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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蔣介石)의 심복, 국민혁명군 참모총장, 중화민국 행정원장] 허잉친[何應欽, 병음: Hé Yìngqīn]

Bawoo 2019. 9. 15.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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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3대 행정원장
중화민국 2,4대 국방장관
정체
何應欽
간체
何应钦
한국식 독음
영문
He Yingqin
경지(敬之)
출생
1890년 4월 2일 청나라 귀주성 흥의현
사망
국적

학력
직업
종교
행정원장
재임 기간
국방장관
재임 기간

1. 소개
중화민국군인, 정치가. 장제스의 최측근 출신으로 중화민국 육군 총사령관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서안 사건 때 장제스를 날려버려야 한다고 한 것이 걸려서 말년엔 천청 등에게 총애를 뺏기고 좀 추웠다. 그나마 생계 걱정까지 했던 성스차이 등에 비하면 말년까지 꽤 잘나갔다.

2. 생애

2.1. 유년시절
구이저우 토착민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은 책에 둘러싸여 보냈다고 한다. 1907년 구이저우 육군 소학교에 입학했고 1908년 우창 육군중학에 진학했다. 같은 해에 일본의 도쿄진무학교에 파견되는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한다. 이때 역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장제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자 중국으로 돌아와 혁명에 동참했고 상하이 도독 천치메이의 혁명 활동을 보좌했다. 이후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시작되자 위안스카이 타도활동을 하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 28기로 입학했다.

1916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구이저우의 군벌 류셴스(劉顯世)에게 스카웃되어 병사들을 조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는 그의 동기 중 한명이 류셴스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귀저우 군의 4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허잉친은 류셴스의 라이벌인 구이저우 군 사령관 왕원화(王文華)를 지지했고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왕원화의 인척이 된다. 왕원화가 류셴스를 내쫓고 구이저우의 지배자가 되자 왕원화는 허잉친을 구이저우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임명했고 경찰권을 그에게 맡겼다. 하지만 1921년 왕원화가 암살된 후, 허잉친은 구이저우에서 추방당한다. 이때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홍일의 허잉친 밑에서 기관총 소대장 겸 보급관리장교로 복무했으나 류셴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왕문화에 의해 추방되어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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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원화(1887~1921)의 모습

2.2. 중국 국민당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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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허잉친

이후 허잉친은 윈난 등을 떠돌면서 자신을 받아줄 군벌들을 찾아다녔는데 옛 친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름아닌 장제스였다. 허잉친이 일본에 달아난 후에도 장제스는 천치메이를 보좌하여 혁명 활동을 했으며 천치메이가 암살된 후에는 쑨원을 보좌했고 쑨원이 2차 호법운동을 통해 북벌을 기도하다가 군벌 천중밍이 일으킨 영풍함 사건으로 위기에 처했을때 누구보다도 일찍 달려와 그를 도우면서 쑨원의 심복이 되어 있었다.

1923년 쑨원은 쉬충즈, 양시민, 유진환의 도움으로 광저우를 점령하고 3차 광동정부를 수립했으며 1924년 1차 국공합작을 형성, 소련의 지원을 받아 황포군관학교를 만들어 자체적인 무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장제스는 황포군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는데 장제스가 교관으로 허잉친을 지목한 것이다. 장제스에게서 허잉친을 추천받은 쑨원은 허잉친에게 전보를 보내 교관 자리를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허잉친은 이를 수락, 황푸군관학교와 국민당에 몸을 담게 된다. 1924년 장제스가 광저우 상단이 영국의 사주를 받아 밀수한 무기를 압수하여 광저우 상단 사건이 일어나자 진압에 참가하였다.

