹, 왕징웨이, 탕사오이, 장쉐량, 셰츠 등 7인과 함께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북방의 옌시산, 펑위샹의 군세 역시 장쉐량이 중앙옹호를 통전하고 관내로 진출하면서 토벌당했고 11월 베이핑 국민정부가 취소되고 펑위샹과 옌시산 모두 하야 후 도주하면서 반장전쟁은 반장파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이후 난징 국민정부로부터 바이충시와 함께 영구 제명을 당했다.
2.4. 초공작전과 양광사변[편집]
1931년 9월, 광저우 국민정부군이 북상했으나 호남 전선에서 회군해버렸다. 부로가 며칠 후인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거국적인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난징으로 진격하여 광저우 국민정부가 초공과 항일을 영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쑨커와 왕징웨이 모두 그렇게 하면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왕징웨이와 함께 장제스의 하야를 강경하게 요구하여 장제스가 "왜구들에게는 사사건건 양보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안으로는 고압적 자세를 취한다"라고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결국 12월 25일 장제스가 하야하면서 12월 28일에 열린 4기 1중전회에서 국민당 중앙감찰위원, 서남정무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36년 9월 17일, 광저우에서 장제스에게 경례하는 리쭝런 |
이후 4기 1중전회의 결정에 따라 양광 지역에 중앙집행위원회 서남집행부, 서남정무위원회, 군사위원회 서남분회를 설치하여 광서지역에서 반독립적인 지위를 누렸으며 1933년 복건사변이 일어나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제5차 초공작전이 일어난 이후 1934년 6월 허젠이 찾아와 호남에 10개의 비행장을 건설하여 적극적으로 초공작전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에 동의하였다. 1934년 홍군이 대장정에 오르자 상강에서 홍군을 공격해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그의 광서왕 놀이도 슬슬 끝물에 이르렀다. 1932년 1월 장왕합작으로 권력에 복직한 장제스는 서남정치분회 취소, 화폐개혁, 광서군벌의 주 수입원인 아편 단속을 통해 차차 광서군벌을 압박했고 1936년 5월, 양광지역의 정신적 지주인 후한민이 사망하자 리쭝런은 장제스가 자신들을 토벌할 것이라 여겨 6월, 월계군벌 천지탕과 힘을 합쳐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항일을 구실로 호남에 출병하여 장제스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켰지만 천지탕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순식간에 몰락했고 9월에 협상을 통해 장제스에게 항복하고 광서의 통치권을 보장받았다.
그해 12월, 서안 사건이 터졌을 때는 공산당 토벌을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2.5. 중일전쟁[편집]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제2차 상하이 사변으로 인하여 전화가 화중, 화남으로 번지자 장제스에게 항전 논의를 위하여 난징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룽윈, 류샹 등은 이것이 장제스가 항일을 구실로 각 지방을 장악하려는 술수라고 여겨 리쭝런에게 가지 말라고 청했으나 장제스가 독일식 정예부대인 87, 88사단을 비롯한 중앙군 30만명을 투입하는 등 항전에 성의를 보이자 10월 13일, 장제스와 회담, 장제스의 항일 의지를 믿고 복종하게 되었다. 1938년 1월 15일, 옌시산, 펑위샹, 리지선, 청첸, 천샤오콴과 함께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진포철로를 수비하기 위한 5전구가 설치되자 5전구 사령관에 취임하였고 30개 보병사단 및 여단을 지휘하였다. 1월 23일 군사위원회는 리쭝런에게 "진포로 남단 전방으로 전진하는 적에 대해 반드시 쉬저우, 방부 두 지역을 고수해야 한다. 명령 없이는 철수해서는 안된다."는 작전방침을 하달하며 병력을 증원해주었고 2월 3일 "전구는 진포 남당의 적과 결전을 취하여 회하 인마지역에서 적을 저지한다. 그 측방에서 지속적으로 타격하여 점차 추출하여 적을 소탕하고, 동시에 노남 산지를 견고히 한다. 진포 북단 및 농해 동단에 대해서는 측면에서 공세를 취하여 적의 남하나 서쪽 방면으로 진출을 견제함으로써 쉬저우를 지킨다."는 추가 명령을 하달했다.
