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랑(王朗, ? ~ 228년)은 중국 후한 말기 ~ 조위의 정치가로, 자는 경흥(景興)이며 서주 동해국 담현(淡縣) 사람이다.[1]
본명은 왕엄(王嚴)이었다.
생애
처음에는 (<<동관기>>에 따르면) 대장군 하진의 속연이 되었다가 서주로 가서 자사(刺史) 도겸(陶謙)을 섬겼으나,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이 높게 평가받아 회계태수(會稽太守)에 임명되었다. 훗날 강동에 손책(孫策)이 진출하였는데, 주변의 호족들을 규합한 왕랑은 제1표적이 되었다. 군의 공조(功曹) 우번(虞翻)은 달아날 것을 진언하였지만, 한(漢)의 신하로서 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왕랑은 이 주장을 물리쳤다. 처음에는 고릉 땅에서 손책에게 저항하며 강을 건너 싸우는 손책 군을 여러 번 막아냈다. 손책이 손정(孫靜)의 진언을 따라 사독 길로 나와 고천둔을 치니, 왕랑은 크게 놀라 손책과 싸웠으나 결국 패하였으며, 배를 타고 동야(東冶)로 달아났으나 붙잡혔다. 왕랑은 손책에게 항복이 늦었음을 사죄하였고, 손책 또한 왕랑이 교양있고 겸허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고 용서하였다. 그 후 왕랑은 곤궁한 생활을 하였으나, 도의에 따른 생활을 하였다.
훗날 조조(曹操)에게 초빙되어 중직을 역임하였다. 조조 사후에는 화흠(華歆)과 함께 조비(曹丕)에게 황제 등극을 간하였으며, 위(魏)왕조가 일어난 후에는 사공(司空)에 임명되었다. 조예(曹叡) 대에는 사도(司徒)가 되었다. 왕랑은 관대하게 정무를 보았으며, 백성의 부담을 줄여 인구를 늘릴 것과 왕궁의 예산을 줄일 것을 간한 상주문을 올렸다. 또 육형을 두는 것에 반대론을 펴기도 하였다(진군과의 논쟁).
(유비(劉備)가 전사했는데, 그 신하 제갈량(諸葛亮)에게 항복을 종용했다(제갈장 허지 화흠 등과 함께 이치에 관하여 서술). 또한 구면인 허정(許靖)에게도 같은 편지를 보내었으나, 때마침 허정이 죽어 답장을 받지 못하였다.
228년 11월에 천수를 누리고 숨을 거두었다. 사마염의 외 증조 할아버지이며, 그의 손녀 왕원희는 그의 장남 왕숙의 딸로, 사마소의 정부인 으로, 사마염 을 낳았다.-정사 삼국지 위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삼국지연의》 속 왕랑
엄백호(嚴白虎)의 친구로 설정되어 있으며, 이후 제갈량(諸葛亮)의 1차 북벌때 설전으로 제갈량을 상대하다가 제갈량의 언변에 혈압이 올라 말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가계
관련 인물
왕숙 (아들), 왕원희(문명황후 왕씨) (손녀), 왕개(손자)
각주
- ↑ 왕침, 《위서》(魏書) [유의경, 《세설신어》 권상지상 덕행 유효표주(劉孝標注)에 인용]
- [이상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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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의 지방관,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관.
자는 경흥(景興). 출신지는 서주(徐州) 동해군(東海郡). 본명은 왕엄(王嚴).
그의 아들은 유학자로 유명했던 왕숙이며, 그의 손녀는 사마소의 부인인 왕원희이다. 그리고 사마소와 왕원희 사이에서 태어난 사마염은 왕랑의 외증손자다.
4.2. 정사[편집]
경전에 통달하여 낭중과 치구의 장으로 임명받았다. 양사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양사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버리고 복상의 예를 취했으며, 후에 효렴으로 천거받고 공부로 초빙받았을 때도 응하지 않았다.
서주자사 도겸이 그를 무재로 천거했으나 장안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여 도겸의 치중으로 있었다. 이때 조욱과 함께 천자에게 왕명을 받들겠다는 표를 올리도록 권했고, 조욱을 통해 표를 올렸다. 도겸은 안동장군, 조욱은 광릉태수, 왕랑은 회계태수로 임명받았고, 이때 사촌형의 모반으로 처형받을 위기에 처한 허정도 보호한다.
