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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우리나라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문순득[文順得]

Bawoo 2020. 8. 19. 20:46

文順得(1777년 ~ 1847년). 조선 후기 신안군 우이도(牛耳島)에 살면서 일대에서 홍어를 거래했던 어물 장수. 평범한 일개 백성이던 문순득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 석 자를 남긴 이유는 파란만장한 삶 때문이었다.

2. 생애

2.1. 1차 표류

1801년 12월, 24살의 청년 문순득은 작은 아버지와 마을 주민 6명을 따라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기 위해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난다. 바다에서 표류하던 이들은 기적처럼 살아 1802년 1월 유구국(琉球國)에 표착한다. 다행히 현지인들은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주었고, 문순득 일행은 그곳에서 매일 쌀과 채소를 받고 하루 넘어 돼지고기를 제공받았으며, 병이 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해주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8개월 동안 유구국에서 생활한 문순득 일행은 유구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낸다. 그것은 바로 중국으로 가는 유구국의 조공선에 탑승해서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02년 10월, 그들은 유구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에 몸을 싣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들의 계획은 완벽했고, 다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으나…

2.2. 2차 표류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난다. 덕분에 이번에는 유구국보다 더 남쪽으로 떠내려가 스페인 식민제국여송(呂宋, Luzon : 루손 섬)[1]이라는 곳에 표착. 이 과정에서 조선인 일행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문순득은 여송에서 9개월을 지내면서 여송어를 익힌다.[2] 유구국에서는 식량과 의료를 지원받으면서 나름대로 편하게 지냈던 반면 여송에서는 약간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온전히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했는데, 문순득은 끈을 꼬아 파는 것으로 생계와 용돈(술과 담배)을 해결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냥 일만 한 것은 아니고 그곳을 돌아다니며 풍속을 보고 나름대로 관광도 하고 살았다. 당시 인기있던 투계를 구경하거나 현지 성당을 방문하는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 후 1803년 8월 여송에서 마카오 상선을 얻어타고 중국 마카오로 이동한 문순득은 육로를 통해 난징베이징을 거쳐 1804년 12월 조선 한양에 도착하고, 마침내 집을 떠난 지 3년 2개월 만인 1805년 1월에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온다.

2.3. 그 후

고향에 돌아온 문순득은 어느 날 다시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렀는데, 이때 흑산도에 유배 온 정약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풍랑을 만나 표류하며 보고 들은 바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문순득의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쓴다.[3] 문순득의 표류기는 정약전을 통해 정약용에게도 전해졌으며, 여송국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용함을 전해들은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 개혁안을 제안하게 된다. 또한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제자인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하였고,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집필하게 한다.

'표해시말' 집필을 계기로 문순득은 정약전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을 가족처럼 모셨고,[4]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사망했을 때에는 극진하게 장례도 치러주었다. 정약용도 형 정약전을 통해 문순득의 친절을 알고 있었기에 문순득이 아들을 낳았을 때 아들 이름도 지어주고, 형 정약전이 사망한 후 문순득이 장례를 잘 치르어 준 것을 감사하는 편지도 보냈다.

참고로 '표해시말'의 말미엔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류큐어(81개)와 필리핀어(54개)로 싣고 있어서 언어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이 책이 완역되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아직도 완역판이 없다.

