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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관련 - 강화부 방어 전투 책임 관련 처벌받은 인물]김경징/장신/강진흔

Bawoo 2020. 3. 12. 20:10

 

 

이름
김경징(金慶徵)
출생
사망
출생지
조선 평안도 강계
(현 자강도 강계시)
국적
선응(善應)
본관
순천(順天)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인조 반정의 주요 인물인 김류의 아들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선응(善應)이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의 방비를 맡았으나 방어를 허술히하다가 함락되었다. 그는 반정 공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졌지만 결국 거듭된 탄핵으로 사사되었다.

1589년 후일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승평부원군이 된 김류와 진주 류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승주의 후손으로, 김승주의 아들 김유온의 7대손이 된다. 할아버지 김여물은 그가 3살 때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의 부원수로 출정했지만 패전하여 탄금대에서 순절했다. 광해군음서로 관직에 올라 찰방을 역임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공신이 되었다. 1623년 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형조좌랑이 되었지만 그해 말 사간원정언을 거쳐 반정의 공로로 고속 승진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승정원도승지를 지내고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그는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의 집을 수색하여 탈출하려던 광해군의 세자 질을 적발하였다.

1624년 비변사당상이 되었지만 비변사 당상의 수가 많다는 이유로 정원축소되어 그는 해임되었다. 그해 공조참판이 되었지만 군관에게 곤장을 때리던 중 군관이 사망하여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26년 예장도감제조, 예조참판, 1630년 승정원승지경연참찬관 등을 거쳐 1632년 국장도감의 총호사(揔護使)를 맡아보았다. 이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632년 사간원대사간, 1635년 승정원도승지 등을 역임했다. 1636년 한성부판윤으로 발탁되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그는 강화도를 수비하는 총대장인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가 되어 강화도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김경징은 물이 얼어 있기에 청군이 강화도로 들어오지 못할 것으로 확신하였으나, 청군은 1만6천명의 병력으로 강화도를 공격했다. 당시 그는 강화도는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 믿어, 청나라 군사는 건너올수 없다 믿고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시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김경징은 놀라 도주하였고, 강진흔, 황선신 등이 분전하였으나 패하고 황선신은 전사하였다. 결국 강화산성이 함락되고 왕자왕족들이 청의 인질이 되면서, 인조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전란 후, 조정에서는 강화도를 제대로 지키지 않아 왕자들과 왕족들을 붙잡히게 한 죄를 물어 군율에 따라 김경징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인조는 그가 반정공신의 한 사람이고 반정공신 김류의 아들인 점을 감안하여 김경징을 강계로 귀양보냈다.

김경징이 처형되지 않고 귀양을 가게 되자 신하들은 완강히 김경징과 당시 강화부유수 장신[1]을 책임을 물어 죽여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였고, 결국 1637년 2월 22일 인조는 김경징과 장신에게 사약을 내렸다. 사사당하기 직전 그는 아버지 김류에게 살려달라 하여,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익겸, 선원 김상용과 비교, 대조되며 오래도록 조롱당하기도 했다.

사후

부인 박씨와 어머니 류씨는 정절을 위해 자결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의 아들 김진표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가족 관계

각주

  1. 효종의 장인 장유의 동생이다.

[참고]

1. 상세 자료 있는 곳 - 김경징 - 나무위키

 

2. 

2015.12.21

잘못되면 당신 책임 아니요”라고 하자 언젠가부터 슬며시 화친으로 돌아섰다. 김경징(1589∼1637)은 김류의 외아들이다. 그는 인조반정 때 아버지 와 함께 참가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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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
張紳
출생 미상
사망 1637년
사인 자살
성별 남성
국적 조선
직업 황해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조선후기 강화유수, 황해도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생애

병자호란 전

우의정을 지낸 장유의 아우이다. 1617년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을 때 자신의 집터를 궁궐터로 내놓아 1619년 관직을 얻었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훈련대장 이흥립을 설득 시켜 반정에 가담시킨 공로로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양주목사 등을 역임한 후에 1627년 황해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황주성을 수축하였다. 후에 명의 장수 모문룡과의 관계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병자호란과 자살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강화유수로 부임하여 강화도를 수비하였다. 1637년 1월 청군이 인근 선박들을 징발하고 수군을 조직하여 강화도를 공격해오자 충청수사 강진흔과 함께 출전하였으나, 싸우는 척하다가 그대로 도주하여 강진흔의 분노를 샀다. 전후 조정에서 강화성 수비 실패의 책임을 물어 검찰사 김경징은 귀양보낸뒤 사사시키고 충청수사 강진흔은 참수했다. 이때 장신도 조정으로부터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자살했다.

가족 관계

  • 고조부 : 장옥(張玉)
    • 증조부 : 장자중(張自重)
      • 할아버지 : 장일(張逸)
        • 아버지 : 장운익(張雲翼)
        • 어머니 : 밀양 박씨
          • 형 : 장유

각주

  1. 장신의 형인 장유1587년 태어났으므로 장신의 생년은 1587년 이후라고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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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흔
姜晉昕
출생 미상
사망 1637년
사인 참형
성별 남성
직업 충청 수사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강화부 전투 당시, 필사적으로 바다를 방어했으나 전후 책임을 뒤집어 쓰고 참형되었다.

 

생애

병자호란

병자호란 때 충청수사를 지냈고, 강화도의 수군을 지휘하였다. 강화검찰사 김경징은 물이 얼어 청군이 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청군과의 전투를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르곤 휘하의 청군은 선박을 징발하여 강화도를 공격해왔다. 이에 강진흔은 주사대장 장신과 함께 200명의 수군과 7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갑곶 근처로 오는 청군의 전선을 침몰시켰다. 강진흔은 그 뒤에도 분전하여 청군의 전선 3척을 침몰시켰으나, 점점 청군의 수가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장신은 싸우는 척 하다가 도주했다. 이에 격분한 강진흔은 장신을 질타했으나 장신은 그대로 도주했다. 결국 장신의 도주로 갑곶 방어선은 붕괴되었고, 청군들이 강화도에 상륙했다.

초관 황선신이 100명의 군사로 농성했으나 전사하고 강화도에 남은 김경징이민구는 겁에 질려 도주했다. 이에 청군은 손쉽게 강화성을 함락시켰고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포함한 다수의 왕족과 사대부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는 인조의 항전의지를 크게 꺽어 항복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다. 이때 성에 남아있던 김상용은 자결하였다.

처형

그 해 9월, 조정에서는 강화도 방어에 임한 장수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이때 강진흔도 체포되어 국문을 받은 뒤 참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했다.

이 때, 강진흔 휘하의 장수들과 수군들이 강진흔의 억울함을 눈물겹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수된 뒤 효수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반면 패배의 원흉이였던 김경징은 유배되는 것에 그쳤고 후에 사약을 받았으나 이는 참수된 강진흔에 비하면 특혜를 받은 셈이였다.

사후

강화도 함락 당시에 대군으로서 강화도에 있었던 효종으로부터는 ‘싸우지도 못하였거니와 달아나지도 못하였다.’는 억울한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