1925년 천중밍이 광저우를 되찾기 위해 3만의 병사들을 데리고 반격을 감행해오자 국민당의 1차 동정을 통해 자신의 생도들을 데리고 크게 무찔러 소련 고문 바실리 블류헤르장제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이때 몇차례 전술적인 허점을 보이기도 했다. 후한민의 군민재정 통일선언에 반발한 양시민, 유진환이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에 참가했고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일어난 국민당의 2차 동정에서도 활약한 허잉친은 총교관 자리까지 승진했고, 장제스의 직계인 직계인 황포군관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1군 1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군권을 통일하고 싶었던 장제스가 1925년 12월 10일, 허잉친을 1군장으로 승진시켜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1926년 1월 15일에 사의를 밝히자 군사위원회는 이를 수락, 1926년 1월 20일 장제스의 군장직 사퇴를 받아들이고 허잉친을 신임 1군 군장으로 임명하였다. 장제스는 대신에 신설된 국민혁명군 총감이라는 직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대단한 권한은 없어서 장제스와 왕징웨이 및 다른 군장들 간의 불화는 가중되었다.

허잉친 역시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공산당 출신 당대표들과 마찰을 빚어 2차 동정 이후 동강 지역을 관리하게 된 1군 당대표 저우언라이의 해임을 요구하고 1사단 당대표 이공내(李公倈)의 공산주의 선전을 저지하는 등 중국 공산당과 신경전을 벌였고 장제스의 용공 입장을 비판하는 우익 장령들의 대표자를 맡아 장제스에게 성향에 대해 해명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여 1925년 12월 말, 장제스는 허잉친 휘하의 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해명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장제스의 성향에 대한 의심은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이 터진 후에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중산함 사건 이후 허잉친은 1군 내부의 공산당원들을 모두 퇴출하였다.

중산함 사건 이후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이 되어 국민당의 군정대권을 장악한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에 취임, 7월에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했다. 허잉친은 초기에 복건에 대한 공략을 맡아 복건성에서 쑨촨팡의 세력을 축출했고 강서 전역이 정리된 이후 동로군 총지휘를 맡아 바이충시를 전적 총지휘에 임명하여 쉐웨의 1군 1사단을 비롯하여 2사단, 3사단, 14사단, 21사단, 22사단 등의 장제스의 직계부대를 이끌고 절강성으로 진격했다.[1] 1927년 2월 18일, 허잉친의 동로군은 항저우를 점령, 장제스가 지휘하는 중로군과 합작하여 상하이를 압박했고 3월 25일 동로군 산하의 청첸의 강우군과 함께 난징을 점령했다. 이때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폭동인 난징사건이 일어나 열강과 군사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결국에는 상하이가 함락되고 3월 26일 장제스가 상하이에 입성했으나 영왕운동, 천도논쟁으로 국민당 좌파로 구성된 우한의 임시연석회의와 중국 공산당과 관계가 심하게 악화된 장제스는 심각한 분쟁을 벌이게 되었다. 난징 주위의 루디핑의 2군, 청첸의 6군의 경우 장제스가 밑을 수 없다고 장제스가 40군 군장 하요조에게 난징 위수사령관 자리를 맡겨 이들을 견제하고 있었고 허잉친의 휘하 부대에서도 노골적인 반장운동이 벌어져서 허잉친은 휘하 부대조차 장악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지휘권 행사가 가능하겠냐고 1군 사령관에서 사직할 의사를 표출하기도 했다. 공산당은 허잉친에게 손을 내밀어 장제스 편에 서지 말 것을 선동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잉친은 장제스와 함께 4.12 상하이 쿠데타에 참여, 공산당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고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탕성즈가 주도한 우한 국민정부의 동정과 쑨촨팡, 장쭝창의 쉬저우 점령으로 장제스의 군사적 지위가 흔들리자 리쭝런, 바이충시와 합세, 장제스의 하야을 종용하였고 이 때문에 장제스는 1927년 8월 12일 하야를 통전하고 일본으로 외유를 떠났다. 이후 허잉친은 8월 30일 광서파와 합작하여 난징을 습격하려는 쑨촨팡의 부대를 섬멸하고 영한합작에 참여, 왕징웨이의 4중전회 개최 주장을 지지했다. 그러던 중 왕징웨이와 장제스가 합작하면서 장제스의 복직이 거의 확실시되자 서산회의파로부터 반장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당연히 묵살했고 다시 장제스에게 복종, 1927년 12월 10일, 왕징웨이와 함께 장제스 복직안을 4중전회 예비회의에 제출했다.

