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chelbel, Canon and Gigue in D major
파헬벨 ‘카논과 지그’
Johann Pachelbel
1653-1706
Trevor Pinnok, conductor
The English Concert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 D장조는 독일 바로크 음악가 요한 파헬벨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3대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같은 조의 춤곡 ‘지그’가 딸려서 ‘카논과 지그’로 연주되곤 한다. <카논과 지그>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재발견됐다. 1919년 처음으로 출판되면서 이 곡의 인기는 급속도로 높아졌고, 오늘날에는 여러 대중매체의 삽입곡, 클래식음악 컴필레이션 음반에 수록되는 빈도도 높아지면서 그 인기는 가장 대중적인 바로크 음악의 하나인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에 비견될 정도이다.
대부분이 유실된 파헬벨의 음악
뉘른베르크 출신의 파헬벨은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에 실내악 작곡으로 잘 알려진 음악가였다. 그의 세레나데, 소나타는 현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칭송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작품들 대부분이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파헬벨 당대에 출판된 것으로 알려진 것으로는 <음악의 즐거움>(Musikalische Ergötzung)이라고 이름 붙여진 파르티타 모음집이 유일했고, 극소수의 따로 떨어진 악보들이 존재했을 뿐이다. 가까스로 전해지는 필사본 하나가 베를린 국립도서관에 등재된 악보이다. 여기에는 실내악 모음곡 두 곡이 수록돼 있다. 과거 베를린 예술대학이 보관하던 또 다른 필사본은 현재는 분실되었다고 한다. ▶파헬벨이 음악가로 활동했던 독일 뉘른베르크의 성 제발두스 성당.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가 작곡되던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어느 작가는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가 1694년 10월 23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큰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의 결혼식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됐다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는 파헬벨의 제자였고, 이 결혼식에 파헬벨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흐의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와 파헬벨, 그리고 바흐 가문의 몇몇 사람들이 연주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파헬벨의 <카논>(지그를 제외한)은 1919년 음악학자인 구스타프 베크만에 의해 최초로 출판되었다. 베크만은 이 악보집에 파헬벨의 실내악에 관한 글을 함께 수록했다. 베크만의 연구에 영향을 준 사람은 저명한 고음악 학자이자 편집자인 막스 슈타이페르트였다. 슈타이페르트는 1925년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를 편곡해 자신의 ‘오르가눔’ 시리즈로 출판했다. 그러나 이 판본은 오리지널 스코어에는 나와 있지 않은 아티큘레이션 지시와 다이내믹 표시가 상당수 있었다. 슈타이페르트가 정한 곡의 템포는 근래의 연구 결과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었다.
Paillard Chamber Orchestra performs Pachelbel's Canon and Gigue
Jean-Francois Paillard, conductor
Paillard Chamber Orchestra
추천음반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는 주로 바로크 명곡집에 수록돼 있다. 따라서 이 곡을 제외한 곡들 중에서도 좋은 곡들이 많아서 푸짐한 종합선물 같기도 하다. 장 프랑수아 파야르가 지휘한 파야르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연주(Erato, 1984년 발매)는 오랫동안 이 곡을 대표하는 연주로 사랑받았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과일을 한 입 베어 무는 것처럼 싱그럽고 자극적이지 않으며 우아하다. 아름다우면서도 화장기가 느껴지지 않는 파야르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연주다.
파헬벨이 17세기의 작곡가인 만큼 원전 연주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첫손에 꼽고 싶은 것이 1980년 녹음한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지휘)가 고음악 아카데미를 지휘한 음반(L'oiseau Lyre)이다. 낭만적인 분위기보다는 곡 자체의 윤곽이 두드러진다고 할까. 거트현의 음색이 예쁘고 지그에서 춤곡의 분위기도 잘 살아난다. ‘카논’만 6분대에 이르던 파야르의 러닝타임과 비교하면 호그우드는 카논과 지그를 모두 합쳐 5분대의 쾌속이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의 초스피드 연주가 또 있으니, 라인하르트 괴벨이 무지카 안티콰 쾰른을 지휘한 음반(Archiv)이 그것이다. 카논과 지그 합쳐서 4분대. 33rpm을 45rpm으로 듣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곡의 엄정한 질서를 지키는 데서 어떤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가 북서독일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음반(Tahra TAH 568-569)은 카논-지그-카논을 12분 30초대로 완보한다. 1954년의 연주이지만 낡았다는 느낌이 전혀 없고 독일적인 진지함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 배어 나온다. 지그 후에 다시 나오는 카논은 장중해서 마치 브루크너 교향곡처럼 느껴진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월간 <객석> 편집장 역임, 현재 (재)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거장들의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이 반복되는 삶이 마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