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ine Wattea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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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teau in the last year of his life, by Rosalba Carriera, 1721. | |
Born | Jean-Antoine Watteau baptised October 10, 1684 |
Died | July 18, 1721 Nogent-sur-Marne,[1] France | (aged 36)
Nationality | French |
Known for | Painting and architecture |
Notable work | Embarkation for Cythera, 1717–1718 L'Enseigne de Gersaint, 1720–1721 |
Movement | Rococo |
Jean-Antoine Watteau (UK: /ˈwɒtoʊ/, US: /wɒˈtoʊ/,[2][3] French: [ʒɑ̃ ɑ̃twan vato]; baptised October 10, 1684 – died July 18, 1721),[4] commonly referred to as Antoine Watteau, was a French painter whose brief career spurred the revival of interest in colour and movement, as seen in the tradition of Correggio and Rubens. He revitalized the waning Baroque style, shifting it to the less severe, more naturalistic, less formally classical, Rococo. Watteau is credited with inventing the genre of fête galantes, scenes of bucolic and idyllic charm, suffused with a theatrical air. Some of his best known subjects were drawn from the world of Italian comedy and ballet.
장 앙투안 와토는 18세기 초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로코코 양식이란 루이 15세 시절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화려하고 장식적인 미술 양식을 일컫는다. 그는 우아하고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남녀의 연애나 축제 같은 여흥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데 특출났다. 그가 창출한 ‘페트 갈랑트(la fête galante, 달콤한 연회 혹은 사랑의 연회)’라는 회화 양식은 야외에서 우아하게 차려입은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는 낭만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과 달리 그는 우울증을 앓을 만큼 불행하고 고생스럽게 살았으며, 결핵에 걸려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꿈결같이 아름답고 지나치리만큼 명랑하고 화려한 그의 작품 기저에는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깔려 있는데, 즐거운 시간은 언젠가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지나친 화려함으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와토는 1684년 발랑시엔의 변두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붕 기와공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병약하게 태어난 그는 자못 우울한 성장기를 보냈으며, 그는 일생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앓았다. 13세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게랭의 화실에서 도제 생활을 했으며, 18세 때 파리로 올라왔다. 처음 2년간 그는 도우의 화실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복제화를 그리는 모사화가로 일했다. 이때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그림들을 모사하며 실력을 쌓았다. 스무 살부터는 무대 미술가였던 클로드 질로의 공방에서 일하며 실내 장식 소품이나 무대 소품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친구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지만, 죽기 전 엄청난 명성과 부를 거머쥐었음에도 일정한 거처를 얻지 않고 친구나 후원자의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는 그림 외에는 달리 취미도 없었고, 자신의 내면세계에만 몰입한 괴짜로 알려져 있다. 사교 생활도 거의 하지 않았고, 친구도 고향에서 올라온 몇 사람 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연극, 특히 희극을 관람하고 그리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틈날 때마다 약장수의 모습을 그리면서 놀았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당대의 유행과 풍속을 유머러스하게 그리는 데 특출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 무렵 이탈리아 극장각주1) 을 주제로 한 그림들에 몰두해 〈달빛 속의 황제 아를르캥〉, 〈발루아 박사〉, 〈어린 배우들〉 등을 그렸다.
그는 연극 장면을 묘사할 때 보통의 화가들이 연극의 한 장면이나 무대 뒷모습이라는 ‘장면’을 그리는 것과 달리 ‘연극적’인 모습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연기하는 배우인지 분장을 하고 축제나 일상을 즐기는 인물인지 모호하게 보일 때가 많다. 이런 성향은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작품에서도 나타나는데, 그의 작품 속 일상은 사실적이기보다 즐거움을 주기 위해 연출된 ‘상상 속 일상’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게 느껴진다.
클로드 질로는 와토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뤽상부르 궁전 장식을 담당하고 있는 클로드 오드랑 3세에게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아라베스크적인 장식 미술을 담당하는 한편, 왕궁에 소장된 루벤스의 그림에 경도되어 모사하며 독학한다.
