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곡: K.81, K.88, K.89, K.90, K.91, K.287, K.288, K.328
“여러분이 애호가이든 전문가이든 이 곡에서 어떤 심오한 가르침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쳄발로의 장엄함에 친숙해지기 위한 예술을 기대해야 합니다. 내가 이것을 출판하게 된 것은 이익을 위한 것도 야심을 위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순종하는 마음에서일 뿐입니다. 이 곡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 것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다른 주문에 대한 것보다 쉽고 보다 변화에 찬 상냥한 양식으로 귀하를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라건대 비판적이기보다 인간적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즐거움은 배가 될 것입니다. 손의 위치에 관해서는 D는 오른손을, M은 왼손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시길 바라면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쳄발로를 위한 연습곡> 서문
바흐와 헨델과 같은 해에 위대한 작곡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아들로 태어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1728년 페르디난도 6세(1746년 왕이 됨)와 결혼을 한 포르투갈의 왕녀 마리아 바르바라를 따라 스페인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최후의 작품이라고 여겨지는 소프라노와 현악기를 위한 <살바 레지나> 외에는 오로지 쳄발로 곡밖에는 작곡하지 않았다.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의 주도로 더욱 호사스럽게 된 궁정음악 활동 가운데, 스카를라티의 작업은 1752년부터 1757년 사이 여왕을 위한 마지막 쳄발로 소나타를 작곡할 때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대단히 작은 규모의 음악 작품만을 작곡했지만 그 안에는 실로 엄청난 규모의 내용과 혁신적인 형식, 스페인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담겨 있다.
555곡에 이르는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단악장으로 구성된 555곡의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들은 스페인의 도시와 궁정, 농촌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다채로운 감정과 삶의 모습을 담은 곡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곡가의 자필 악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작곡가 생전에 출판된 것은 그 수가 대단히 적다. 스카를라티의 생각을 전달해줄 수 있는 자필 기록 또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1738년 런던에서 출판된 그의 최초의 쳄발로를 위한 연습곡집 판본의 서문을 통해 이들 작품이 어떠한 의도로 작곡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 독창적인 건반 소나타를 확립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30곡으로 구성된 이 연습곡집이 출판된 이후 19세기에는 클레멘티와 체르니에 의해 300곡 남짓 알려지게 되었고, 1906년이 되어서야 겨우 알레산드로 롱고에 의해 544곡을 담은 최초의 전집(L 번호)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작곡 시기를 고려하지 않은 번호인 탓에 랄프 커크패트릭(K 번호)이 1953년에 연대기 순으로 다시 정리했고, 1970년대 케네스 길버트에 의해 보강되었다.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들은 건반악기 음악 스타일의 변화 과정에 있어서 쇼팽이나 리스트의 연주회용 연습곡의 선구자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 존재하던 바로크 스타일들의 연장선상에서 이들 소나타는 화려한 효과를 위한 비르투오소적인 테크닉에서 새로운 깊이를 찾아냈다. 예를 들어 스카를라티만의 독창적인 연주 방법들로는, 빈번한 양손 교차와 빠른 3도와 6도 진행, 대범한 옥타브 도약, 손가락 번호를 바꾸어가며 동일 음표를 반복적으로 누르는 것, 반대되는 선율의 변화를 통한 불협화음, 건반 전체를 빠르게 아르페지오로 연주하는 것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와 동시대 작곡가인 바흐나 대위법 스타일을 고수했던 선배들과는 달리 스카를라티는 고도로 장식된 단선율 스타일을 일반적으로 사용했다는 것 또한 그의 음악의 특징이다. 특히 1750년대에 작곡된 많은 그의 소나타들(특히 K.387)은 위대한 비르투오소적인 효과를 위한 화려한 도약과 빈번한 양손 교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스카를라티 음악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많은 소나타들은 크게 부드러운 숨결과 무곡적인 리듬을 담은 작품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각 작품마다 리듬도 훌륭하고 멜로디도 다양하여 언제 어떤 악기(8피트 스톱을 장착한 1단 쳄발로를 위해 작곡한 만큼)로 연주하든, 아름다움과 우아함, 스페인의 정열, 더 나아가 건반악기를 위한 미래지향적 음악 어법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가 높은 작품들이다. 특히 스카를라티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플라멩코 같은 이베리아 반도의 독특한 민요에 열중했는데, 어떤 작품들은 마치 기타로 플라멩코를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 강렬하기에 단순히 쳄발로를 위한 음악이 아닌 것 같은 인상도 준다.
