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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 주인의 원수를 살해한 충비]갑이(甲伊)

Bawoo 2020. 7. 5. 22:20

[야사] 충비 갑이는 조선 중기 문신 류관의 노비이다. 류관이 을사사화 때 처형 당하고 본인은 병조판서 정순붕의 노비로 들어가게 되자 기회를 잡아 정순붕이 역질에 걸려 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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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관(柳灌, 1484년 ~ 1545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문화. 자는 관지(灌之), 호는 송암(松庵). 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성품이 곧고 강직하여, 이조판서로 있을 때 병조판서 이기의 전횡을 탄핵했는데, 이기와 대립을 했고 결국 을사사화 때 사사되었다. 윤임, 유인숙과 대윤의 중심 축을 이루었다. 당파는 훈구파에 속했지만, 사림 세력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본관은 문화. 자는 관지, 호는 송암(松庵). 아버지는 사헌부장령 정수이다.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지평·경기도도사·장령 등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자신이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을 때 강한 반발을 보였던 사림파를 비난하고 현량과의 혁파 등을 주장했다. 그뒤 강원도관찰사·대사간·이조참의·전라도관찰사·병조참판·우참찬·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1539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이기(李芑)가 병조판서에 임명되는 것을 반대한 일로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 이어 우찬성·좌찬성·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인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1545년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어린 명종이 즉위한 뒤 소윤인 윤원형(尹元衡)·이기, 정순붕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윤임(尹任)·유인숙 등과 함께 삼흉으로 몰려 서천으로 귀양가던 도중 온양에서 대역죄로 처형당했다.

선조 때 이준경(李浚慶) 등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숙이다.[다음백과]

 

류관(柳灌)송암공 -충경공파

李芑등이 숙감(宿憾)을 품고 있던차 8월 21일에 충순당(忠順堂)에 입대(入對)하여 윤임(尹任)의 파직과 류관(柳灌)의 체임을 청하였다. 그리고 대궐 뜰에 투서(投書)하여 양전(兩殿)을 현혹케 하고, 또 요첩(妖妾...

mhryucforum.net/bbs/view.php?id=sub3&page=8&sn1=&divpage=1&sn=o.. 문화류씨포럼

여종 갑이의 복수이야기 -정북창 부친 정순붕의 염병과 을사사화

2018.05.28

다운처: https://band.us/band/61758246

정순붕(鄭順朋)

개설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이령(耳齡), 호는 성재(省齋). 정포(鄭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평 정충기(鄭忠基)이고, 아버지는 헌납 정탁(鄭鐸)이며, 어머니는 도진손(都震孫)의 딸이다. 형조판서 정백붕(鄭百朋)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04년(연산군 1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림과 교유하였다. 1516년(중종 11) 조광조(趙光祖)·박상(朴祥)·김정(金淨) 등과 더불어 사유(師儒)로 선발되고, 이어 이조판서 송천희(宋千喜)의 천거로 장령에 임명되었다. 1518년에는 김정국(金正國)·신광한(申光漢) 등과 함께 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으로 선발되었다.

이듬해 좌부승지·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형조참의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이 일망타진되면서 이에 연루, 전주부윤으로 좌천되었다가 1520년 파면되고, 이듬해 관직이 삭탈되었다.

1531년 이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등용이 논의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김안로(金安老) 일당이 제거되어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이 모두 풀려나면서 등용되었다.

1539년 공조참판에 제수되어 곧 명나라에 다녀와 명나라에서 구한 『황명정요(皇明政要)』·『요동지(遼東志)』 6권을 나라에 바쳤다. 이어서 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다시 공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한성부우윤으로 옮겼다가 1542년 형조판서로 승진하고, 곧 호조판서로서 오랫동안 국가 재정을 주관하였다.

1544년 의정부우참찬으로서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겸임하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이 득세하면서 의정부우참찬에서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켰는데, 그는 이기 등과 어울려 음모를 꾸며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귀양보내니 사람들은 그를 이기 등과 더불어 간흉이라 하였다.

대개 사람이 악을 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시기하고 음험하여 남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는 악에 강한 자로서 이기와 같은 예이며, 그것이 악인 줄 알면서도 위력에 겁을 내어 악을 행하는 자는 악에 유(柔)한 자이니, 곧 정순붕의 경우이다. 이로 인하여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관직은 의정부우찬성에 오르고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다. 을사사화의 공로로 유관(柳灌)의 가족들을 적몰하여 자기의 노비로 삼았는데, 그 중 갑이(甲伊)라는 여종이 주인 유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염병을 전염시켜 죽게 했다 한다.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나, 1578년(선조 11) 관직과 훈작이 모두 삭탈되었다.

각주

 

 

참고문헌

  • ・ 『중종실록(中宗實錄)』
  • ・ 『인종실록(仁宗實錄)』
  • ・ 『명종실록(明宗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대동야승(大東野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