한편, 1801년(순조 1년)에 5명의 외국인이 제주도에 표착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 외국인들은 신원불명인 채로 9년째(...)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는데[5], 문순득은 이들이 여송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표류 당시 배운 여송어로 통역을 한 덕분에 문순득이 여송어로 말을 걸자, 여송 사람들은 "드디어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마침내 고향인 여송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순조 실록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여송국(呂宋國)의 표류인(漂流人)을 성경(盛京)에 이자(移咨)하여 본국(本國)으로 송환(送還)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신유년(1801년) 가을 이국인(異國人) 5명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도착하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들의 말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나라 이름을 쓰게 하였더니 단지 막가외(莫可外)라고만 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관(移咨官)을 딸려서 성경(盛京)으로 들여보냈었는데, 임술년(1802년) 여름 성경의 예부(禮部)로부터도 또한 어느 나라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는 내용의 회자(回咨)와 함께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중 1명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그리하여 우선 해목(該牧)에 머무르게 한 다음 공해(公廨)를 지급하고 양찬(粮饌)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또 죽어서 단지 3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呂宋國)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무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었다.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과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乙卯/命呂宋國漂人, 移咨盛京, 送還本國。 先是, 辛酉秋, 異國人五名, 漂到濟州, 而鴂舌聱牙, 莫辨魚魯。 寫其國名, 只稱莫可外, 未知爲何國人。 移咨入送于盛京, 壬戌夏, 自盛京禮部, 亦未能確指何國, 回咨還送。 而一名在塗病故矣。 命姑留該牧, 給公廨, 繼糧饌, 使之習風土, 通言語, 其中一人又故, 只餘三名。 至是羅州 黑山島人文順得, 漂入呂宋國, 見該國人形貌衣冠, 其方言, 亦有所錄來者。 而漂留人容服, 大略相似, 試以呂宋國方言問答, 則節節脗合。 而如狂如痴, 或泣或叫之狀, 甚可矜惻。 漂留已爲九年, 而始知爲呂宋國人, 所謂莫可外, 亦該國之官音也。 全羅監司李冕膺、濟州牧使李顯宅, 具由以聞, 有是命。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 6월 26일 을묘 1번째 기사


한국사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인 셈이다.[6] 이에 조정에서는 문순득의 공을 치하하고 가선대부 종2품 공명첩을 하사했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시대 관직체계에서 정1품부터 정3품까지는 당상관이라고 해서 고위직으로 분류되었다. 즉, 비록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고위직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벼슬을 얻었다는 것. 그야말로 인생살이 새옹지마.

여러 일화를 볼 때 문순득은 비범한 기억력과 외국어 습득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자를 익힐 기회가 적고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조선 시대의 평민이 그랬다는 것이 더 놀라운 점. 박연의 사례나 하멜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지만 보통 표류해서 다른 나라에 뚝 떨어진 외국인들은 그 나라의 말을 익히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며, 이는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술한 일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제주도에 표류한 필리핀인들은 9년 동안 자신들의 국적도 해명 못하는 상태였지만 문순득은 고작 3년 만에 류큐어와 필리핀어를 능숙하게 배워서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에도 필리핀어 통역을 할 정도로 숙달된 실력이었다는 걸 보면 가히 외국어 마스터 달인으로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또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표류국에서 언어와 생계수단을 빠르게 배워 적응하며 살았던 것을 보면, 굉장히 강한 생활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3. 매체에서

2015년 전남일보에서 문순득과 일본의 존 만지로를 비교하는 기사를 냈다.#

2016년 10월 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문순득의 삶을 다루었다.#

[1] 두음법칙을 배제하면 / 려송 / 으로 루손과 거의 비슷하고, 현대 중국 표준어로는 뤼송이라 읽는다.[2] 현재 필리핀의 공용어로 쓰이고 있는 타갈로그어를 배운 건 아니고 루손섬 북부 지역에서 쓰이는 언어인 일로카노어를 배웠다고 한다. 물론 일로카노어도 필리핀에서는 나름대로 꽤 쓰이는 언어이다.[3]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천초'(天初)라는 별호도 지어주었다. '(이런 경험을 한 것은)조선 땅에서 네가 처음'이라는 뜻이다. 정약전이 문순득의 체험담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4] 정약전이 19살 연상으로, 거의 아버지뻘이었다.[5] 웃기는 것은 조선에서는 그들을 북경으로 송환했는데, 북경에서도 이 사람들이 누군지 모른다고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냈다.[6] 문순득은 자신이 표류되었을 때 표류국에서 제공한 후한 대접을 잊지 않고 이들 덕분에 무사귀환한 것을 늘 감사히 여겼다. 자신은 타국에서 그 은혜를 입었는데도 훗날 국내에 표류된 이 여송인들이 10여 년이 되도록 제주에서 갇혀 사는 것을 보고, 이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서 부끄러웠다고 한다.[나무위키]

 

[정보] 책 -  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메디치 WEA 총서 4):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