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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순천 양민학살을 주도하고 거창 양민학살을 은폐한 인물]김종원[金宗元]

Bawoo 2020. 11. 2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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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金宗元](1922~1964)

 

1922년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일본 하사관 출신으로 일본식 이름은 금산종원(金山宗元)이다.

[활동 사항]
김종원은 경상남도 마산 주둔 5연대 1대대장으로서 1948년 10월 여순 사건을 진압하였다. 그는 마산에서 창설된 16연대 부연대장을 지냈다. 1949년 11월에 부산에 주둔했던 23연대 연대장을 역임한 후 3권을 행사하는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民事部長)에 올랐다. 그때 나이 28세였다. 1950년 10월경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관련자들이 부산 군사 재판에서 사형과 징역 10년형 등이 선고되었을 때, 3000만 원을 수뢰하고 그들을 석방시켰다고 전한다. 이 사실은 1960년 6월의 국회 증언 청취 속기록에 전한다.

또한 김종원은 거창 학살 사건과 관련한 국회의 조사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국군을 공비로 가장시켜 현장으로 가던 국회 의원들과 군인·경찰·검사 합동 조사반을 습격하여 조사 활동을 중단시킨 장본인이다. 이 사실이 나중에 들통 나 1951년 9월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고, 재판 결과 징역 3년이 선고되었으나 8개월가량 복역한 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6·25 전쟁 때 영덕·포항 전투에서 공을 세워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고, 외국 언론에 ‘타이거 김’으로 소개될 정도로 군 내부에서 확고하게 입지를 굳혔다.

김종원은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으로 있으면서 1951년 1월 24일부터는 경남지구 병사구사령관(兵事區司令官)도 겸임하였다. 이후 1952년부터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을 거쳐 전라북도 경찰국장, 경상남도 경찰국장, 경상북도 경찰국장, 전라남도 경찰국장을 지냈다. 경상남도 경찰국장 시절에 참모 회의 중 인플레 때문에 시민들이 큰 고생을 한다는 말을 듣고 “수사과장,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와!”라고 지시하였다는 등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1956년 대통령 선거 뒤 부정 선거의 공을 인정받아 내무부 치안국장에 임명되었다.

김종원은 1960년 5월 장면(張勉) 부통령의 저격 사건 배후로 지목되어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구속되었다. 이후 징역 15년을 받고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62년 9월 7일 검찰의 형집행 정지 지시로 출감하였고, 1963년 ‘5·16 혁명 기념 특사’로 석방되었다. 1964년 1월 30일 지병인 당뇨병으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부산·경남 지역』(역사비평사, 2002)
『동아 일보』(1951. 1. 26|1956. 6. 2|1962. 9. 8)
『경향 신문』(1964. 1. 31)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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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金宗元 1922년 ~ 1964년 1월 30일, 경북 경산)은 일제강점기 군인이자 해방후 대한민국 군인이다.

 

생애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 제1연대 A중대 소대장이었으며,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사건을 토벌하고자 부산에 주둔하던 5연대 1대대 대대장으로서 참여했다.[1] 만주에서 일본군으로 근무 당시 독립군과 그들을 지지하던 조선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그는 여수에서도 시내에서 잡아오는 가담자로 지목된 시민들을 다른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본도로 목을 치고 지치면 권총으로 쏴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49년 5월 김종원은 신성모의 추천으로 계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거창 양민 학살 사건 직후 사건 조사와 관련된 국회의 방문 조사 때 국군을 빨치산으로 가장하여 습격해 조사활동을 중단시켰고 이 사건으로 51년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재판 결과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바로 대통령 특사로 사면받고 풀려났으며 1956년 5·15 대통령 선거 뒤 부정선거의 공을 인정받아 내무부 치안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60년 5월, 4월 혁명임흥순이익흥 등과 함께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61년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아 1964년 1월 30일에 사망했다.

영화

  • 백두산 호랑이를 찾아서 : 독립영화 (감독 구본환, 95분)[2]

김종원은 구본환 감독의 이모 할아버지이다.

사후

일본군 장교-하사관의 오류(?)-로 복무한데다가 조선인들과 항일 운동가들을 악랄하게 탄압한 이유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군 부문에 선정되었다.

 

각주

  1. 잔인한 학살자 '백두산 호랑이',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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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원 치안국장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제1연대에 사병으로 입대해 군인이 되었고 육군헌병총사령부 부사령관,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부산지구방위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51년 2월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이 발생해 이를 조사하는 내무·법무·국방부의 합동조사단이 파견되지만 이를 방해한 이유 등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치안국장 재직 시절인 1956년 9월 28일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배후로 밝혀져 파면된 뒤 구속됐다. 서울신문 DB

 

경찰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임명한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 15명은 모두 일제의 검사, 경찰 간부, 일본군 출신이었다. 홍순봉과 문봉제는 간도특설대 출신이고 김종원(오장), 이성우(대위)는 헌병 출신이었다. 1960년 3·15 마산의거 때 ‘배후는 공산당’이라고 발표했던 치안국장 이강학은 일본군 소위 출신이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 김종원이었다. 일본군 자원입대자로, 해방 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여순사건 때부터 잔혹한 민간인 도살자로 악명을 떨쳤다. 빨치산 토벌대였던 23연대장 시절 그의 부대가 지나간 자리엔 빨치산이 아니라 민간인의 주검이 널려 있었다.

그런 김종원을 이승만은 총애했고 김종원은 충성을 다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 때 그는 예하 부대를 공비로 위장시켜 국회의 합동조사단을 습격하도록 했다. 그가 군법회의에서 3년형을 선고받자 이승만은 특사로 3개월여 만에 석방했다. 이후 경찰로 옮긴 김종원은 전북, 경남, 경북, 전남 경찰국장을 거쳐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치안국장이 되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을 일으켜 이승만의 은혜에 보답했다.

이승만은 김종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 육사 8기생들의 평가도 있다. “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노병들의 증언’ 중에서) 미 군사고문단 보고서는 좀더 구체적이다. “부하에게는 가혹했고 전투에는 비겁했다. 전술적 두뇌가 없었고 부하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권력엔 교활…유재흥·[김종원 등 ‘똥별 뿌리’ 출세가도 2020.07.05. 에서 발췌

를 테러하다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전쟁엔 무능·권력엔 교활…유재흥·김종원 등 ‘똥별 뿌리’ 출세가도 서울신문 2018-08-27 한국군 적이 된 이승만의 장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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