1928년 2월 2일 국민당 2기 4중전회에 참여하여 군사위원에 선출되었으며 2월 13일 1군이 1집단군으로 개편되면서 사령관 자리를 도로 장제스에게 내주었다. 4월에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선포되자 1집단군으로 편성되어 산동 방면으로 진군했지만 제남 사건에 발이 묶여서 베이징 점령의 공은 옌시산의 3집단군에게 돌려야 했다. 1928년 10월 8일 국민정부 조직법 발표 이후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고 10월 18일 회의에서 훈련총감에 임명되었다.

1928년 12월 21일 공포된 국군편견위원회조례에 따라 편견위원에 선출되었고 1929년 편견회의 개최 이후 1월 5일 제안 심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월 22일 개최된 5차 편견회의에서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리지선, 장쉐량, 양수장, 탄옌카이, 쑹쯔원, 우징헝과 함께 편견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월 25일의 6차 편견회의에서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리지선, 우징헝, 다이지타오와 함께 육군군관학교 교무위원에 임명되었다. 1월 26일 편견회의 폐막 이후 2월 15일의 3차 편견위원회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중앙편견구 판사처 주임에 임명되어 중앙편견구의 재병을 감독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앙의 권력 집중을 위한 정치분회 폐지와 더불어 군벌들의 군사력 기반을 감축시킨다는 편견이 진행됨에 따라 군벌들의 불만이 증대되었다. 결국 군벌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1929년 2월, 우한 정치분회 주임 리쭝런에 의해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무단해임하고 35군 군장 허젠을 신임 호남성 정부주석으로 임명한 호남 사건이 발생했다. 허잉친은 채원배, 리쭝런과 함께 루디핑 파면에 대한 조사를 맡았다. 초기에 장제스는 이를 유화적으로 처리하려 했으나 계계와의 의견 차이가 끝내 좁혀지지 않아 결국 3월에 1차 장계전쟁이 폭발, 본격적인 반장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5월에 1차 장풍전쟁이 발발하자 방본인과 함께 타이위안에 파견되어 옌시산이 중앙을 옹호하도록 설득했고 9월에 장파쿠이가 반란, 계계의 잔당과 합세하여 2차 장계전쟁을 일으키자 광동 행영 주임에 임명되어 부친상도 무시하고 광동에서 장파쿠이와 계계군벌을 소탕했다. 1929년 8월 1일 난징에서 개최된 편견실시회의에 중앙편견구 주임 자격으로 참여, 8월 6일까지 7차례 회의에 참석하여 편견의 기준, 군대의 기본편제, 편견군대에 대한 안치(安置) 실시 방안, 편견 후 점검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여 편견을 위한 구체적인 실시 방안과 기준을 만드는데 참여했다.

이후 1930년 3월 우한 행영 주임으로 이동,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호남에서 궐기한 리쭝런, 바이충시, 장파쿠이의 연합군을 분쇄하여 장제스의 신임을 다시 얻는데 성공했다. 1930년 12월 4일 행정원이 개조되면서 군정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1년 6월 15일 수정된 국민정부 조직법이 발표되면서 국민정부 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차 양광사변 발발 이후 호남성 정부 주석 허젠의 요청에 따라 중앙군을 이끌고 호남성에 파견되어 공산당 소탕과 광저우 국민정부의 북벌을 저지하게 되었으나 1931년 9월, 형양을 점령하고 기세 좋게 진군하던 광저우 국민정부의 북벌군이 갑자기 회군하면서 본격적인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장제스가 12월 15일 책임을 지고 사퇴하여 난징과 광저우 국민정부가 통합, 린썬을 정부주석으로 쑨커를 행정원장으로 하는 신정부가 출범했으나 쑨커가 경제난과 일본의 침략을 당해내지 못하고 사퇴하면서 왕징웨이와 합작한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에 복귀하면서 장왕합작 체제가 수립, 다시 장제스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1930년 7월, 중국 공산당은 중원대전으로 중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리리싼의 지시로 창사 폭동을 일으켰다. 호남에서 장파쿠이, 리쭝런의 군세가 격퇴된 이후 국민정부는 8월 16일 허잉친에게 호남, 호북, 강서의 병력을 소집하여 공산당을 토벌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허잉친은 호남성 정부주석 허젠과 함께 창사로부터 공산당을 축출했다. 공산당은 8월 31일과 9월 2일, 2차례 더 창사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국민정부는 공산당의 봉기가 이어지자 1930년 11월, 중국 각지의 소비에트에 대한 토벌을 결정하고 강서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난창 행영주임에 임명하여 제1차 초공작전을 지휘하게 했으나 18사단장 장휘찬이 포로로 잡혀 처형되는 등 패배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1931년 2월 10일, 허잉친에게 초비육해공총사령관 겸 난창 행영주임을 겸임하게 하여 제2차 초공작전을 지휘하게 하였으나 또다시 실패하고 결국 장제스가 직접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제3차 초공작전을 지휘하게 하였다. 허잉친 역시 전선 총지휘 겸 좌익 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9월 초에 강서 소비에트의 수도 루이진을 위협하였으나 1차 양광사변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초공작전은 중단되었다. 이후 1932년 5월 공월민상 초비 총사령부가 설치되면서 허잉친은 공월민상 초비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제4차 초공작전에 호응했다.

