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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20.1.20.
[소감]
책소개- 인터넷 교보문고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중국의 동북 3성(옛 만주)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체포돼 시베리아의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1950년 7월 중국에 인도돼 푸순전범관리소에 수감된 이들이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 침략전쟁의 선봉에 섰던 군인들, 괴뢰 만주국에서 수탈정책 입안과 항일세력 탄압 등 치안 헌병 정보 분야에서 종사하던 일본인 전범이다. 1000명에 가까운 이들 외에도 패전 후 일본제국 부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다며 중국 산시성에 남아 국공내전에서 팔로군에 저항하다가 체포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타이위안전범관리소에 수감됐다.
뼛속까지 황국신민 정신과 군국주의 교육에 물들었던 이들은 신중국의 전범 개조정책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침략 정책의 충실한 입안자와 집행자였던 이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중국의 일관된 정책과 처우에 감복해 엄청난 고뇌를 거쳐 서서히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다. 일본으로 귀환해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행을 반성하고 침략전쟁의 진실을 증언하며 반전평화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푸순전범관리소에 있지 않았다면 전장에서 저질렀던 행위를 기억에서 지운 채 입을 닫고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60여 년 전 푸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푸순의 기적’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유례없는 중국의 전범 처리 방식이 어떻게 일본인 전범들을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바꾸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전범들의 구체적인 증언과 기록을 통해 침략전쟁의 참혹한 실상- 민간인 학살, 약탈과 방화, 생체해부, 전시 성폭행, 세균전 실험 등등-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귀국 후 ‘중국귀환자연락회’(약칭 중귀련) 단체를 결성해 어떻게 반전평화를 위한 외길을 걸었는지, 생의 마지막까지 일본의 수구 우익진영과 어떻게 정면으로 맞서 싸워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제까지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의 행적과 증언을 담은 최초의 책이다.
저자 : 김효순
1974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동양통신〉 〈경향신문〉을 거쳐 〈한겨레〉 창간에 간여해 도쿄 특파원, 편집국장, 편집인을 지냈다. 2007년부터 취재 현장에서 대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직했고, ‘포럼 진실과 정의’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한일 관계, 동아시아의 평화, 화해, 시민운동 등을 테마로 글을 쓰고 있으며, 역사에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 저서에 《조국이 버린 사람들》(2015), 《간도 특설대》(2014), 《역사가에게 묻다》(20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2009), 《가까운 나라 모르는 나라》(1996) 가 있다.
목차
들어가는 글
1 전범 개조
“살인귀”에서 “선한 사람”으로
‘마지막 전범’의 귀환
‘전범 포로’를 넘겨받다, 푸순전범관리소 출범
‘화물’에서 사람으로, 놀라운 처우에 맞닥뜨린 수감 생활
학습운동의 파장, 감방 안의 울음소리
산시성에 남은 일본 패잔군의 운명
전범 개조의 주역, 조선족 3인과 만주국 총리 아들
2 재판 그리고 관대함
“한 사람도 처형하지 않는다”
동북공작단 출범과 충격적인 전범의 고백
교류의 물꼬를 튼 중국홍십자회와 전범 명부
양형을 둘러싼 논란과 단호한 저우언라이 총리
특별군사법정 재판 열리다, 관대한 처리
3 푸순의 기적
“두 번 다시 침략전쟁에 총을 들지 않겠다”
중국귀환자연락회 결성과 수기집 발간
귀환자와 중귀련의 시련
마지막까지 인죄의 길을 간 사람들
나가는 글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서평
중국은 전범들의 마음의 빗장을 어떻게 열었을까
1 전범 개조 : “살인귀”에서 “선한 사람”으로
1964년 4월 귀국한 마지막 전범 3인 중의 하나인 사이토 요시오 전 만주국 헌병훈련처 처장은 훗날 수기에서 “중국대륙에서 전쟁범죄를 거듭한 12년 4개월 동안 ‘귀신’이었다면, 패전 후 복역 기간을 거쳐 마침내 ‘선한 사람(善人)’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밝혔다. 중국은 어떻게 일본인 전범의 마음을 열 수 있었을까?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일본인 전범을 넘겨받은 중국은 일본이 만주국 시절 주로 항일운동가들을 투옥하려고 세운 푸순감옥을 푸순전범관리소로 바꿔 이들을 수감했다. 사단장인 육군 중장 다섯 명을 포함한 일본 전범들은 첫날부터 시베리아 억류 시절과는 전혀 딴판의 처우에 놀랐다. 이들은 세 끼 밥을 꼬박꼬박 먹으며 수감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정작 전범관리소 직원들이 수수밥을, 그것도 하루 두 끼만 먹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마음의 동요를 겪은 것은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직원의 상당수는 일가친척이나 이웃이 일본군의 잔혹한 군사작전으로 학살되고 온 마을이 불타버리는 것을 체험한 침략전쟁의 피해 당사자였다. 