스카를라티 이후 이러한 스페인의 정취를 고급스러운 음악어법으로 담아낸 작곡가를 만나려면 알베니스나 그라나도스, 라벨이 나타날 때까지 실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더군다나 아치아카투라(acciaccatura, 빠른 앞꾸밈음) 사용은 빈 고전주의 시대의 피아노 명수들을 앞선 선구자적인 테크닉이었으며, 불협화음의 사용은 후일 브람스나 슈만을 예고하는 듯하다. 스카를라티는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스페인의 모든 것을 담았던, 스페인인보다 더 스페인적인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Scott Ross - Scarlatti, The Keyboard Sonatas (CD1~CD34 Complete)
VIDEO
스콧 로스의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CD1에서 CD34까지 전곡 연주입니다. 1장의 CD당 1시간이 좀 넘는 길이이니 모두 40시간에 가까운 분량입니다! 각 CD별로 선택해서 듣고자 하시면 화면 아래 ‘유투브에서 보기’ 네모상자를 눌러 유투브로 가면 오른쪽에 리스트가 뜨니 거기서 선택해서 들으시면 편리합니다. 스콧 로스(1951-1989)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으며, 심각한 척추측만증 때문에 장애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케네스 길버트에게 하프시코드를 배운 로스는 20세기 하프시코드 연주자 가운데 가장 독자적인 연주 활동을 한 천재였으며,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555곡 전곡을 녹음하여 음악사에서 유일무이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녹음은 라디오 프랑스가 스카를라티의 탄생 300주년을 맞는 1985년에 방송하기로 결정하고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스콧 로스는 1984년 6월 16일 녹음을 시작하여 1985년 9월 10일에 마지막 녹음을 마쳤습니다. 이 녹음 중에 그는 자신이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1989년 6월 13일 HIV 합병증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거장들의 스카를라티 연주
쳄발로 혹은 포르테피아노를 위해 작곡된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들은 쇼팽이나 브람스, 버르토크와 같은 작곡가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으며 대중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작품들이 오랜 동안 발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기의 한계로 인해 오랜 동안 연주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 반다 란도프스카가 현대 하프시코드(쳄발로)를 연주하며 스카를라티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지만 악기의 작은 음량과 옛 악기 그대로 복원되지 못했던 현대 하프시코드의 특성상 연주 장소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등장하면서 스카를라티 소나타들은 피아노로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하프시코드의 기법과 특성을 고스란히 피아노로 옮겨와 그 어떤 작품들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효과를 낼 수 있게 만들었다. 이후 아르투르 미켈란젤리나 에밀 길렐스를 비롯한 피아노 비르투오소들이 즐겨 연주하며 피아노로 연주하는 스카를라티 소나타가 대세를 이루었다. ▶ 피아노의 전신 악기인 쳄발로. 쳄발로(Cembalo)는 독일어이며, 프랑스어로는 클라브생(clavecin), 영어로는 하프시코드(harpsichord)라고 한다.
1980년대 이후 악기의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고 고악기의 레코딩 기술이 확립되면서 쳄발로로 연주한 스카를라티가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스코트 로스가 34장의 CD에 담아낸 555곡 전곡 리코딩은 역사적인 가치를 갖는 중요한 업적으로 남게 되었고, 랄프 커크패트릭과 트레버 피노크, 안드레아스 슈타이어, 피에르 앙타이, 콜린 틸니 등 많은 연주자들이 쳄발로로 연주한 매력적인 스카를라티를 선보였다. 많은 고악기 연주자들의 노력으로 쳄발로로 연주한 스카를라티에서는 당시의 연주 스타일을 고려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게 되었다.
K.64 D minor, Allegro
밝고 흥겨운 가보트 선율이 오른손을 통해 흘러나오며 박자감이 분명한 화성적 반주가 왼손에 의해 뒷받침된다. 부분 부분 등장하는 트릴이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K.72 C major, Allegro
조르지오 파스텔리에 의하면 K.70부터 K.72까지의 세 작품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가 베네치아에 있을 당시(1705~1709) 혹은 로마에 체류할 당시(1709~1719)에 작곡된 것이며, 특히 K.72는 스카를라티가 쳄발로를 위해 작곡한 최초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K.29 D major, Presto
커크패트릭이 정리한 K번호에서 1번부터 30번까지는 스카를라티가 ‘쳄발로를 위한 연습곡집(Essercizi per gravicembalo)’라는 타이틀로 직접 출판한 것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판본이다. 이 가운데 29번은 연주시간이 6분 이상 걸리는 대작으로, 다양한 터치와 숨 가쁜 손가락 번호를 구사해야 하는 오른손의 기나긴 아르페지오와 연습곡적인 음계가 인상적이다.
K.3 A minor, Presto
작으면서도 외형적으로 모순된 듯한 음악적 모습들이 강제적으로 병치되는 것이 아니라 일목요연한 방식으로 병렬시키고 통합하는 스카를라티의 능력이 발휘된 몇 안 되는 소나타 가운데 한 곡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상력 풍부한 동기들을 종합해내는 유사한 과정들을 반복적으로 구사한다는 점에서 베토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환상곡 Op.77’과 이 작품의 유사성을 찾기도 한다.
K.481 F minor, Andante cantabile
처음 등장하는 아름답고도 애상적인 멜로디는 쇼팽의 녹턴을 연상시킬 정도로 현대적이다. K.481부터 K.483까지의 3부작은 대부분 2성을 위해 작곡된 것이지만 K.481만큼은 몇몇 화성이 더 첨가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짧게 첫 주제가 변형되어 여러 차례 등장하는 모습은 다른 소나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
K.380 E major, Andante comodo
호로비츠의 연주를 통해 유명해진 작품으로 스카를라티 소나타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소나타이다. 감각적인 동시에 생동감 있는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다.
K.87 B minor
호모포닉적인 스카를라티 소나타들 가운데 드물게 폴리포니적인 기법이 사용된 작품으로, 하나의 선율을 중심으로 각 성부가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스카를라티의 폴리포니적 작곡 테크닉이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