2.6. 일본의 침략에 맞서다

1932년, 만주국을 수립하기 위한 성동격서 작전의 일환으로 일본군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자 허잉친은 행정원장 왕징웨이, 군사위원장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군정부장으로써 정무와 군사의 총지휘를 맡아 "한편으로는 정당한 자위에 힘써 조금의 토지라도 내주지 말 것이며 또한 한편으로는 여전히 외교방식을 통하여 각국이 그 조약상의 책임을 집행하도록 한다."라는 통고를 내면서 일면교섭 일면저항 정책을 주장했다. 그전까지의 부저항정책이 일면교섭 일면저항 정책으로 수정됨에 따라 상하이에는 차이팅카이의 19로군과 장즈중의 5군이 파견, 일본군의 침공에 맞서 격렬히 저항하여 일본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했으나 공산당과 일본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중국의 열악한 사정 때문에 난항에 부딪혔다.

1931년 2월 초, 허잉친은 강서성에 주둔한 국민혁명군 1개 사단을 차출하여 상하이에 동원하고자 했으나 강서성 정부주석 슝스후이는 이에 반대하며 초공작전에도 여가가 없으며 1개 사단을 차출하는 것만으로 일본군에 대한 승리한다는 희망을 품을 수는 없지만 공산당에 패할 염려는 있다고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에 허잉친은 2월 14일 상하이 시장 우톄청을 만나 공산당과 타협하여 일단 초공작전에 동원되고 있는 병력을 이동시켜 일본군과 대결하거나 아예 일본군과 협상하거나 둘 중 한가지를 확실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난징 국민정부로서는 초공작전을 중단할 수는 없었으므로 공산당과 협상하여 일본군의 침략에 결사항전하는 정책이 채택되지는 않았다.

2월 9일, 왕징웨이가 일본 측과의 직접 교섭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자 이에 찬성을 표했고 2월 12일 왕징웨이와 일본군 9사단 참모당 타시로 이니치로 소장과 교섭하였다. 왕징웨이로부터 교섭경과를 보고받은 허잉친은 외교부장 뤄원간, 송호 경비사령관 천밍수와 검토한 후 중일 쌍방의 철병, 평화구 설치, 평화구의 행정, 경찰의 중국측 담당이라는 3대 방침을 결정하고 우톄청에게 계속 교섭할 것을 주문하면서 국민정부의 역량 보존을 위해 조속하게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결국 송호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상하이 사변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숨돌릴 틈도 없이 이번에는 열하성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군의 침략이 시작됨에 따라 진행 중이던 제3차 초공작전을 중단시키고 1933년 3월 병력을 통솔하여 북상하였다. 장제스와 회담한 허잉친은 3월 12일, 여론의 질타를 받고 사퇴한 장쉐량을 대신하여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리위원장에 취임했고 고북구로 북상하여 일본군에 반격하려 했으나 이미 열하성장 탕위린이 전선을 너무 망쳐놓은 상태라서 손쓰기가 어려웠다. 이에 허잉친은 베이징 대학 학장 장몽린과 후스를 비롯한 베이징의 지식인들과 논의하여 영국의 중재를 받아 일본군과의 교섭에 들어갔다. 뤄원간, 구웨이쥔을 비롯한 외교부는 결사항전을 주장했으나 허잉친을 비롯한 군부는 일본과의 싸움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냉정히 인식하고 상당히 굴욕적인 당고정전협정을 체결하여 일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으나 전국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다.