그리고 1709년 왕립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며 이탈리아 유학의 기회를 주는 로마대상에 응모했으나 2등에 그쳐 유학을 가지는 못했다. 그는 평생 아카데미가 우대하는 역사화, 종교화, 초상화 등의 장르를 거의 다루지 않았는데, 그가 2등에 그친 것은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 그의 작품에 감명받은 심사위원들은 그를 아카데미 회원으로 받아들이고자 어떤 주제든 좋으니 그림을 한 점 더 제출하라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다. 그러나 와토는 1717년까지 아카데미에 작품을 제출하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메즈탱의 옷을 입고〉, 〈질투하는 사람들〉, 〈쌍쌍파티〉 등 희극을 소재로 삼은 작품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때 그는 코메디아 델라르테각주2) 에 푹 빠져 있었다. 바로크 시대의 웅장함과 허식에 반발해 탄생한 일견 경박하기까지 한 로코코 양식은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가벼움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와토는 이 시기에 재상 피에르 크로자의 후원을 받았다. 크로자의 집에서 잠시 기거하며 그가 수집한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미술품들을 보고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플랑드르와 베네치아 화풍을 융합한 양식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사교 생활이 잘 맞지 않았던 듯 얼마 지나지 않아 크로자의 집에서 나와 세상과 동떨어져 살았다. 이 시기에 그는 공원이나 정원을 배경으로 남녀의 애정 행각, 연회 등을 흥겹게 그리는 페트 갈랑트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대화〉, 〈페트 갈랑트〉, 〈전원오락〉 등이 탄생했다.
와토는 1717년 〈쌍쌍파티〉로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우아한 연회 장면을 그린 그의 작품은 아카데미가 인정하는 양식(초상화, 역사화, 신화 소재 등)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이에 아카데미는 그를 위해 ‘페트 갈랑트’라는 특별한 범주를 만들어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그해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를 공식적인 입회 작품으로 제출하면서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키테라 섬은 고대 비너스 신전이 모셔진 곳으로, 비너스가 바다의 물거품에서 탄생한 후 파도 위를 떠돌 때 바닷속에서 홀연히 솟구쳐 그녀를 받아 주었다는 섬이다. 비너스를 묘사할 때 그녀의 탄생이나 일화를 묘사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와토는 사랑의 성지로 알려진 섬으로 떠나는 젊은 남녀들을 주제로 삼았다. 이 작품으로 그는 전례 없는 주목을 받으며, 페트 갈랑트의 대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세레나데 연주자〉, 〈사랑의 축제〉, 〈무도회의 즐거움〉, 〈공원에서의 모임〉, 〈전원오락〉, 〈생의 기쁨〉 등으로 대중적으로 엄청난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 한편 〈이탈리아극의 사랑〉, 〈프랑스극의 사랑〉, 〈깜찍한 아가씨〉 등 연극을 다룬 주제들에도 여전히 열정을 발휘했다. 1718년에 완성한 〈질〉은 우둔하지만 천진난만한 피에로 역할을 주로 맡았던 희극배우 질 르니에를 그린 작품이다. 눈부신 빛과 호화로운 색채로 표현되어 있지만, 질의 표정에는 애수가 깃들어 있으며 자세는 어색하기 그지없다. 이 작품과 질의 인기로 당시 ‘질’은 광대 혹은 희극배우를 일컫는 말로 통용되곤 했다.
1719년, 와토는 폐결핵에 걸려 진찰을 위해 런던으로 떠났으나 차가운 런던의 공기 탓에 병은 더욱 깊어졌다. 이듬해 파리로 돌아온 그는 미술상이자 친구였던 제르맹의 집에 머물면서 최후의 걸작 〈제르생의 간판〉, 〈프랑스 배우들〉을 완성했다. 얼마 후 병세가 악화일로를 걷자 그는 후원자였던 크로자의 집에서 보살핌을 받았으나, 결국 1721년 7월 18일에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작품들은 생전에도, 사후에도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이후 프랑스에서 로코코 양식이 화려하게 개화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혁명기에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다는 평과 함께 경박하고 퇴폐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19세기 후반 들어서 18세기의 사회상과 다양한 정서를 담고 있다고 재평가받았으며, 여전히 우아하고 세련되며 재치 넘치는 그의 작품들은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글-김영은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17~18세기 프랑스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프랑스 희극>과 <키테라 섬으로의 항해>와 <이탈리아의 희극배우들>. 지붕기와공의 아들로 태어나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18세에 파리에서 메타예라는 화가의 도제가 되었다가 1703년에 오페라 장면과 무대배경을 그리는 장식가 클로드 질로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질로 밑에서 와토는 무대미술을 통해 다양한 인공조명을 연구했고 빛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얻었다. 와토 사후 이성의 시대가 도래한 18세기말까지 그의 명성은 기울었으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예술가들 사이에서 재평가받아 대중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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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생애와 교육
그의 아버지는 지붕기와공이었으며 전기작가들에 따르면 그의 어린시절은 불행했다.
