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인물, 단체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계 항일 여성 독립 운동가]이효정 (李孝貞)

Bawoo 2020. 6. 25. 21:31

이효정 (李孝貞) (1913~ 2010)

사회주의계 여성 노동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학창시절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종로경찰서에 붙잡혔고, 졸업 후에는 이재유 등이 지도하는 경성트로이카에 가담해 1933년 9월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여직공을 선동하여 총파업을 지도했다. 1935년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회에 가담해 항일 운동을 벌이다 다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박두복과 결혼해 시댁으로 내려가서 살다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남편이 6·25전쟁 때 월북하고 이후 남파간첩으로 활동한 일 때문에 수시로 고문과 취조를 당하면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참여정부 시절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되면서 2006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포장을 받았다.

 

봉화군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성으로 올라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재학 시절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친구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가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

3학년 때는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무기정학을 당했다. 1930년대초 경성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졸업 후 그녀는 이재유 등이 지도하는 경성트로이카에 가담해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1933년 9월 21일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이재유(李載裕)의 지도를 받고 노동쟁의를 확대해 공장 내 조직을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별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계획 아래 여직공을 선동하여 총파업을 지도했다. 종연방직 파업이 끝난 후인 1933년 10월 17일 청량리에서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5년 11월 경성에서 이재유·권우성(權又成) 등이 주도적으로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회'에 가담해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 다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후 그녀는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를 받다가 '교원노조사건'으로 2년간 투옥된 경력이 있는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박두복과 결혼해 울산의 벽촌에 있는 시댁으로 내려가서 살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그녀는 남편을 따라 울산시내로 나왔으나 집이 없어 부녀동맹회관에서 살면서 남편이 간부로 활동하는 건국준비위원회 울산지부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기도 했던 남편이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댁 친척들이 울산보도연맹 학살사건 때 많이 죽었고, 시동생은 간첩으로 몰려 자살했다.

2남 1녀의 아이들과 함께 남한에 남겨진 그녀는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찍혀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다.

수시로 찾아오는 형사들 때문에 학교 교사였던 그녀는 교단에서 쫓겨나 과일행상 등을 하며 세 아이를 키워야 했다. 취직하는 곳마다 형사가 따라붙어 쫓겨나기 일쑤였고, 이사 가는 곳마다 감시가 붙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 남편이 남파간첩으로 활동하다 또다시 월북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시 요시찰인물이 된 그녀는 영장 없이 수시로 사찰기관에 연행돼 고문과 취조를 당하면서 고문으로 팔목이 부러지는 장애를 입고 억울한 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6·10 민주항쟁'으로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뤄지자 그녀에 대한 사찰도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명필이 되는 게 꿈이었던 그녀는 시집으로 1989년 〈회상〉, 1995년 〈여든을 넘기며〉를 발간했다. 참여정부 시절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되면서 93세 때인 2006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포장을 받았다. 2010년 8월 14일 9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다음 백과]

 

개설

본관은 진성(眞城). 이효정(李孝貞)은 동덕여고보 재학 중 학생운동을 하였고, 졸업 후 종연방적 파업 지원 활동 등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하였다.

생애

1913년 7월 28일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생하였다. 1세에 부친의 별세로 서울에서 잠시 있다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였다. 3년 뒤 귀국하여 서울에서 할아버지의 교육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로 민족의식이 높았고, 자부심도 강하였다. 동덕여고보를 나와 교원, 간호부 생활도 잠깐 하였지만 공장에 취업, 노동운동을 하였다. 박두복과 결혼하여 울산서 생활하다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남편이 월북하고는 좌익으로 몰려 오랫동안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2010년 8월 14일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동덕여고보에 입학 후 한글학자 이윤재(李允宰)의 민족주의에 공감하였으며, 5촌 아저씨 이병기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에 입문하였다. 3학년 때 이평산의 경성RS협의회의 독서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박진홍(朴鎭洪), 이순금(李順今) 등과 ‘백지동맹’을 주동, 시험을 거부하여 무기정학을 받았다. 광주학생운동에 동조, 시위에 참가하여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하였다.

1933년 이재유(李載裕) 그룹과 연결되어 노동자 의식화운동을 하였다. 같은 해 9월 21일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 파업 때 지원활동을 하다 10월 17일 동대문경찰서에 보름간 구금되었다. 또한 1934년 권영태 그룹의 ‘적색노조사건’에 연루,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으나 면소 처분을 받았다. 1935년 동덕여고보에 숨어들어가 항일격문 등으로 학생들을 독려하는 활동을 하다 여러 번 체포, 고문을 당하였다. 울산적색노동조합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으며, 1935년 11월 서울에서 이재유·권우성(權又成) 등이 주도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하여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재차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70세에 『회상』(경남, 1989), 80세에 『여든을 살면서』(경남, 1995) 등의 시집을 발간, 자신의 문학적 재능도 한껏 발휘하였다.

상훈과 추모

93세인 200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참고문헌

  •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7권(국사편찬위원회, 1981)
  • ・ 「피의자 폭행조서」(被疑者 素行調書)(동대문경찰서, 1935.12.25)
  • ・ 「결정서(決定書)」(경성지방법원, 1936.5.13; 7.14; 11.11)
  • ・ 「노동쟁의배후선동 기타에 관한 건」[경동경고비(京東警高秘) 第3248號, 1933.10.26]
  • ・ 『독립운동가의 삶과 회상』(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2012)
  • ・ 『동아일보』(1933.10.19; 10.21; 1935.12.28)
  • ・ 『조선중앙일보』(1935.11.8)
  • ・ 『조선일보』(1936.12.29)
  • ・ 국가보훈처 나라사랑광장(www.mpva.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보] 책 -경성 트로이카: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8.10.

 

기억하라, 우리를 위해 싸웠던 이들을! 며칠 후면 광복절이다. 거리마다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던 광경이 불과 50년 전이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언제부터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