1934년 제5차 초공작전이 종결된 이후 장제스가 추진한 60개사 정군계획을 비롯, 국민혁명군의 현대화, 정예화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당시 중국군의 전투력에 대해 냉정히 분석했고 일찍부터 징병제를 제안하여[2] 1933년 6월 17일 징병제 공포, 1936년 3월 1일 병역법 시행 공포를 비롯하여 징병제 실시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군사교육제도를 도입했으며 부사관 및 장교 후보생들을 교육하기 위한 군사학교를 설치했다. 또한 1936년 '장정훈련실시요강'을 반포하여 각 성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민중의 군사역량을 확대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허잉친은 이러한 군사개혁 덕분에 '각 지역의 학생들이 전투 지역에서의 복무, 선전임무의 종사, 그리고 지방경비 등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던 것이 이러한 집중훈련의 성과'로 평가했다.

당고정전협정 체결 이후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리위원장으로 베이핑에 체류하다가 1935년 일본군의 위협 때문에 하매 협정을 체결했다. 1936년 서안 사건이 발생하자 서안을 폭격할 것을 주장하는 등 강경토벌론을 주장했으나 쑹메이링저우언라이의 중재로 사태가 평화롭게 해결되자 난징으로 돌아온 장제스를 극도로 환영하며 알랑방구를 뀌었다. 하지만 허잉친에 대한 신임을 잃게 된 장제스는 천청을 군사적인 계승자로 추켜올리며 천청을 신임하게 되어 허잉친과 천청의 불화는 중일전쟁 시기까지 장기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2.7. 중일전쟁

1937년 초 전시체제화를 위한 광범위한 내용의 산업 계획을 보고하여 상하이와 난징 사이의 젝트 라인을 강화하고 철도선과 통신연락망을 개선, 보완하며 요충지 요새화를 제안하는 등 일본과의 전쟁을 계속 대비했고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터졌을 때에 사천에서 사천성의 후방기지화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7월 9일 장제스로부터 즉시 난징으로 돌아가 전면항전에 대비한 군의 재편에 착수하라는 지시를 받고 난징으로 돌아가 전국에 계엄령과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1937년 8월 11일 국방최고회의가 설치된 이후 4전구 사령관을 맡아 양광 지역과 복건의 방어를 맡아 11개 보병사단 및 여단을 지휘했다.