소년시절 그는 분위기의 변화에 매우 민감했으며 소설을 탐독하고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광장에서 엉터리 약을 파는 약장수들을 모델로 스케치를 하는 데 남다른 취미를 보여서 그의 부모는 그를 근처 화가의 작업실에 보냈다. 18세쯤 되어 파리에 갈 결심을 하고 무일푼으로 그곳에 가서 메타예라는 나이많은 화가의 도제가 되었다.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봉헌 그림들을 전문으로 그리는 작업실로 자리를 옮겼다. 한편 실물을 모델로 무수한 스케치를 했는데, 이것들은 그뒤 그에게 주제를 제공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미술상인 장 마리에트와 피에르 장 마리에트를 알게 된 것은 바로 이무렵이다. 그는 이들의 가게에서 판화가인 자크 칼로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귀중한 소묘와 인그레이빙들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또한 1703년경 그곳에서 새로운 선생인 클로드 질로를 만났다.
질로는 그로테스크한 장면과 목신이나 사티로스의 그림 및 오페라 장면 등 무대배경을 그리는 뛰어난 장식가였다.
그는 당대의 웅장한 공식 미술을 몹시 싫어했으며 유려하고 여성적인 우아함을 갖춘 16세기 퐁텐블로파의 양식을 선호했다. 그는 또한 불과 몇 년 전 그곳에 소속된 배우들이 프랑스에서 쫓겨났던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질로의 소묘 방식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기호는 와토의 작품에 나타나 있다. 와토는 극장의 2층 발코니에 앉아 무대를 관찰하면서 실재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모든 분장과 도구 및 무대장치를 연구했다.
그는 분장한 얼굴, 화려한 의상, 그려진 배경막과 짙은 그림자에 비치는 다양한 인공 조명의 반사광을 통해 빛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무대미술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합쳐져 전체적인 평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했고 또한 그것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젊은 와토는 거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1708년 와토는 당시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에 있는 메디치 미술관의 관장인 클로드 오드랑 3세의 작업실에 들어갔다.
그는 연극계와 뤽상부르 대정원, 미술품 연구 등 파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 와토에게 파리는 정원에 둘러싸인 분수들이 경이롭게 물을 뿜어내는 문명의 기적으로 보였다. 뤽상부르에서 그는 루벤스가 30여 년 전 마리 드 메디시스에게 바친 일련의 승리를 축하하는 그림들을 연구했다. 생기와 기쁨이 넘치는 이 대작들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와토는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장식가인 오드랑을 도우면서도 여러 가지 다른 세계에도 관심을 쏟았다. 1709년 그는 왕립 아카데미의 회화 전공생이 되어 열심히 배웠지만 로마에 갈 수 있는 장학금을 받지 못하자 발랑시엔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한 친구가 와토의 그림 1점을 팔아 귀향길에 쓸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발랑시엔에서 그를 숭배하는, 부상을 입고 요양중인 한 장교를 위하여 〈전쟁의 피로 Les Fatigues de la guerre〉·〈전쟁의 낙오자들 Les Délassements de la guerre〉 등과 같이 새로운 주제로 그림을 그렸고 이것으로 인기를 얻었다.
1710년 미술상인 피에르 시루아의 초청으로 다시 파리에 간 와토는 시루아와 그의 사위인 제르생과 평생 가까이 지냈다. 그는 시루아의 가족을 그리기도 했지만 초상화가는 아니었다. 그가 그린 사람들은 저명인사들이 아니며, 때때로 이탈리아 배우들로 분장하여 그럴 듯한 자세를 꾸미곤 하던 친구들이었다.
와토의 키테라
1712년 와토는 이탈리아에 가려고 다시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그가 정원의 배우들을 묘사한 장면을 제출하자 조신(朝臣)들이 때때로 촌스러운 옷을 입고 나오는 야유회인 '페트 갈랑트' 화가로서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3점의 〈키테라 섬으로의 항해 L'Embarquement pour l'île de Cythère〉 중 첫번째 작품을 1710~12년에 그렸다. 일반적으로 키테라 섬의 신화, 혹은 사랑에 관한 신화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문화에서 오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이 섬으로 가는 여정은 매우 힘든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와 비교해서 와토가 그리고 있는 키테라는 덧없는 것들과 계략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낙원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순례자들은 그 섬을 향하여 떠나지만 결코 거기에 도착하지는 못하며 수평선 멀리 그 섬의 빛을 어렴풋이 볼 수 있을 뿐이다.