1938년 3월, 일본군 15만명이 쉬저우 공략을 위해 남하하자 장제스는 탕언보와 쑨롄중을 보내 리쭝런을 지원하게 했고 리쭝런은 분산전략을 취하며 일본에 맞서는 한편 4월 3일에서 4월 6일에 걸쳐 타이얼좡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중일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회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타이얼좡 전투에 고무된 군사위원회는 일본군 주력을 쉬저우로 유인하기 위해 5전구에 64개 사단 및 여단, 총 60만 대군을 집결시켜 일본군을 각개격파하라고 지시했고 5월 12일, 리쭝런은 예하부대에 "전구는 적이 분산된 틈을 이용, 병력을 집중하여 회북의 적을 격파하고 다시 기타 방면으로 병력을 전환시켜 적을 각개격파한다."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일본군은 쉬저우에 중국군 대부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대규모 포위 공격을 감행했으나 5월 15일 군사위원회가 제때 퇴각 명령을 하달함에 따라 5월 16일 리쭝런은 서남 방면으로 포위를 돌파하라고 지시, 5전구의 중국군은 일본군의 포위를 돌파하고 하남, 안휘로 퇴각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우한 북쪽의 대별산맥에 주둔하며 우한 방위전에 참가했으나 10월 21일 우한 포기가 결정됨에 따라 철수하고 환서, 악북, 예남을 방어했다. 1939년 5월, 일본군이 11만 3천명을 동원하여 짜오양을 공격하자 25만명으로 반격, 짜오양을 점령하고 방심한 일본군에게 반격을 감행해 엄청난 피해를 안기고 점령지를 모두 탈환했다.
1939년 동계공세작전이 시작되자 우한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일본군이 1940년 5월 의창 공격을 시도하자 6개 집단군, 13개 군, 50개 사단 35만 대군을 동원하여 치열하게 저항, 일본군이 공세종말점에 이르러 다시 퇴각하는 순간을 노려 탕언보 등을 동원해 반격하여 일본군 3사단을 포위하는 등 활약했으나 일본군 39사단 231보병연대가 가세하면서 결국 크게 패하여 퇴각했다.
1943년 한중 행영주임이 되었으며, 1944년 대륙타통작전이 벌어지자 장파쿠이를 비롯한 대다수 부대가 맥없이 퇴각하는 가운데 그의 예하 부대가 계림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였다. 전쟁 말기에 이르러 미국과 접촉하여 장제스 제거 음모를 꾸미기도 했으나 미 해군이 장제스를 지지하면서 실패했다. 전쟁이 끝난 후 베이핑 행영주임이 되었다.
2.6. 국공내전과 미국 망명[편집]
이후 요심전역, 회해전역 등에서 국민정부군이 참패하여 48년 9월에 쉬저우가 함락되고 난징까지 위협당하자 바이충시, 청첸 등과 함께 장제스 하야를 압박하였다. 11월에 웡원하오 내각이 사퇴하였고 계속되는 하야 요구에 장제스는 1948년 12월 31일, 난징의 총통 관저에서 리쭝런, 쑨커 등 당정의 요인 40여명을 소집하여 자신의 하야에 대해 물었고 상당수가 장제스의 하야에 찬성하자 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 평화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거취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1월 21일 하야하면서 리쭝런이 총통 대행이 되어 중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리쭝런은 중공과의 화의를 주장, 1월 22일 평화회담을 제안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장강을 경계로 천하를 남북으로 분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리지선 등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의 인물들을 초빙하는 한편, 행정원장 쑨커에게 각지의 초비총사령부를 군정장관공서로 개편, 전국의 계엄령 해제, 감란건국총대 폐지, 정치범 석방, 감란에 저촉되어 폐간된 신문, 잡지 발행 허가, 특별 형사법정, 특별형사조례 취소, 특무활동 중지 등을 지시했다.
