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코 추방(스페인어: Expulsión de los moriscos)은 1609년 4월 9일에 스페인 왕 펠리페 3세가 발령한 모리스코 추방 포고이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에스파냐 연합왕국이 그라나다를 점령한 1492년 이후에도 모리스코와 기독교도 사이의 시기심과 긴장감은 높았다. 일부의 모리스코들은 영향력과 힘을 들고 발렌시아 귀족이나 아라곤 귀족 같은 일부 사람들(그들은 모리스코의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었다)과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점차 스페인 전체에서의 모리스코들의 정치적·경제적 비중은 낮아졌다. 기독교도 주민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기독교 신앙이 진실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리스코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서 펠리페 2세는 1567년 모든 모리스코(스페인의 이슬람 교도)들에게 이슬람 관습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법을 시행했다. 이에 저항해 모리스코 반란이 일어났으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에게 제압되었다. 같은 시기 스페인은 개신교의 네덜란드 공화국과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1600년대 초에 경제적으로 스페인은 더욱 나빠졌다. 1604년의 불황으로 돈의 가치가 타격을 받아, 스페인 제국이 아메리카 대륙에 소유하는 보물의 몰락이 벌어진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인 스페인 내부의 생활 수준의 축소가 기독교도와 모리스코 간에 팽팽한 긴장감을 키우게 되었다. 1609년 당시, 약 850만 명의 스페인 인구 중에서 약 325,000 명의 모리스코가 있었다. 펠리페 3세는 1609년 4월 9일에 모리스코 추방의 칙령에 서명했다. 추방이 진행되면서, 발렌시아와 아라곤의 경제 뿐 아니라 귀족의 권력에게도 큰 타격이 되었다. 단호하게 가톨릭에 남아있는 것을 바랬던, 모리스코들은 대체로 새로운 거주지를 이탈리아(특히 리보르노)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추방된 사람들의 대다수는 무슬림이 장악하고 있는 북아프리카에 정착했다. 배경
지방 당 모리스코 비율
칙령과 추방
결과
1. 개요
2. 배경
하지만 이슬람 제국의 와해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타이파의 난립과 이를 파고든 서고트 왕국의 후예 국가들의 이베리아 반도 탈환기는 레콘키스타에서 알 수 있는 이야기.
당시 스페인 인구가 9백만이 안되고, 그 중 무어인은 50만에서 100만 가량 있었는데, 레콘키스타의 완료 이후 무슬림인 척 한 기독교인은 원복했고, 지배층인 무어인(무슬림)은 지브롤터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에 남았다. 처음에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가졌지만, 얼마되지 않아 스페인은 악명높은 종교재판을 수 백년 동안 계속하며 이슬람과 유대교를 금지했고 무어인과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추방되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어인들과 유대인들을 각각 모리스코, 마라노라고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모리스코들이 아랍어를 유지하고 있었고, 주류 사회에 잘 융합되지 못한 데다가 일부는 개종한 척 하면서 몰래 이슬람 신앙을 유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가톨릭 지배층은 그들의 개종을 진실되지 못하다 여겼고 종교재판으로 이들이 제대로 개종 했는지 지속적으로 확인, 간섭했다.
그러나 종교재판소도 집중적이고 폭력적인 탄압은 성립 초기 15세기 말, 16세기 중반의 스페인 내 루터교 발색 등의 시기에 집중되었고 평소에는 예산과 인력 부족, 다른 행정 기관들과 충돌, 민간 사회와 종교적으로 더 느슨한 귀족층의 반발 등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꾸준히 목적대로 개종한 유대인, 무슬림들을 감시, 관리하며 카톨릭 주류 사회에 동화할 형편이 못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코메디언 멜 브룩스의 세계의 역사 코미디 모음집 중 스페인 종교 재판 에피소드 같은 대중 문화에서는 종교재판소에서 유대인, 무슬림을 탄압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아예 개종도 안하겠다고 버틴 유대인과 무슬림 무어인은 종교재판소에 갈것도 없이 그냥 추방당했다. 종교 재판소의 역할은 거짓 개종자, 그리고 나중엔 개신교, 사상범, 성적 일탈 행위 색출과 처벌이었다. 3. 추방
추방을 실시해야 할 지방 관리도 사람인지라, 추방 명령을 따르지 않고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여러 예외사항이 있었는데, 모리스코들만 사는 곳은 면했고, 4살 이하는 해당되지 않았다가 이후 16세로 상향 조치되었다.
추방에 저항해 일어난 봉기도 있었는데, 모두 진압되었다.
추방은 북아프리카 이슬람 국가와의 협의 따윈 없었고 모리스코들은 조상이 북아프리카인들일 뿐 무슬림이 아닌 가톨릭교도였으므로 모리스코들을 실은 배는 상륙하자 마자 공격받았다. 이때 많은 이가 죽고, 정착하고, 바르바리 해적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생지옥을 뚫고 4만명에서 9만명 가량이 포르투갈, 프랑스, 북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에 돌아왔다. 이들은 충성 서약을 했으므로 다시 추방시키지 못했다.
추방의 영향은 발렌시아 지방에서 가장 컸는데, 바로 모리스코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렌시아 지방은 인구 감소로 극심한 경제 침체에 시달려야 했다.4. 의의
그러나 모리스코들은 천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 아랍인이 이동해서 거주하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므로 스페인을 더 고향으로 여기고 있었다.[1] 이들의 동화과정은 진통이 심했지만, 추방 이전에도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모리스코인 순교성인 또한 있었을 정도이다. 하지만 동화속도가 스페인 사회의 인내를 따라가지는 못했으며, 이에 따라 극단적인 추방 조치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급격한 인구축출의 부작용을 안 지역관리등의 조치, 중앙과 지방정부의 불협화음등 현실적인 이유로 모리스코 추방은 부분적인 성공일 뿐이었다. 스페인내에서 이슬람 신앙과 아랍어 등은 전멸했지만[2], 스페인어내의 지대한 아랍어 영향, 사람들의 외관, 성당의 건축양식, 공예품 양식등 스페인 문화의 많은 분야에서 무어인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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