일본 전범 개조정책을 지휘한 저우언라이 총리는 ‘전범의 인격을 존중하라’ ‘절대로 구타하거나 욕하지 마라’ ‘일본인의 습관을 존중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무기를 놓고 항복한 적의 절대 다수는 개조할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사상이 중국이 인수한 일본인 전범에게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이들을 개조시키기 위한 학습운동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전혀 미지의 세계였던 신중국의 정책에 호기심이 발동한 전범들은 토론을 통해 점진적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깨닫게 된 계기를 맞은 것이다. 스스로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감방 안에서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진심으로 반성하고 죄를 인정하는 ‘인죄’의 길을 가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됐다.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전범 개조의 실무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는 조선족 3인(김원, 오호연, 최인걸)과 만주국 총리 장징후이의 아들(장멍스)이었다.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이들은 전범들과 솔직한 대화를 끈질기게 나누면서 신뢰를 얻었다. 김원, 오호연 등은 일본 패전 후 재개된 국공내전에서 동북민주연군(인민해방군 전신)에 가담한 공안군 장교였고, 장멍스는 1940년대 일본 유학 시절 항일유학생비밀 조직에게 참여했다. 전범들이 귀국 후 낸 수기에는 이들에게 진심 어린 감화를 받았다는 회고담이 자주 눈에 띈다. “중국의 인도주의 대우에 일본인 전범이 시대에 뒤떨어진 파시즘의 외투를 벗어던진 것”이라고 한 사병은 비유하기도 했다. 푸순전범관리소 소장을 맡았던 김원 역시 ‘전범 개조가 나 스스로를 개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훗날 밝혔다.
2 재판 그리고 관대함 : “한 사람도 처형하지 않는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인민은 ‘죄는 미워하더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인도주의에 따라 나를 처리했다. 죄를 심리하는 데 아주 신중했고, 줄곧 진리 추구로 일관하면서 관대한 정책 처리로 임해 나는 중국 인민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다.”
1954년 일본인 전범 처리를 위한 ‘동북공작단’이 만들어졌다. 전범에 대한 인죄탄백운동이 폭풍처럼 진행됐다. 탄백(坦白)이란 자신의 잘못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으로, 전범 개조 과정에서 일상적 구호처럼 사용됐다.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엄하게 다스리고 죄를 인정하는 자는 관대히 처분한다”는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몇몇 전범이 공개된 집회에서 자신이 저지른 잔혹한 전쟁범죄 행위를 생생하게 고백하기 시작하자 그저 모든 것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다른 전범들은 충격에 빠졌다. 일부는 정신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부끄러운 과거와 대면해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됐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무엇인지 성찰의 계기로 삼았다. 전범들은 “처음으로 내 과거와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됐다” “황군의 정체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고 고백했다.
신중국이 전범재판을 시작한 것은 1956년 6월이다. 특별군사법정에서 대부분의 전범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났고, 45명만이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신중국이 벌인 전범재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형수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기형도 없었다. 유죄가 선고된 사람은 금고 8년에서 20년의 형을 받았다. 극형을 받아 처형된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점은 다른 전승국의 일본인 전범재판과 크게 다른 점이다.
일본인 전범을 관대하게 처리한다는 기본 방침을 정할 때 내부의 진통은 심각했다. 사형이나 무기형은 선고하지 않는다는 중앙의 방침이 전해지자 전범들을 직접 조사했던 검찰단이나 전범관리소의 지휘부는 동요했다. 이들은 그런 조치로는 중국 인민의 분노를 도저히 가라앉힐 수 없다며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대표단을 보내 재고를 요청했다. 하지만 저우 총리는 이들의 항변을 듣고 나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20년 뒤에는 당중앙의 결정이 현명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전범 처리를 중일 관계의 미래와 연계해 대국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3 푸순의 기적 : “두 번 다시 침략전쟁에 총을 들지 않겠다”
“우리의 후회는 결코 단순한 참회가 아니다. 중국인에 대한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느꼈을 뿐만 아니고, 이 같은 전쟁을 일으킨 자에 대한 증오이고 전쟁 책임자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한다는 바람으로도 연결된다.”