또한 1월 27일 마오쩌둥에게 담판장소를 정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2월 1일 자기 자신이 상하이로 가서 간제허우, 옌후이칭, 장사조로 구성된 대표단을 조직해 담판을 시도했으나 중공은 리쭝런에게 전범 처벌, 헌법 폐지, 중화민국 법률 폐지, 민주원칙에 의한 정부군 개편, 관료자본 몰수, 토지제도 개혁, 매국조약 폐기, '반동분자'를 배제한 정치협상회의 소집과 민주연합정부 해체를 비롯하여 무조건 항복에 가까운 조건을 강요하였다. 리쭝런은 2월 1일, 중앙당부를 광저우로 옮기고 2월 5일에 수도를 역시 광저우로 옮겨 난징 함락에 대비하는 한편 중공과의 평화회담에 매달렸다. 3월에 행정원장 쑨커가 사직하자 리쭝런은 허잉친을 신임 행정원장에 임명했으나 베이핑으로 간 대표단들마저 중공에 줄줄이 투항하고 4월 20일 중공군이 장강을 남하하여 난징을 공격하는 등 전황은 악화될 뿐이었다.
결국 4월 22일 리쭝런은 장제스에게 총통 복직을 청했으나 장제스는 거절했다. 이에 리쭝런은 4월 23일 난징을 떠나 광저우로 가면서 군사권의 전권 부여, 대만으로 옮겨간 금, 은, 외화의 환송, 대만으로 옮겨간 무기의 환송, 모든 군사기관은 국방부장에 복종, 국민당의 정책결정권 박탈 등을 장제스에게 제안했으나 장제스는 당연히 이를 따르지 않았다. 5월 24일 상하이가 함락되자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리쭝런의 요청을 묵살했다. 상하이 함락에 책임을 지고 허잉친도 사퇴하고 리쭝런은 쥐정을 새로운 행정원장으로 지명했으나 5월 31일의 투표에서 임명안이 부결되어 다시 옌시산을 행정원장에 임명, 6월 3일 투표에서 임명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10월에 광저우까지 위험해지면서 리쭝런은 충칭에서 같이 사천 방위에 대해 논하자는 장제스의 제안을 뿌리치고 심해지던 장출혈 치료를 이유로 11월 20일 영국령 홍콩으로 떠나 신병 치료와 미국의 원조를 구하겠다고 미국행을 선언했다. 이에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쥐정 등을 홍콩으로 파견해 리쭝런에게 충칭으로 돌아와 정부를 지휘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리쭝런은 이를 거절하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든 못받아내든 1개월 안에 귀국하여 공산당과 싸우겠다고 공약하고 12월 8일 미국으로 떠나 기독교장로회 병원에 입원했고 퇴원 후에는 뉴저지에 체류했다.
1950년 2월 3일, 국부천대를 단행한 국민대회 대표들은 연명으로 장제스 복직을 요청하였다. 2월 12일, 감찰원은 리쭝런은 탄핵안을 가결하고 국민대회에 리쭝런을 탄핵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2월 12일, 국민당 비상위원회는 리쭝런에 조속히 귀국할 것을 청하였고 2월 21일, 3일안에 귀국하지 않으면 리쭝런의 총통대행직을 박탈할 것이며 장제스에게 복직을 청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리쭝런은 따르지 않았다. 리쭝런은 미국에 체류하면서 맹우인 바이충시에게 미국 망명을 권했으나 바이충시는 따르지 않고 대만으로 건너갔다. 1950년 3월 1일 장제스가 권력에 복직하자 장제스에게 전화를 걸어 장제스의 복직은 헌법 49조를 위반한 것으로 부총통이 결위되었을 시에는 행정원장이 대행하며 입법원이 새로운 총통을 선출하는 것이 헌법에 맞는 조치라고 직접 격렬히 항의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의 항의를 묵살했다.
"내가 총통의 직무에 복귀한 것은 국민대회 대표들의 건의에 의한 것이고 각 방면의 간절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군중들의 뜻에 순응하였던 것이다."
