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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제자 중 도산서원에 배향된 유일한 인물]조목(趙穆)

Bawoo 2020. 8. 27. 21:50

조목(趙穆)1524(중종 19) ~1606(선조 39) 

본관은 횡성. 자는 사경, 호는 월천·동고. 아버지는 대춘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경전 연구와 수양에만 전념했다. 그뒤 동몽교관·공릉참봉·집경전참봉·종부시주부·공조좌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이내 사직했다. 1576년 봉화현감으로 잠시 봉직하며 교육진흥에 힘썼으며, 1594년에는 군자감주부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뒤 장악원정·사재감정·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했다.

일생 동안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셨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경학에 능통했으며, 이기에 대한 사변적 분석을 지양하고 인심도심을 중심으로 하는 심학의 체인적 공부에 역점을 두었다. 말년에는 예서에 유의하여 토의·강론했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이광윤(李光胤) 등이 있다.

저서로 〈월천집〉·〈곤지잡록 困知雜錄〉이 있다. 예천 정산서원, 예안 도산서원, 봉화 문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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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경상북도 예안 출신.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 아버지는 참판 조대춘(趙大春)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수익(權受益)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생애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이후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동몽교관·종부시주부·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선조 9)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경상도도사·충청도도사·형조좌랑·신녕현감·영덕현령·전생서주부·공조정랑·상서원판관·금산군수·단양군수·합천군수·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후 장악원정·사재감정·예빈시정·공조참의·공조참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하였다.

활동사항

조목은 일찍이 이황의 문하생이 된 후 평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이황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조목의 문집에는 이황에 관계된 글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연구와 소개이다.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문집의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힘썼으며,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의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

조목은 신민(新民)보다 명덕(明德)을 중시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현사사(玄沙寺)·광흥사(廣興寺)에 들어가 독서를 즐겼다. 이황을 수행하며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수양했고, 경학을 연구하되 이기설보다는 훈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심학(心學)에 심취하여 『심경(心經)』에 관한 논설이 많았다.

외직에 부임했을 때에는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여 교육 진흥에 이바지하였다. 귀향할 때에는 역동서원(易東書院)과 도산서원을 참배하여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 나갔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하고 겸양하며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이광윤(李光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月川集)』과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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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사항]
조목은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15세 때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으로 몸을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봉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 뒤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에 뽑혀 집경전참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이후 동몽교관, 종부시주부,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 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 경상도도사, 충청도도사, 형조좌랑, 신녕현감, 영덕현령, 전생서주부, 공조정랑, 상서원판관, 금산군수, 단양군수, 합천군수, 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중인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 뒤 장악원정, 사재감정, 예빈시정, 공조참의, 공조참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하였다.

조목은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출생하고 성장하면서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후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으로서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이황의 문집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했다. 또 외직에 부임하면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는 등 고을의 교육 진흥에 이바지하였으며 귀향할 때마다 역동서원(易東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참배하고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 나갔다. 조목은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 겸양,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학문과 사상]
조목은 신민(新民)보다 명덕(明德)을 중시해 벼슬은 사양하고 현사사(玄沙寺), 광흥사(廣興寺)에 들어가 독서를 즐겼으며, 이황을 수행하며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수양하였다. 경학(經學)을 연찬하되 이기설(理氣說)보다는 훈고(訓詁)에 관심이 많았다. 또 심학(心學)에 심취해 『심경(心經)』에 관한 논설을 많이 지었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과 이광윤(李光胤) 등이 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월천집(月川集)』이 있으며, 저술로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월천마을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온(鄭蘊)이 신도비명을 지었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 상덕사(尙德祠)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이종호, 『월천 조목의 삶과 생각 그리고 문학』(한국국학진흥원, 2007)
장호중, 「월천 조목의 현실인식과 시세계」(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

 

[수정이력]

2017.07.13 묘소 주소 수정 예안면 부포리 -> 도산면 동부리 월천마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보] 책 - 조상의 아래에서(양장본 HardCover)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 김우영 옮김 | 너머북스 | 2018.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