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슈만이 1829년부터 1831년 사이에 걸쳐서 작곡하여 1832년에 키스트너 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피아노곡 <나비> Op.2는 20세 전후의 젊은 슈만을 대표하는 초기 작품으로 작곡가의 천재성과 독창성이 강하게 드러난 야심작이다. 이 작품은 모든 슈만 피아노 음악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짧은 서곡과 1분 남짓한 12곡이 쉼 없이 13분 정도 연주되는 이 연작 피아노 작품은 독일의 소설가로 독일 문학사에서 G.E. 레싱에 비견되기도 하는 독일 낭만주의 시대 소설가 장 폴 프리드리히 리히터(J.P.F. Richter, 1763-1825)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구스타프 말러가 교향곡 1번의 제목을 ‘거인’으로 지은 것도 리히터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낭만주의 문학 경향의 선두주자였던 리히터의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소재들, 즉 가면무도회나 달빛, 나비 무곡, 광대, 어린이 등등은 슈만에게 가장 중요한 음악적 주제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낭만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상상력 풍부한 세계와 돌연 분위기가 변화하거나 흐름이 끊기는 자유분방한 리히터의 전개 방식은 슈만의 피아노 음악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래서 소나타를 제외한 슈만의 솔로 피아노를 위한 많은 작품들은 인상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짧은 단편들이 불연속적으로 진행되며 전체의 흐름을 이어나간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나는 음악에 글을 붙인 것입니다”
슈만은 리히터의 미완성 장편소설인 <개구쟁이 시절>(Flegeljahre)의 마지막 장인 63장 ‘애벌레의 춤’에서 영감을 받아 <나비>를 작곡했다. ‘애벌레의 춤’은 가면무도회를 배경으로 발트와 볼트라는 두 형제가 가면무도회장에서 아름다운 소녀인 비나에게 구혼을 하는 내용으로, 여기서 등장하는 몽상주의자 발트의 감성과 현실주의자 볼트의 정력, 이들 쌍둥이 형제가 비나에 품은 사랑의 감정은 이후 슈만의 <카니발> Op.9에 등장하는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 클라라의 구도에서 완성을 이룬다. 아마도 그 대비적인 효과와 불연속성 때문인지 슈만은 이 <나비>를 자신의 세 명의 형수인 테레제, 로잘리에, 에밀리에게 헌정했다. 아마도 자신을 아끼고 잘 챙겨준 세 명의 형수는 슈만에게 최초의 외부인이자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서 소설 속의 캐릭터들에 대한 느낌을 대입시키기에 가장 수월했을 듯하다. ▶이 곡은 ‘나비’ 또는 ‘날아오르는 종이’로 불렸다.
이 <나비>는 슈만의 초기작이라 원숙함이 빛을 발하는 <카니발>만큼 캐릭터들의 성격을 강렬하게 대비시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전 선배 작곡가들과 전혀 다른 방식을 통해 낭만주의자로서의 자신의 개성을 표현함에 있어서 형식적ㆍ내용적ㆍ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음악이 그저 문학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 영감을 받은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표출해내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의 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나는 음악에 글을 붙인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글에 음악을 붙이는 것은 저로서는 멍청한 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우연히 장난스럽게 첫 곡에 대한 응답을 하게 되는 마지막 곡만은 장 폴의 작품을 고스란히 따랐습니다.”
이렇듯 자신의 분열된 자아가 사랑을 찾고 좌절하는 낭만적인 상상의 세계를 무대로 하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젊은 슈만은 “인간의 감정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와 헤어질 때 가장 순수하게 빛난다”는 리히터의 격언에 충실하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나비>를 작곡할 당시 슈만은 바로 음악이라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 헤어짐을 강요받다가 기어코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나비>는 음악가로서 첫 출발을 하게 된 가장 순수한 시기의 가면이고, <카니발>은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피아노와 헤어지고 작곡가로서 첫 발을 내딛은 빛나는 시기의 가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Mieczyslaw Horszowski plays Schumann 'Papillons' 1989
음악으로 구성한 공상적이며 환상적인 세계
이 <나비>는 슈만이 일필휘지로 작곡한 것이 아니다. 1번, 3번, 4번, 6번, 8번의 5곡은 1829년부터 1830년 사이 하이델베르크에서, 나머지 7곡은 1831년 라이프치히에서 작곡한 것이다. 이 사이에 슈만에게는 개인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83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니콜로 파가니니의 연주회에 참석한 슈만은 그 정신적ㆍ문화적 충격으로 인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바꾸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앞선 5곡은 음악에 열정적인 아마추어 시기의 작품이라면,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은 뒤 1831년에 작곡한 나머지 7곡은 프리드리히 비크(이후 부인이 된 클라라 비크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어머니를 설득하여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한 시기의 작품이라는 차이점을 갖고 있다. 자신을 바꾸어 놓은 두 가지 요소에 대해 슈만은 겸허한 마음으로 각각 경의를 표했다. 문학에 대한 순수한 경의는 <나비>를 통해, 파가니니에 대한 비르투오소적인 경의는 그 다음에 작곡한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에 의한 연습곡> Op.3을 통해 화려하게 표현한 것이다. ▲<나비>는 장 폴의 소설에 등장하는 가면무도회의 정경을 표현한 곡이다.