미국에서 장제스를 막을 수단은 없었고 1954년 국민대회에서 탐오하고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또다시 탄핵안이 제출되었다. 1950년에 제출된 탄핵안은 1952년 감찰원 통과 이후 국민대회에서 부결되었으나 이번 탄핵안은 국민대회에서 1468표 중 1403표의 찬성으로 통과됨에 따라 천청에게 부총통 자리를 내주게 되면서 공직을 잃었다.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장제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리쭝런회고록을 집필했는데 현대 중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로 여겨진다. 하지만 한국에 정발된 적은 없으며 현재는 원서로조차 구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한편 이 리쭝런회고록에서 리쭝런은 장제스의 복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장선생의 복직은 결코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는 일찍이 이미 대만의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굳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질책을 한 이유는 대리총통의 신분으로서 적어도 반역을 없애야 한다는 나의 입장을 표시함으로써, 국가의 법통을 위하여 일말의 존엄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
2.7. 중공 합류와 말년[편집]
이후 혁명열사릉을 참배하고 중국 공산당의 업적을 칭송하며 대만 문제에 미국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여는 등 국공내전 이후 중화민국에 합류하지 않고 외국을 전전하던 국민당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파간다에 활용되었다.[3] 1966년, 같이 귀국하였던 부인 궈더제(郭德洁)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중국 공산당의 주선으로 27세의 간호사 후여우쑹(胡友松)과 재혼하였다. 이후 베이다이허에서 신혼을 즐겼는데 부부관계는 괜찮은 편이었다고.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후에 박해를 받았지만 1966년 국경절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받는 등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1968년에 암 진단을 받았고 1969년 1월 30일, 베이징에서 십이지장암으로 사망했다. 중화민국 측에서는 리쭝런이 가치가 떨어진 꼭두각시 노릇만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비난했다. 저우언라이가 장례식에 참여하여 타이얼좡의 승리와 중국으로 귀환한 두개의 큰 업적이 있다고 추도하였다. 남은 아내 후여우쑹은 베이징에서 추방되어 하방되었다가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에 복권되어 국가 제1역사 당안관에서 일하였다.
3. 주요 경력[편집]
1대 | → | 총통 대행 | → | 총통복귀 | |||
→ | → |
헌정 실시 | → | 1대 | → | 2대 | |||
→ |
4. 매체에서[편집]
전통적으로 Hearts of Iron 시리즈에 광서 파벌의 지도자로 등장했으며 해당 시리즈의 최신작인 호이4에서도 광서 파벌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근데 동시에 중화민국 육군 참모진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자기나라의 정치고문이기도 하다.(...) 뭐 국민당의 여러 파벌로 갈려져 있어도 필요에 따라 초파벌적인 내각을 자주 구성한 전례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말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호이4 시스템을 고려하면 그냥 고증이 미비했거나 중국 쪽에는 관심이 없었던(...) 모양. 처음에는 아예 초상화 조차 없었다가 나중에 패치로 추가되었다. 이후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오면서 과거보다는 좀 풍부해졌는데 그래도 2차 양광사변을 비롯해서 과거에는 고증했던 이벤트들조차 사라졌다. 중화민국에 복속되면 디시전 합병 테크 1단계인 군대 통합 디시전 선택 이후 중화민국 장성진에 추가된다.
5. 참고문헌
5.1. 저서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5.2. 논문[편집]
- 蔣介石과 4·12 政變,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38권, 동양사학회.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中央特別委員會의 役割과 活動, 김영신, 동국사학 36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唐生智와 武漢國民政府, 나현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2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北伐完成 직후 蔣介石의 中央軍體制 確立 努力과 編遣會議,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48권, 동양사학회.
- 국민당 3전대회 전후의 반장운동, 김영신, 중국학연구 30, 중국학연구회.
- 동북군의 관내진출과 그 결과, 송한용, 중국 근현대사연구 6, 중국 근현대사학회.
- 訓政時期約法 제정 논란과 ‘蔣·胡合作’의 파국, 김영신, 동양학 42권 42호,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원.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50호,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53호,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55호,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61호, 중국학연구회.
6.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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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쭝런 李宗仁 | |
생애 | 1890년 8월 13일 ~ 1969년 1월 30일 (7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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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청나라 광시 성 구이린 현 |
사망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
복무 | 중화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1년 ~ 1948년 |
최종 계급 | 중화민국 육군 대장 |
기타 이력 | 군인 겸 정치가 중화민국 구이린 군관학교 졸업 일본 오시마 대학교 법학과 졸업 중화민국 부총통 겸 총통 권한대행 중국공산당 명예고문위원 |
리쭝런(이종인, 중국어: 李宗仁, 한어 병음: Lǐ Zōngrén, 웨이드-자일스: Li Tsung-jen, 1890년 8월 13일 ~ 1969년 1월 30일)은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였다.
초기 군사 경력
광시 성 구이린 현에서 교사 리베이잉에게 태어나 1908년 광시 육군 예비 사관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0년 10월 혁명적인 원인에 가입하였다.