키테라 섬을 주제로 한 와토의 첫 작품은 일화적인 것으로, 어렴풋한 베네치아풍의 분위기로 희극적인 모티프를 다루고 있다.
같은 주제의 2번째 작품은 비현실적이고 광활하며 놀랄 만큼 황량한 풍경에 세속적인 의식의 일면이 엿보인다. 천사가 황금 곤돌라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3번째 작품에서는 이 주제가 통속화되었다. 세 작품 모두에 공통적인 것은 연극 무대 같은 구성과 연극에 나오는 모든 것이 색채로 치환된 점이다. 그가 그린 키테라는 모두 오페라와 연애 서사시로 가득 찬 이상한 나라로 나타나며, 실현불가능한 꿈과 이성에 대한 미친 듯한 복수, 규범과 도덕으로부터의 자유가 실현되는 나라를 나타내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와토는 플로랑 당쿠르의 산문 희곡 〈3명의 사촌 Les Trois Cousines〉(1700)에서 이 주제를 따왔다고 한다. 그 희곡의 대단원에서는 사랑의 순례자로 분장한 한무리의 시골 청년들이 키테라 섬으로 가는 항해를 준비한다. 시골의 제분업자들에 관한 이 이야기는 의도가 희화적이고 와토가 가상의 베네치아에서 설정한 세련된 장면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에 그가 우다르 드 라 모트의 오페라 발레 〈베네치아 여인 La Vénitienne〉(1705)에서 작품의 주제를 끌어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키테라 섬의 순례자들만이 아니라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등장인물들도 사랑의 섬으로 초대받아 떠나는데, 이 2가지가 바로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한 중요한 주제이다.
주요작품의 제작시기
와토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지만 그는 여전히 수줍어하고 사람을 싫어하고 자기자신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며, '정신은 자유분방했지만 행실은 신중했다'. 1712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부유한 재상인 피에르 크로자와 만난 1715년까지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이탈리아에서 크로자는 섭정을 대신하여 크리스티나 여왕의 미술수집품을 구입하기 위하여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와토의 열렬한 지지자인 크로자는 부유한 미술애호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 화가에게 자신의 거처에서 묵을 것을 간청했다. 그는 코레조와 베네치아의 대가들, 반 데이크 등이 그린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그림과 소묘들을 많이 수집하고 있었으므로 와토는 크로자의 손님으로 지내면서 접한 이탈리아의 대가들이 남긴 작품들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또한 몽모랑시 저택 주변의 정원과 시골 풍경들을 그렸다. 와토는 계속 크로자와 친구로 지냈지만 후원자의 곁을 떠났다. 그때부터 세상과 떨어져 혼자서 살았다. 이 시기에 〈대화 Conversations〉·〈전원오락 Divertissements champêtres〉·〈페트 갈랑트 Fêtes galantes〉 등 걸작들을 제작했다. 1717년 그는 이미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아카데미에 〈키테라 섬으로의 항해〉의 2번째 작품을 제출했다. 2년 뒤에는 런던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의 작품들은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빠지고 있던 자신의 건강에 대하여 유명한 의사의 진찰을 받고 싶어했다.
런던에서는 몇 작품만을 그렸는데 그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희극배우들 Italian Comedians〉은 그가 매우 애착을 가지고 있는 주제로 자신의 의사를 위해 그린 것이다.
다음해인 1720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의 친구이자 미술상인인 제르생의 가게를 위하여 8일 만에 지금의 유명한 간판을 그렸다. 그의 말기 작품으로는 푸아르 극장의 간판으로 그린 흰 옷을 입고 있는 어릿광대의 초상화 〈지유 Gilles〉가 있다.
흰 피부에 홍조를 띠고 서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막간 배우인데, 여기에서는 렘브란트의 〈에케 호모 Ecce Homo〉를 연상시킬 정도로 웅장하게 묘사되어 있다. 와토가 제르생을 위해 그린 간판은 이와는 전혀 달라서 마치 루이 14세의 통치가 끝났음을 알리려는 듯이 시무룩한 표정의 그림을 상징적으로 내걸고 있는 한 미술상 가게를 그리고 있다. 이 그림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마치 와토가 삶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미술을 신성화하려는 듯이 그림의 주인공은 그림 자체였다. 이무렵 와토는 결핵에 걸려 몸이 쇠약해졌고 결국 37세의 나이로 죽었다.