<카니발>과는 달리 이 연작곡에 슈만은 각각의 부제를 붙이지 않았고 몇 곡 외에는 빠르기 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슈만이 생존하던 당시 볼롬 필드-자이슬러라는 피아니스트가 이 작품을 연주하며 연주회 프로그램에 다음과 같은 제목을 적은 것이 전해진다. 문학에 음악을 붙인 것을 혐오했던 슈만 자신은 결코 원치 않았겠지만 필드-자이슬러의 부제는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어 후대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 데 유용한 역할을 한다.
필드-자이슬러가 붙인 제목
서주 - 왼손과 오른손은 유니슨이다. 간단한 6마디가 독특한 느낌을 준다.
1곡 가면무도회 - 가면무도회의 화려한 분위기를 그린 듯하고 당김음이 재미있다.
2곡 발트 - Prestissimo로 ff와 pp가 대비된다.
3곡 불트 - 왼손의 주제가 오른손에 옮겨지고 다시 왼손이 뒤쫓는 행동적인 곡이다.
4곡 가면 - 마치 슈베르트를 연상시키는 듯한 피아노의 아름다운 울림이다.
5곡 비나 - ‘베이스가 노래하듯이’라고 되어 있으나, 오히려 오른손의 선율이 차분하고 깊이 생각하는 기분을 낸다. <나비>의 전곡은 모두 왈츠로 써져 있으면서도, 2박자적인 기분을 내는 곳이 많다. 또한 쇼팽의 곡처럼 템포루바토로 기분을 살려서 연주하여야 하는 대목도 많다.
6곡 불트의 춤 - 당김음의 효과를 내야하는 첫 부분이 되풀이되고서 pp의 고운 주제가 나온다. 이 주제도 되폴이되고 다시 처음 부분으로 되돌아가 그 주제가 변형되어 나오며 되풀이된다. 가면무도회에 나오는 두 아들 중에서 행동가인 아들의 춤인 것이다.
7곡 가면을 교환하다 - 온화하고 고요한 멜로디가 조용하게 펼쳐진다.
8곡 고백 - 슈만이 티보 교수에게 이끌려서 전학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다닐 적에 쓴 곡인데, 당시 친구들에게 슈베르트의 곡이라고 속여서 연주한 적이 있는 것을 개작한 곡이라고 한다. f의 코드로 시작되는데 앞의 곡에 비하여 박력 있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9곡 분노 - 매우 빠르게 회전하며 움직이는 듯한 곡으로 다음의 10번의 처음과 대조된다.
10곡 가면을 벗기다 - 9째 마디에서 9번의 중간 부분과 거의 비슷한 순차 진행의 스타카토가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이어지는 piu Lento의 선율은 알토와 테너가 움직이는 베이스 위에서 흐른다.
11곡 헤어짐 - 폴로네즈이다. 3마디의 도입 부분이 있은 후 작게 주제가 나오는데, 급하게 발전되어 나가다가 piu Lento로 엇박자의 선율이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든다.
12곡 사라진 형제들 - 피날레인 이 곡은 힘찬 코드로 마지막 곡답게 시작하지만 곧 여린 선율이 4마디 나와서 슈만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나타낸다. 맨 처음에 나왔던 1곡이 다시 모습을 나타내며 발전되어 가다가 드디어 ‘사육제의 밤의 소란은 그친다. 사계가 여섯시를 친다’라는 표제가 나오며 점점 느려지고 작아지며 pp로 사라지듯이 끝난다.
이 가운데 1곡의 왈츠 주제는 <카니발>의 ‘플로레스탄’(<나비>의 마지막 ‘피날레’에도 다시 등장한다)에 인용되고 12곡 피날레의 행진곡 리듬은 <카니발>의 마지막 곡인 ‘다비드 동맹의 행진’에 등장한다. 그런데 슈만은 왈츠 주제는 인용했다고 악보에 적어놓았지만 마지막 피날레의 행진곡 리듬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마지막 행진곡 주제는 독일의 민요인 ‘할아버지의 춤’(Grossvatertanz)을 공통적으로 인용한 것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인용이 아니라 악보에 밝힐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 공상적이며 환상적인 세계를 구성한 슈만의 작곡 기법은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이미 슈만의 독창적인 음악으로서의 모든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남성적인 격렬한 주제가 등장하는 화려한 2곡과 역동적인 3곡은 여성적인 5곡과 훌륭한 삼각형적인 균형을 이루고, 여기에 화려한 1곡과 사랑스러운 7곡은 가면무도회장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연상케 한다. <카니발>처럼 주인공들의 소개가 끝나면 본격적인 스토리가 진행되어 등장인물들 사이의 에피소드들이 발생한다. 종곡인 12곡에서는 무도회장의 왈츠와 행진곡이 울려 퍼지며 하루가 끝남을 알리고, 마지막에는 독일의 한 도시의 종루에서 새벽을 알리는 듯한 종소리가 울린 뒤 은은한 새벽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짧은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추천음반
슈만의 <나비>는 그의 다른 인기곡들만큼 다양한 종류의 음반이 있지는 않지만 슈만의 성격을 다채롭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연주들이 존재한다. 서정성과 드라마를 가장 잘 보여준 빌헬름 켐프는 연주 모노럴과 스테레오 두 종이 있는데 그 가운데 스테레오 DG 버전이 보다 낫다. 남성다운 터치와 슈만 특유의 열정이 돋보이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의 연주(EM)도 빼놓을 수 없는 고전적 명연이고, 99세의 미에치슬라프 호르초프스키가 1991년에 녹음한 레코딩(Nonesuch)은 초월적인 아름다움과 신선과도 같은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최근 녹음으로는 넬손 프레이레의 연주(DECCA)가 훌륭한 연주를 담고 있다.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 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