1912년과 1913년 가을 사이에 리쭝런은 구이린 군사 간부 훈련 학교에서 형식적인 군사 교육을 받고 중화민국 육군에서 중위로 나타났다. 1917년과 1918년 사이에 그는 소대, 보병 중대와 결국적으로 대부대의 사령관으로서 헌법적 보호 전쟁에서 싸워 후난 성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용감한 군인과 뛰어난 사령관으로서 평판을 얻었다.
1921년 그는 중국 국민당과 제휴하여 자신의 군대를 자신의 고향 광시 성으로 돌아가는 데 지도하여 자신의 부하들을 제2 광시 독립 육군으로 이름을 지고 자신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23년으로 봐서 리쭝런은 이미 가장 영향력 있는 광시 성 독군들 중의 하나였으며, 이리하여 그는 쑨원을 만나 그해 10월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였다.
1924년과 1925년 사이에 국민당군의 성원과 함께 그는 광시 성에서 남아있는 마지막 정치적 야당인들을 꺾고 광시 성의 군사 지사가 되었다. 1926년 3월 리쭝런의 부하들은 국민당 정부 아래 국민당군의 북벌을 위한 혁명 육군 7단으로서 정식으로 결성되어 전쟁에서 그는 1927년 우한을, 1928년 6월 베이징 - 톈진을 포획하였다.
1929년 장제스는 국민당의 후원에서 이전에 독군들과 관계들을 불쾌하게 만든 자신 아래의 모든 군사적 권력을 통합하려고 시도하여 당으로부터 리쭝런의 갈리짐으로 이끌었다. 그는 당에 배신자로 간주되었다. 장제스에 의한 이 시도는 리쭝런의 광시군이 위양 구를 포획하여쓰나 결국 장제스에 의하여 술책으로 이겨진 중원대전으로 곧바르게 지도되었다.
1931년 11월 만주에서 일본의 침략은 리쭝런을 포함한 많은 독군들을 데려왔다. 1935년 리쭝런은 중화민국 육군의 대장으로 진급되었다.
중일 전쟁
제2차 중일 전쟁이 시작된 후, 리쭝런은 5번째 전쟁 지역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쉬저우 전투에서 지도자 역할을 차지하였다.
그는 1938년 6월 우한 전투, 1939년 4월과 5월 쑤이샨-자오양 전투, 1939년과 1940년의 겨울 공세와 1941년 1월과 2월 남부 허난 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1943년 9월 리쭝런은 1번째, 5번째와 10번째 전쟁 지역들에 직접 지휘력과 함께 최고 사령관 본부의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국공 내전[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리쭝런은 군사에서 영향력을 잃었으나 정치적 역할에 더욱 취하였다. 1948년 4월 28일 그는 5일 전에 총통 선거를 이긴 장제스 총통 아래에서 국민 회의에 의하여 중화민국의 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1월 22일 그는 중국 공산당의 반란을 구속하는 데 국회의 무능에 대항에서 장제스의 사임으로 1947년 중화민국 헌법의 기간들에 총통 권한대행을 맡았다. 총통 권한대행으로서 리쭝런은 베이징에서 공산당원들과 협상하려고 시도하였으나 협상들은 적은 성과로 오고 그는 장제스의 후원자들에 의한 공산당원들과 개방 담화들을 위한 연약한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4월 난징의 국민당 정부 수도는 공산군에게 함락되었고 리쭝런은 광둥 성의 광저우로 정부의 철수를 결성하였다.
말년의 세월
1950년 11월 20일 국공 내전에 어떻게 계속 나가야 하는 데 의견 차이들이 나온 후, 자신의 쇠퇴한 건강과 함께 리쭝런은 난닝에서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방문하여 장제스를 "독재자"로 탄핵하였다. 1950년 3월 1일 장제스는 타이완의 임시적 수도 타이베이로부터 중화민국의 총통직을 쥐었으며, 동시에 총통 권한대행으로서 리쭝런의 기간을 끝냈다. 그는 1954년 3월 더욱 나가서 장제스의 명령들에 의하여 자신의 부총통 칭호가 탄핵되었다.
리쭝런은 공산당의 동정자가 되어 1965년 7월 20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입국하였다. 그는 1969년 1월 30일 베이징에서 십이지장 암으로 사망하였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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