1937년 말, 제2차 상하이 사변으로 상하이가 함락되고 일본군의 전진이 계속되자 수도 난징이 위험해지는 가운데 주중 독일대사 오스카 트라우트만이 주도한 트라우트만 공작이 행해지자 허잉친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화평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장제스는 일본의 요구가 중국의 주권을 돌이킬 수 없이 파손시키는 것이라 여겨 거부했다. 1938년 9월 19일, 광저우 공략을 위한 일본군 21군이 편성되어 10월 12일 상륙하자 광저우 수정주임 겸 4전구 부사령관 위한머우가 싸우지도 않고 도주한 탓에 광저우를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잃고 말았고 8집단군 사령관 장파쿠이에게 4전구 사령관 직을 내주었다. 1939년 동계공세작전에 참여했으나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중국 공산당과의 충돌이 심해져서 1940년 12월 9일, 신사군에게 1월 31일 이전에 장강 이북으로 철수하라고 지시했으나 공산당이 말을 듣지 않자 신사군을 공격해 해체하는 환남사변을 일으켰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2월 23일, 충칭에서 개최된 중영미 연합군사회의에 참여하여 미국 군사대표 조지 브레트 장군, 영국의 인도주둔군 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과 대일작전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1943년 12월 카이로 회담 중에 그를 제거하려는 친위쿠데타가 시도되었으나 다이리에게 포착되어 미수로 끝났다. 이후 운남성에서 Y군의 훈련을 담당했으나 버마 탈환 작전에서 일본군의 침략에 예상되는 가운데 웨이리황으로 하여금 Y군을 버마에 투입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저항했다. 이에 스틸웰은 따르지 않으면 원조를 끊겠다고 위협했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Y군을 버마로 투입해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륙타통작전이 발동되면서 중국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944년 중국과 심각한 마찰을 빚던 조지프 스틸웰이 해임되면서 그를 우연찮게 마중하게 되었고 쑹쯔원이 행정원장 대리가 된 이후 시행한 개혁에 따라 군정부장 자리를 천청에게 내주었다. 1945년 1월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의 건의로 쿤밍에 중국 육군총사령부가 설립되자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1월 29일 국민정부군 재건 계획을 수립, 중국군의 정편, 훈련, 랜드리스로 제공받은 미국 무기로 병력을 무장하여 28개군 86개 사단 65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미군과 합동으로 반격하기로 합의, 반격작전을 준비했으나 대륙타통작전의 피해가 심해서 반격작전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45년 3월, 즈장과 랴오허커우에서 신편된 중국군을 지휘해 오카무라 야스지가 입안한 침공을 분쇄했다. 이후 형양과 광저우에 동시에 반격작전을 수행하여 일본에 대한 광범위한 반격을 감행하자고 주장했으나 미국은 이것이 비현실적이라 반대하며 광저우를 중심으로 하는 <카보네이드 작전>을 수립, 난닝에 지휘소를 설치하여 장파쿠이, 탕언보 등이 광동성에 대한 반격을 감행했으나 불과 며칠만에 일본 제국이 항복하면서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중일전쟁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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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9일 난징에서 지나파견군 총참모장 고바야시 아사사부로(小林浅三郎)[3]의 항복을 받아내는 허잉친[4]

중국 주둔 일본군이 국민정부에 항복하기로 결정한 이후 9월 8일 난징으로 가서 9월 9일 오전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고 전 세계에 순조롭게 항복을 받아냈다고 알리는 방송을 한 후 전국을 16개 수항구로 나누어 인근한 최고사령관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도록 했고 허잉친 자신도 북위 16도 이북의 베트남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하노이로 파견, 베트남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했다.

2.8. 국공내전

"만일 큰 두목께서 동의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상황은 계속 악화될 뿐이겠지요."

행정원장 취임 이후 리쭝런에게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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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장관 시절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는 허잉친

1946년 허잉친은 미국에 파견되어 트루먼 대통령을 접견했고 유엔 대표로 임명되었다. 이후 전략고문위원회가 창설되자 위원이 되었고 1948년 헌정이 실시되면서 행정원 개조 이후 초대 행정원장 인선에 올라 장췬과 함께 후보로 올라 1948년 5월 21일 행정원장에 추대되었지만 당일에 사의를 표하였다. 이후 장췬도 사의를 표하면서 웡원하오가 초대 행정원장에 취임했다. 5월 25일 출범한 웡원하오 내각은 국방부 장관에 허잉친을 임명, 허잉친이 바이충시에 이어 2대 국방장관에 취임하였다. 1948년 가을 회해전역을 지휘하였으나 참패하였고 회해전역의 패배로 1948년 11월, 옹문호 내각은 6개월 만에 총사퇴, 11월 26일 쑨커가 2대 행정원장에 취임했다. 이때 허잉친은 국방부 장관을 쉬융창에게 내주게 되었으나 1949년 1월 장제스의 총통 하야와 1949년 3월 쑨커 내각의 사퇴가 겹치면서 1949년 3월 12일 신임 행정원장에 임명되었다.