일본인 전범의 귀환은 1956년 7월을 시작으로 1964년 4월 특별군사법정에서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마지막 전범 3명이 돌아오면서 마무리됐다. 첫 귀환 당시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행을 저질렀습니다. (....) 속아서 청춘의 정열을 잘못된 목적에 쏟은 우리는 이 쓰라린 체험 속에서 침략전쟁이야말로 일부 지배자의 야망에 의한 것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침략전쟁은 이제 절대 반대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침략 행위를 바라보고 반성한다는 발상은 당시 일본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다. 고도 경제성장의 부푼 꿈속에 과거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잘못을 까맣게 잊고 있던 일본 사회에 이들의 등장은 불편하고 성가신 존재였다. 수구 보수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주요 언론들은 이들에게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세뇌된 ‘빨갱이’라는 딱지를 서슴없이 붙였다.
이들에게 공안기관의 철저한 감시가 시작됐고 일본 사회의 멸시와 냉소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들은 기본적인 생계조차 꾸려가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침략전쟁에 가담한 것을 철저히 반성하고 남은 인생을 전쟁 반대와 평화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며 중국귀환자연락회를 결성했다. 아울러 1957년 ‘중국에서의 일본인 전쟁범죄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은 수기집 《삼광》을 출판해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이례적인 선풍을 불러왔다.
이후 중귀련 회원은 책자 발간이나 공개 강연을 통해 중국인 포로와 민간인 학살, 약탈과 방화, 생체해부, 전시 성폭행, 세균전 실험, 노무자 강제연행 등의 전쟁범죄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활동을 벌였다. 2000년 12월 도쿄에서 성노예로 동원된 군‘위안부’ 문제를 심판하기 위해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 나와 위안소 운영을 폭로한 두 명의 증인도 중귀련 회원이었다. 중귀련의 최대 무기는 회원들이 전장에서 직접 저지르거나 목격한 각종 전쟁범죄의 생생한 체험이었던 것이다.
중귀련 회원들은 일본 곳곳에서 증언 활동을 끈질기게 계속했지만, 고령으로 직접 활동할 수 없게 되자 2002년 4월 공식 해체됐다. 이와 동시에 ‘푸순의 기적을 이어가는 모임’이 구성됐다. 시민단체 활동가, 학자, 언론인, 대학생, 일반 시민 등이 참여한 이 모임은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옛 전범이 인간의 양심을 되찾고 갱생한 것을 ‘기적’으로 평가하고, 인류문화유산으로 삼아야 한다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생의 마지막까지 인죄의 길을 간 사람들을 기억하며
“침략전쟁에 가담해서 많은 가해 행위를 해버린 것, 그것에 대한 죄의식, 철저한 인죄 의식을 바탕으로 피해자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중귀련 정신의 핵심이라는 것 등이 적혀 있었다. 문서는 쓰다 만 상태였다.”
1956년에 이들이 귀국하고 다음해 2월 A급 전범 혐의자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가 됐다. 작년에 한일 역사 갈등을 다시 최악의 상태로 돌려버린 아베 신조 총리는 기시의 외손자가 된다. 아베는 일본의 메이지헌법에서 의회내각제가 도입된 이래 헌정사상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중귀련 사람들은 기시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정권을 잡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극우 반동 세력의 역사 왜곡에 맞서 생의 마지막까지 투쟁하고 증언했다. 침략전쟁이란 용어조차 기피어가 되고 있는 우경화 분위기 속에서, 그리고 전쟁범죄를 증언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도미나가 쇼조, 자신이 체포해 죽인 항일열사의 딸을 찾아가 사죄한 쓰치야 요시오, ‘우익에 대한 투쟁 무기는 우리의 죄행을 들이대는 것’이라는 미오 유타카, 731부대 만행을 증언하러 미국에 입국하려다 거부된 시노즈카 요시오 등 생의 마지막까지 인죄의 길을 간 사람들. 이들의 행적과 증언은 이제까지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많이 늦었지만, 이들의 삶과 고뇌를 기억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저자는 묻는다.
“중귀련 회원들의 피맺힌 증언은 일본 사회에서 점점 묻혀가고 있다. 우리마저 기억을 이어가는 작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완전히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들의 고백과 삶의 여정, 일본 사회의 반응을 분석해보는 것은 일본이 왜 갈수록 보수, 우경화되고 한일 역사 갈등이 이렇게까지 증폭됐는지 이해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_들어가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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