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독일 작센 지방의 소도시 할레에서 태어났다. 바흐의 고향 아이제나흐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동부 독일의 시골마을이었지만, 바흐와 헨델은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바흐는 평생 독일 땅에서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며 지낸 반면, 헨델은 전 유럽을 무대로 음악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그의 독일 이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조지 프레데릭’이 되었다. 국제적인 활동을 많이 해서인지 헨델의 음악은 개방적이고 광범위하며, 감정적이고 선율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대위법적이고 드높은 이지적 고양감을 이끌어내는 바흐와는 대조적으로 헨델의 음악에는 대중적인 면이 많다.
헨델이 추구한 음악세계는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중심으로 한 성악곡과 무대음악이었다. 고향 할레를 떠나 함부르크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한 헨델은 1702년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바이올린 주자가 됐고, 북스테후데를 비롯한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연주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뒤 이탈리아에서 3년간을 지냈고,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의 궁정에 들어가 궁정악장으로 활약한다. 헨델은 종종 자리를 비우고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느라 게오르크 선제후의 눈치를 봐야 했는데, 1711년부터는 아예 영국으로 건너가 활동했다. 그러다가 영국 앤 여왕이 급히 서거하자 불편한 관계였던 게오르크 선제후가 조지 1세로 등극하는 위기가 닥친다. 그러자 헨델이 <수상음악>을 작곡해서 조지 1세를 달랬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수상음악’과 쌍벽을 이루는 헨델의 걸작 관현악
<수상음악>과 더불어 헨델의 야외 음악으로 쌍벽을 이루는 것이 바로 <왕궁의 불꽃놀이>이다. 18세기 중엽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위를 마리아 테레지아가 계승하는 것을 반대하며, 그것을 빌미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일으키고 유럽 각국이 참여한 전쟁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주요 지원 세력은 영국이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경우 영국의 식민지 상업 제국이 위협받게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은 1689~1815년 동안 지속된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 다툼의 한 국면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으며 1748년 10월 체결된 엑스 라 샤펠 조약은 이후 영국과 프랑스 간의 분쟁의 불씨를 남기기도 했지만, 오스트리아의 영토 대부분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권을 확증했다. 오스트리아를 지원한 영국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평화를 되찾은 1749년 4월 27일, 런던의 그린 파크에서는 불꽃놀이가 열렸다. 이 날을 기념해 헨델이 작곡한 곡이 <왕궁의 불꽃놀이>였고 같은 날 불꽃놀이 개최 전에 이 곡이 초연되었다.
1749년 런던의 템스 강과 화이트몰에서 열린 불꽃놀이를 묘사한 삽화.
헨델은 24대의 오보에와 12대의 바순과 콘트라바순, 9대의 트럼펫, 9대의 프렌치 호른, 3대의 케틀드럼, 숫자가 지정되지 않은 사이드 드럼(스네어 드럼, 작은북)들을 가지고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구성해 이 곡을 작곡했다. 초연 시에는 100대의 관악기가 참여해 야외용 음악을 위한 거대한 음향을 구축했다. 초연 전에는 이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대규모 리허설을 보기 위해 1만2천여 명이 넘는 구경꾼들이 런던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 날을 런던 역사상 최초의 교통체증이 일어난 날이었다고 보는 흥미로운 시각도 있다. 당시 신문에는 “런던 브리지가 어찌나 막히는지 3시간 동안 단 한대의 마차도 지나갈 수 없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축제 당일의 불꽃놀이는 뜻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곡을 연주하고 101발의 캐논포가 발사된 뒤에 불꽃놀이가 시작되었고, 로켓과 온갖 불꽃들이 공중으로 쏘아 올려지는 모습은 대단히 훌륭했지만, 불꽃놀이의 핵심이었던 회전불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나머지 불꽃탄의 색과 형태도 변하지 않는 것이 많아 축제는 애처로울 정도로 형편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화재도 일어나 화가 난 불꽃놀이 기획자가 축제 집행관에게 덤벼드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Jordi Savall conducts Handel 'Music for the Royal Fireworks'
Jordi Savall, conductor
Le Concert des Nations
Chateau de Cardona, Catalogne
1993.03
추천음반
바로크 시대의 음악, 헨델의 곡인만큼 원전 연주가 두각을 나타낸다.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고음악 아카데미(루아조뤼르/데카), 트레버 피노크/잉글리시 콘서트(아르히프/DG), 존 엘리어트 가디너/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필립스) 등이 안전한 선택이다. 이들은 모두 고악기를 사용하여 당시의 울림을 재현하려 했지만 호그우드의 경우 헨델이 남긴 자필악보에 나온 관악기의 수를 3분의 1로 줄이고 당시 일반적으로 연주되던 규모의 현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현악기 없이 연주했지만 나중에 자신이 고쳐 연주했다는 역사적인 고증을 통한 음악학자다운 연구 결과를 채택했다. 비발디나 바흐 해석과 마찬가지로 호그우드의 음반은 매우 신선한 흐름이 돋보인다. 피노크와 가디너 역시 빠른 템포에 명쾌하고 표정이 풍부하며 화려하다. 현대악기 중에서는 카를 뮌힝거(데카)가 특유의 단단한 앙상블을 보여주고 있으며, 대편성 관현악을 동원한 말콤 사전트/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EMI)의 연주는 웅장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네빌 마리너가 세인트 마틴 아카데미 합주단과 함께한 두 앨범(데카, 핸슬러)은 중용을 지키는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월간 <객석> 편집장 역임, 현재 (재)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거장들의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이 반복되는 삶이 마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