행정원장에 임명된 허잉친은 행정원 부원장에 가경덕(賈景德), 내정부장에 이한혼(李漢魂), 교육부장에 항립무(杭立武), 사법행정부장에 장지본 등을 임명했으며 국방부 장관에는 쉬융창을 유임시켰다. 허잉친은 3월 24일 행정원 정무회의에서 장즈중, 소력자, 황샤오훙, 장사조, 이증을 화의대표로, 장즈중을 수석대표로 임명하고 여기에 3월 30일 유배를 추가하여 4월 1일 베이핑에서 중공측 대표인 저우언라이, 임백거, 이유한, 섭영진과 회담하게 했으나 중공은 국민정부에 무조건 항복에 가까운 8개조 24항의 가혹한 요구를 제시했다. 중공은 4월 20일까지 서명하지 않으면 장강을 도하하여 난징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바이충시를 비롯한 군부가 강력히 반대하여 국민정부는 서명을 거부했다.

이에 담판은 결렬되었고 중공은 4월 20일 심야, 장강을 도하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4월 22일 허잉친은 장췬, 리쭝런, 바이충시 등과 함께 항저우에서 장제스와 회담하며 장제스에게 다시 총통에 복직할 것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거절하며 다만 쉬융창이 육군대학 교장으로 전임되으니 허잉친이 국방장관을 겸임하여 육해공군을 통일지휘할 것을 제안했고 이에 허잉친이 5월 1일 4대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행정원장과 겸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난징이 함락되는 등 전황이 크게 악화되어 허잉친의 저택마저도 폭도들에게 약탈당했고 허잉친은 1949년 5월에 하야가 아니면 배반 아니면 자살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리쭝런에게 알리고 총사퇴했다. 그 후임으로 옌시산이 신임 행정원장에 취임하였으나 결국 공산당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10월에 광저우를 내주었고 11월에 충칭, 12월에 청두를 잃은 후 1949년 12월 27일 국부천대를 단행하였다. 허잉친도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후퇴하였다.

2.9. 말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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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허잉친.

이후 총통 전략고문이 되어서 부유한 노후를 보냈지만 실권은 이미 대륙 시절에 없어진 후라 별로 하는 일은 없었고 그나마 남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자리도 1950년에 빼앗겼다. 장제스의 신임은 천청이 꿰어찼다. 이후로 그가 할 수 있던 것은 마작, 사냥, 운동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정치에 관여된 일이 <도덕재무장회>에 참여하여 도덕론에 관한 글을 집필하는 것이었다. 1951년 아내를 데리고 방일하였는데 그들이 도쿄에서 오래 머물며 대만에 돌아오려 하지 않자 장제스는 즉각 장췬을 파견하여 허잉친 부부를 대만으로 끌고 왔다. 1952년 10월 10일에 소집된 중국 국민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당 중앙평의위원으로 선출되었지만 명예직일 뿐이었다. 1954년 제2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 앞서 장제스에게 부총통 출마 제의를 받았지만 장제스가 자신을 떠보려는 것으로 여겨 이를 사양했다.

허잉친의 부인이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허잉친이 아내를 간호하며 집안일을 다했고, 이 때문에 정계에서 '중국 최고의 남편'이라는 칭송을 받았는데 이게 칭송인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을 방문하며 삼민주의 중국 통일 등을 주장하는 활동을 했다. 장제스가 죽고도 11년이나 더 살다가 1986년 상태가 위독해져서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투병하다가 중풍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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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6대 총통선거[5]의 폐막식에서 축배를 건의하는 허잉친


5. 참고문헌

5.1. 저서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전쟁과 대일군사전략, 기세찬, 경인문화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대만 현대정치사 상,하, 장성구, 지영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5.2. 논문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北伐完成 직후 蔣介石의 中央軍體制 確立 努力과 編遣會議,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48권, 동양사학회.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50호,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53호,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55호,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61호, 중국학연구회.

5.3. 링크

6. 관련 문서

[1] 여기에 천이의 19군, 주봉기(朱鳳岐)의 26군을 비롯한 비 장제스 계열도 일부 포함.[2] 첫 제의는 1928년 9월.[3] 흔히 오카무라 야스지로 알려져 있지만 아니다.[4] 오른쪽의 하얀 제복을 입은 인물은 중화민국 해군총사령관 천샤오콴이다.[5] 장징궈가 이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나무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