와토에 대한 평가
와토의 미술은 연극이 18세기 회화의 착상에 제공한 모티프로서 미친 깊은 영향을 실증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강한 영향을 미친 것은 엄숙한 비극이 아니라 가장 생명이 짧은 연극 형식들이었다. 그중 하나는 말보다 제스처를 중요하게 여기고 배우가 판에 박힌 행동을 하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였다. 또다른 하나는 주로 춤·노래·의상·장식물로 구현된 순간적인 상들을 보여주는 오페라 발레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여러 예술 장르와 양식적 조류들이 각각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전시대의 고전주의에 반발을 일으킨 시기였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열등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장르들을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며, 시·음악·회화·무용이 융합되어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진 것처럼 여러 예술 분야 사이의 벽이 허물어졌다. 대체로 와토의 그림은 오페라를 색채로 치환한 것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와토는 매우 미묘하고 일시적인 형식들을 통해 그의 시대를 해석함으로써 그 형식들이 마치 문명의 병폐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문명과 현대문명 사이의 싸움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현대문명의 편에 섰던 것 같다. 그에게 고대의 위대한 영웅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세련된 현대성 및 유행에 대한 그의 숭배는 경박해보일 정도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모든 형태의 회화적 사실주의를 거부했다. 고대 그리스 신들의 고향인 파르나소스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가 때때로 무대 크기로 축소한 당대의 파리와 비슷하다.
와토는 덧없는 것들에 파묻혔고 그림에서 여인들에게 중요한 보다 많은 비중을 두었다. 호위기사나 어릿광대 같은 남자들은 화려한 비단옷을 두르고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여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공원에 있는 조각상도 대부분이 여인상이며 또 자연조차도 여성적인데, 나무들은 줄기가 가늘며 윤곽이 부드럽고 흐릿한 잎으로 무성하다.
와토를 숭배하던 사람들은 그가 죽은 뒤 곧 흩어졌으며, 그의 명성은 기울기 시작했다. 당대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표현했던 그는 18세기말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에게 거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그무렵 회화는 사실의 관찰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결국은 사회적 저항을 중시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환상의 세계를 강조한 와토와 같은 미술가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뒤 프랑스 혁명기의 비평가들은 와토가 "당대의 주택들을 좋지 못한 취향으로 오염시켰다"고 비난했다.
19세기에는 특히 영국과 빅토르 위고, 제라르 드 네르발, 테오필 고티에 등 프랑스의 시인들 사이에서 와토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되살아났다. 그의 명성은 점차 회복되었으며, 보들레르는 그를 철저하고 세밀하게 해석하여 자신의 유명한 시인 〈등대들 Les Phares〉(1855)에서 와토를 인류의 '등대'라고 표현했다. 보들레르는 또한 와토의 미술이 샹들리에의 인공 조명 아래 평범한 서민들이나 귀족들이 빙빙 돌며 가볍게 추는 춤인 '코메디 발레'의 배경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다.
1856년 공쿠르 형제가 〈와토의 철학 Philosophie de Watteau〉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와토를 루벤스에 비유했다. 19세기말 마르셀 프루스트는 와토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그의 명성은 점차 예술애호가·시인·소설가 들 사이에서 높아지다가 결국 대중에게까지 폭넓게 확산되었다.[다음백과]
Gallery[edit]
Polish Woman Standing (National Museum, Warsaw)
A Pierrot
Watteau's commedia dell'arte player of Pierrot, ca 1718–19, traditionally identified as "Gilles" (Louvre)
La Boudeuse (Hermitage Museum): "Flirting coquettishly yet innocently, the artist's imaginary heroes – the deliberately indifferent lady and her insistently attentive cavalier – are shown with gentle irony. Their fragile, elegant world is dominated by a lyrical mood with just a touch of elegiac melancholy."[20]
Pilgrimage to Cythera is an embellished repetition of his painting of 1717, and exemplifies the frivolity and sensuousness of Rococo painting. (1721, Berlin)
L'Enseigne de Gersaint (1720): In one of Watteau's last paintings, the portrait of Louis XIV and his own artworks are being packed away. The painter had no reason to expect that his name would be remembered long.
Ceres (Summer), c. 1717-1718, National Gallery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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