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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프란츠 할스[Frans Hals]

Bawoo 2020. 1. 9. 21:12


Frans Hals
After Frans Hals - Portrait of Frans Hals - Indianapolis.jpg
Copy of a self-portrait by Frans Hals
Born
Frans Hals

c. 1582
Died26 August 1666(1666-08-26) (aged 83–84)
NationalityDutch
Notable work
The Gypsy Girl (1628)
Laughing Cavalier (1624)


(1582 – 26 August 1666) was a Dutch Golden Age painter, normally of portraits, who lived and worked in Haarlem.

He is known for his loose painterly brushwork, and helping introduce a lively style of painting to Dutch art. Hal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evolution of 17th-century group portraiture.

[List of paintings by Frans Hals]


네덜란드의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로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프란스 할스는 네덜란드의 초상화를 창시하고 완성한 인물로, 네덜란드의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로 꼽힌다. 그는 얼굴 표정과 감정, 분위기를 표현하고, 인물들의 동작을 즉석에서 포착해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 탁월했다. 〈흥겨운 사람들〉, 〈유쾌한 주정꾼〉 등의 작품에서는 순간적인 미소를 포착하는 그의 재능이 단연 돋보인다. 후기의 몇 작품을 제외하면 그의 작품 대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삶의 모습은 유쾌하고 자유분방하기 그지없어 관람객마저 즐겁게 만든다. 때문에 그는 ‘웃음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베를린 분리파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화가 막스 리버만은 “나는 할스의 그림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란스 할스의 생애나 작품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1581년경 플랑드르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으며, 1591년 가족과 함께 하를럼으로 이주한 후에는 평생 그곳에서 활동했다. 네덜란드의 조르조 바사리로 일컬어지는 미술사가이자 풍속화가 카렐 반 만데르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1610년 하를럼 성 루가 길드에 등록하여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활동을 시작했던 당시 네덜란드는 경제적 번영을 중심으로 각종 문화와 산업이 성장하고 있었고, 그의 활동 무대인 하를럼은 암스테르담에 뒤이어 네덜란드 금융과 경제의 중심지였다. 이런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초상화를 비롯해 장식용 정물화, 풍경화 등을 주문하면서 미술 시장도 커졌다. 할스는 네덜란드 중산층과 교류하면서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자화상〉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하는 작품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은 1611년작 〈야코부스 자피우스의 초상〉인데, 그마저도 일부가 전한다. 할스는 현대에 들어서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19세기 중반까지는 ‘유행에 뒤쳐진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많은 작품이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그림으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해골을 들고 있는 남자〉이다. 마치 스냅 사진을 찍듯 등장인물의 순간적인 포즈와 표정을 생생히 포착해 내는 그의 능력은 이 무렵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는데, 이런 표현 방식은 당대에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는 큼직한 붓놀림으로 그려 낸 인물들은 자세가 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고, 혈색 역시 생생하다.

〈해골을 들고 있는 남자〉

버밍엄 바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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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그는 등신 크기의 집단 초상화 중 첫 번째 작품인 〈성 조지 시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를 그렸다. 여기에서도 그는 각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를 개성 있게 표현하는 한편, 인물들의 성격을 드러내고 생동감을 부여했으며, 구성에서도 인물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당대의 집단 초상화에서 볼 수 없던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그는 이 초상화를 통해 큰 명성을 얻었다.

할스는 1620년대와 1630년대에 엄청난 명성을 누리며 대형 집단 초상화들을 주문받았다. 〈하를럼의 성 아드리안 시민군의 장교들〉, 〈하를럼에서 열린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를 비롯해 〈암스테르담 라이니에르 레알 대위와 C. M 블라우 중위〉 등 실물 크기로 제작된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보이며, 얼굴 주름과 손동작, 옷 주름 하나까지도 예리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귀족 후원자들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렸을 뿐 아니라 〈류트를 연주하는 어릿광대〉, 〈흥겨운 사람들〉, 〈유쾌한 주정꾼〉, 〈집시 소녀〉, 〈말라 바베〉 등 술 마시는 사람, 젊은 여인, 노래를 부르는 사람 등 평범한 인물들을 화폭에 담았다.

