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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권오설[權五卨]

Bawoo 2020. 11. 19. 19:34

권오설[權五卨]1897(고종 34)~1930

[상세 해설 자료 보기]

권오설 - 나무위키 2020.11.16.

[1] 성명 권오설(權五卨) 이명 박철희(朴喆熙, 朴哲熙)·김삼수(金三洙) 홍일헌(洪一憲)·권일(權一)·김형신(金亨信) 권부덕(權富德)·권형신(權亨信) 호 오서(五敍)·막난(莫難) 본관 안동 권씨[2] 생몰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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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1차조선공산당검거사건(신의주사건) 등과 관련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1897년(고종 35) 안동권씨 동성 마을인 풍천면 가곡리에서 권술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일이라고 불리는 이 마을은 15세기 초 권항(權恒)이 입향한 이래 안동권씨 동성 마을을 형성하였다. 묘소는 가일마을 뒷산 공동묘지에 있다.

[활동사항]
권오설은 가숙(家塾)인 남명학교와 하회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수학하고, 대구에 이어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가세가 어려워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1918년 전라남도청의 고용원으로 근무하다가 1919년 광주 3·1 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다. 1919년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11월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를 조직하여 교장 겸 교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농민조합과 청년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풍산소작인회, 화성회, 화요회, 조선노동자총동맹에 가입하여 서울과 안동을 오가며 농민·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가하여, 4월 18일에는 조선공산당(제1차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또 같은 날 조선노농총동맹 대표로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석하여 고려공산청년회 7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중순에는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및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26년 5월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사건의 전모가 발각되어 6월 7일 검거되었다. 1927년 9월 13일 공판이 열려 1928년 2월 14일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30년 4월 17일 옥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1년 권오설선생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같은 해 11월 11일 가일마을 입구에 권오설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김희곤, 『안동 독립운동가 700인』(안동시, 2001)
장석흥·김희곤, 『권오설 선생 추모학술강연회 자료집』(안동청년유도회, 2005)
김희곤,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지식산업사, 2007)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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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산청년회 제2대 책임비서를 지냈고,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 총책임을 맡았다.

별명은 김형신(金亨信)이다. 일본 와세다대학교를 다녔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결성한 신사상연구회(뒤에 화요회로 개칭)에 참여했으며, 1924년 4월 창립한 조선노농총동맹에서 화요회를 대표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당시 김찬(金燦)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의 사전조직인 코민테른 극동부 소속의 코르뷰로 국내부에 참가하여 조선노농총동맹의 당세포 책임자로 활동했다.

1925년 4월 박헌영을 중심으로 제1차 고려공산청년회가 결성되었을 때, 7인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신의주사건)으로 대부분의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들이 검거되거나 해외로 망명하자,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에 착수하여 12월 중순 임시중앙간부를 구성하고 제2대 책임비서가 되었다. 강달영(姜達永)을 중심으로 재건된 제2차 조선공산당의 중앙집행위원도 겸임하면서, 당시 사회주의운동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을 맞아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의하여 추인받고,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총책임을 맡았다. 권동진(權東鎭) 등 천도교구파와 제휴를 모색하는 한편, 청년·학생 조직을 중심으로 전국 각 지방에 조직망을 건설했다. 그러나 천도교당내 손재기(孫在基)의 집에 감추어 두었던 격문 및 전단이 발각되면서, 6월 7일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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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책 - 전쟁과 가족:권헌익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