〈하를럼의 성 아드리안 시민군의 장교들〉

하를럼 프란스 할스 미술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암스테르담 라이니에르 레알 대위와 C. M 블라우 중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가 인물의 찰나적인 포즈와 표정을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스케치를 하지 않고 단번에 그림을 그리는 실력과 빠르고 자연스러운 붓놀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준비 단계 없이 캔버스에 바로 그림을 그렸으며,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덧칠을 해 작품을 완성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작업들은 고도의 계산 아래 이루어졌다. 그는 먼저 약간의 물감을 칠해서 질감을 부여한 다음 밝게 강조해야 할 부분,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부분은 마지막 단계에서 추가로 처리했다.

그럼으로써 즉흥성을 포착한 동시에 인물의 혈색까지 살아 숨 쉬는 듯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런 한편 세심하게 다양한 톤의 검은 색조를 사용하여 인물에 우아함과 기품을 더했다. 〈암스테르담 라이니에르 레알 대위와 C. M 블라우 중위〉를 본 반 고흐는 “여태껏 이보다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유일하다. 들라크루아 역시 열광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할스의 전성기 작품은 유쾌하고 해학적인 면모가 가득 넘쳐 나는 반면, 중년 이후 그린 작품은 이런 특질이 사라지고 어두운 분위기를 풍긴다. 〈코이만스 가족의 초상〉, 〈여인의 초상〉, 〈하를럼의 성 엘리자베트 병원 관계자들〉,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다니엘 반 아켄〉 등과 같은 작품에서는 어딘지 그늘져 보이고 세상사에 지쳐 초탈함까지 느껴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는 높은 명성을 누리며 많은 돈을 벌었으나 경제적인 부분에는 문외한이었던지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결국 파산 선고를 받을 지경에 이르러, 1662년에는 시 당국으로부터 빈민 연금을 받아 생활했으며, 말년에는 하를럼의 양로원에서 지내다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러한 불운에도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으며, 말년에 들어 인간의 고뇌와 비극에 대한 깨달음이 느껴지는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구도가 단순화되고, 색채 사용이 절제된 반면, 흑백의 색조를 더욱 폭넓고 다양하게 구사하여 장중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색채가 최소화된 것은 물감을 살 수 없을 만큼 궁핍했기 때문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두세 가지 색만으로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한 셈이었다. 말년에 그린 〈하를럼 양로원의 여성 이사들〉, 〈하를럼 양로원의 이사들〉 등은 할스의 이런 특징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심리 묘사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들을 그릴 때 그는 여든이 넘은 노인으로, 손이 떨리고 시력이 약해져 형태를 비례에 맞춰 제대로 그릴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하를럼 양로원의 여성 이사들〉

하를럼 프란스 할스 미술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할스가 죽은 후 그의 작품들은 유행에 뒤떨어진 작품으로 취급받으며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테오필 토레 등의 비평가들이 즉흥적이고 유쾌한 그의 작품을 네덜란드의 상징적인 표현 방식으로 인정하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1865년 〈웃고 있는 기사〉를 둘러싼 하트포트 후작과 로스차일드 남작의 치열한 경매 경쟁은 그가 네덜란드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조했다.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양식, 빠르고 활달한 붓 터치와 물감 덧칠 기법은 마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웃고 있는 기사〉

런던 월리스 컬렉션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글-김영은 /출처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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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네덜란드의 초상화가로 주요 작품은 <하를렘에서 열린 성 조지 시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 플랑드르 태생이나 일찍이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평생을 안트웨르펜에서 지냈고 1610년 하를렘 성루카 화가조합에 가입하면서 미술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완숙한 초상화 솜씨를 보여주었으며 네덜란드인의 특성인 쾌활한 분위기가 특징적이다. 성숙기에 접어들어 유연한 붓놀림으로 날카롭게 인물 묘사를 구사했다. 말년에는 고유의 쾌활한 분위기는 줄어들었지만 가장 많은 초상화 작품을 남겼다. 이후 할스의 자유분방한 화풍은 에두아르 마네에게, 미묘한 색채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영향을 끼쳤다.                                                             


프란스 할스(Frans Hals) Portrait of René Descartes, c. 1649                                        




개요

할스는 인상파 화법과 비슷한 유연한 붓놀림을 구사했으며 후기로 갈수록 더욱 자유분방하게 그림을 그렸다. 초기 작품의 쾌활한 성향은 〈흥겨운 사람들 The Merry Company〉(1616경~17)에 잘 나타나 있다. 중기에 그의 초상화는 점차 우울한 분위기를 띠며 때때로 불길한 느낌마저 감돌았다(〈니콜라스 하셀라르 Nicolaes Hasselaer〉1630경~33). 말기의 그림들은 인물의 성격묘사에 뛰어난 그의 재능을 가장 잘 보여준다(〈차양이 늘어진 모자를 쓴 남자 Man in a Slouch Hat〉1160~66).

니콜라스 하셀라르(Nicolaes Hassela

1630-1633년 프란스 할스의 작품

ⓒ Frans Hals/wikipedia | Public Domain



초기생애

프란스 할스의 생애나 작품에 대해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자료가 전혀 없어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윤곽만이 알려져 있다.

그는 플랑드르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1591년경 가족은 안트웨르펜에 정착했으며 할스는 이후 평생을 이곳에서 지냈다. 25세 또는 30세(출생연대가 불분명하므로)가 될 때까지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미술가로서의 최초의 활동을 알려주는 증거는 1610년경 그가 독립 미술가로 등록되는 단체인 하를렘 성루카 화가조합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뒤이어 그는 안네트예 하르멘스도흐테르 아벨과 결혼했으며, 아벨은 두 아이를 낳고 1615년에 죽었다.

2년 뒤 할스는 레이스베트 레이니에르스와 결혼했다. 현존하는 작품들로 보아 할스는 초기에 차분한 초상화 및 하를렘에 있던 여러 조합들의 회원들과 군인들을 모델로 한 집단 초상화들을 그렸던 것 같다. 이 초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이미 완숙한 경지의 초상화 솜씨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당대의 네덜란드 미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분방한 붓놀림으로 그린 대작 〈하를렘에서 열린 성 조지 시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 Banquet of Officers of the Civic Guard of St. George at Haarlem〉이다.

하를렘에서 열린 성 조지 시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Banquet of Officers of the Civic Guard of St. George at Haarlem)

1627년 프란스 할스 작품

ⓒ Frans Hals/wikipedia | Public Domain

이 그림에는 그때까지의 집단 초상화에서는 무시되었던 생동감과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이미 나타나 있다. 그러나 1620년경 할스는 옛부터 네덜란드인의 특성으로 여겨진 쾌활한 분위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그의 초기 작품의 특징으로 굳어졌다. 그가 그린 초상화의 상당수는 마냥 떠들며 노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흥겨운 사람들〉의 모델인 한스 위르스트는 돼지의 발과 청어, 달걀로 만든 목걸이를 걸치고 높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할스의 집단 초상화에서도 이같이 자연스런 삶의 기쁨이 뚜렷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딱딱한 형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2번째로 그린 〈하를렘에서 열린 성조지 시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인데, 여기에서는 인물들이 그들의 경제적 여유를 나타내기 위해 보통 신비스러운 종교적 황홀경을 나타낼 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그림은 또한 신비스럽고 영적인 느낌을 넌지시 전달하고 있는데, 자신의 모델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 이러한 느낌은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점점 사라지고 절대 사실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

1620년대경 할스는 인상파 화법과 비슷한 유연한 붓놀림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동시대의 스페인 화가인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붓 터치로 형태들을 구성했는데, 이러한 화법으로 인해 이 두 화가는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러나 할스는 밝은 색채의 빠르고 자유분방한 붓놀림을 이용해서 형태를 넌지시 나타냄으로써 인물과 동작과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벨라스케스와 구별된다. 17세기의 화가들은 대부분 여러 점의 예비 데생과 어느 정도의 밑그림, 그리고 정교한 끝손질을 거쳐 서서히 그림을 완성시켰다.

할스가 사용한 방법을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는 캔버스에 바로 그리기 시작하여 거의 유화 스케치에 가까운 처음의 자연스러운 표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재빠르게 그림을 완성한 것 같다. 할스는 전생애에 걸쳐 계속해서 이와 같은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그의 날카로운 인물 묘사는 더욱 두드러지게 직접성을 띠게 되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의 그림은 점점 더 자유분방해졌다.



후기생애

할스의 중년 이후의 그림에서는 쾌활함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40세 이후에 그린 초상화들에서는 주제의 인물들이 얼굴에 슬픈 그늘을 드리운 채 세상을 다 알고 있는 듯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특징을 강하게 보여주는 최초의 초상화는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 Man with Arms Crossed〉이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또다른 그림으로는 〈웃고 있는 기사 The Laughing Cavalier〉·〈이사크 아브라함스존 마사의 초상 Portrait of Isaac Abrahamszoon Massa〉·〈피테르 반 덴 브루케 Pieter van den Broecke〉·〈니콜라스 하셀라르〉·〈빌렘 반 헤이토이젠 Willem van Heythuyzen〉·〈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다니엘 반 아켄 Daniel van Aken Playing the Violin〉 등이 있다.

피테르 반 덴 브루케(Pieter van den Broecke)

ⓒ Frans Hals/wikipedia | Public Domain

이 초상화들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을 나타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아주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1630~50년에 할스는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하를렘에 거주하는 중산층의 성실한 시민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100점이 넘는 개인 초상화와 6점의 집단 초상화와 가족 초상화를 그렸다.

그의 말년은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그는 괴로운 가족문제에 시달렸다.

그는 계속 꾸준히 그림을 그렸지만 1650년 이후로는 거의 일거리를 주문받지 못했다. 166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인정되어 당국으로부터 연금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불운에도 불구하고 할스가 마지막 16년 동안 그린 초상화들은 뛰어난 걸작들이다. 이무렵 그의 그림에는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인간의 희극이 비극으로 바뀌고 이성적인 인간과 미치광이를 가르는 질서가 붕괴된다. 이제 더이상 웃음을 띠지 않게 된 그의 초상화들은 일정한 나이가 든 후에는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생이 비극적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그뒤 할스는 점점 더 전통적인 주제들에 가까워졌으며 술잔과 식탁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주제의 강렬함과 생생함을 줄이고 구도를 더욱 단순화시켰으며, 더욱 자유분방하게 그렸다. 색채는 상당히 줄어들었으나 수십 년 간의 작품에서 매우 폭넓고 다양한 흑백의 색조를 구사했는데, 이 색채들만으로도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처럼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 볼 수 있었던 화려한 색채의 조화는 표현하기 어려운 신경 경련과 갑작스러운 움직임 및 움찔하고는 다시 빨라지는 심장박동들을 형상화한 듯한 미술로 이어졌다.

할스는 일생 동안 하를렘을 명쾌하게 관찰했다. 그는 하를렘을 젊음의 환희가 가득 찬 도시로 묘사했으며, 자신의 삶과 쇠약해져가는 건강을 이 도시의 이미지에 반영함으로써 죽을 때까지 이 도시의 충실한 동반자로 남았다.

당대로서는 화풍이 매우 독특했던 미술가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는 거의 직계 제자들을 두지 않았는데, 그와 가장 비슷한 화풍을 보인 화가는 아드리안 브라우어로서 그는 할스의 기법을 사용해서 여관의 일상적 장면이나 그와 비슷한 주제들을 뛰어나게 묘사했다.

할스는 초상화 이외의 다른 주제들은 소홀히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재능은 있지만 편협한 화가로서 평가되어왔으며, 미술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19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그의 자유분방한 화풍은 에두아르 마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미묘한 색채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 들어와 그는 중요하고 뛰어난 사실주의 화가로서 재평가되고 있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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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e of Frans Hals in Florapark, Haarlem


Wedding portraits[edit]

Frans Hals. Gypsy Girl. 1628–30. Oil on wood, 58 x 52 cm. Musée du Louvre, Paris.
Willem Heythuijsen by Frans Hals 1634
Laughing Cavalier, 1624, canvas, relined, (H) 83cm x (W) 67cm, Wallace Collection, Lond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