그렇게 해서 회계를 다스리던 도중 손책이 장강을 넘어 침입했다. 부친상을 당한 공조 우번이 상복을 벗어가면서까지 손책을 피하라고 했음에도, 자신은 한 왕실의 관리이니 지켜야한다며 고릉을 방비하며 손책군을 상대로 선전하였다. 그러나 손책이 손정의 계책에 따라 사독을 습격하자 주흔과 함께 그를 막으러 갔다 패배하였다. 이때 표류하여 동야까지 밀려갔다. 우번이 동부 후관의 장 상승을 설득해 겨우 성 안에 들어가나,[2] 그곳마저도 손책이 군대를 보내니 상승과 왕랑의 군대는 대패한다. 손책은 왕랑의 유학적 명성을 생각하여 그저 문책만 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그 뒤로 유랑하며 빈곤한 생활을 했고, 아침에 저녁먹을 것이 없어 걱정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친척과 친구를 포용하며 위로하고 모든 행동을 도의에 기초하여 하니 왕랑의 이름은 더욱 높아지고, 이에 조조는 그를 초빙한다. 하지만 곡아에서 출발한 왕랑은 또 표류하여 몇 년이나 고생한 끝에야 도착해 간의대부, 참사공순사로 임명받는다.
213년 위나라가 서자 군좨주, 위군태수를 하고 소부태상대리로 승진한다. 나라의 일을 처리하는데 관용이 있었고 의문이 있는 죄질에는 가볍게 대하며 법을 합당하게 집행하고 옥을 잘 다스려 세인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조조가 육형 회복에 관한 논의를 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육형을 회복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종요는 사형에 관한 조항을 가볍게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면 월형이 늘어나게 되니, 이는 불구자를 일으켜서 내시로 삼고, 시체를 살려서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로 오형은 과율에 기록된 것입니다. 사형을 감하는 것을 일등의 법으로 삼게 되면서 죽이지 않고 감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시행되었습니다만, 도끼 모양을 한 형구로 육형을 가한 후에 죄에 따라서 처벌을 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전시대에 어진 사람은 육형의 참혹함을 차마 보지 못해 폐지하고 사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을 하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수 백 년이나 지났습니다. 지금 다시 시행을 하게 되면, 많은 백성들의 눈에 감형에 대한 조항이 오히려 제대로 인식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육형에 대한 소문은 이미 도적들에게나 널리 퍼져 있는 것이지, 옛날 사람들로부터 초래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종요가 사죄를 감해주고자 하는 것은 사형을 감하여 머리카락을 깎는 곤형이나 발을 바르는 월형으로 대신하자는 주장입니다. 죄를 감해주자는 의견을 싫어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범죄가 증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왕랑이 맞다고 여겼으나, 위 무제는 아직 촉과 오를 못 평정했으므로 다시 불문에 붙였다.
220년 어사대부, 안릉정후로 임명받으며 조비에게 백성을 양육하고 형벌을 살필 것을 권유하였다. 얼마 뒤 조비에게 황제 하기를 권해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공, 악평향후로 봉해졌다. 이때는 조비의 사냥이 너무 잦다며 상소를 올린다. 222년 이릉대전이 일어나자 조비가 왕랑에게 지금 적을 공격해도 되냐고 묻자 그는 승패가 갈린 다음에 공격할 것을 권한다. 조비가 사다새가 영지지로 모여든 것을 계기로 인재추천을 받자 왕랑은 양표를 추천하고 병을 핑계로 물러나려고 하였지만 조비가 맡은 일을 계속 넘겼다. 손권이 아들 손등을 중앙에 보내는 것을 거부하자 조비는 군사를 일으켰는데 왕랑은 이를 말렸지만 조비는 결국 장강 앞에서 그냥 돌아오고 만다.
223년 진군, 허지, 제갈장 등과 함께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번국을 칭하라고 하였으나 제갈량은 끝내 답장을 보내지 않고 그저 '정의'라는 글을 지었다. 226년 조비가 죽었을 때 조진, 진군과 함께 조예에게 장의를 전송할 때 더우니 나가지 말 것을 건의하나 조예는 듣지 않는다. 조예가 즉위하자 난릉후에 올랐으며 식읍은 1천2백 호였다. 또 모절을 갖고 옥책을 받들어 문소황후의 능에 제사지낸다. 이때 상소문을 올려 백성들을 굽어 살피기를 권하며 사도로 전임한다. 사도를 한 뒤 왕기를 초빙했으나 왕릉이 보내지 않자 편지를 써서 이기적인 행동이라며 주를 탄핵한다.
228년 11월 사망한다.
장소와 허정 등과 친했으며, 조방의 대에 왕랑이 지은 역전을 관리 등용 수험 과목으로 결정한다.
《세설신어》에는 화흠을 추앙한 일화와 배를 탔을 때의 일화가 있는데, 화흠 항목에 있는 배를 탔을 때의 일화는 이하와 같다.
왕랑은 화흠을 추앙해 화흠이 1년 중 12월에 만물을 모아서 신을 찾아 배향하는 사제일에 자식과 조카를 모아놓고 연회를 열자 이를 따라했으며, 훗날 어떤 사람이 장화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자 왕랑이 따라한 것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니 그렇게 할수록 화흠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고 했다. |
4.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15회에서 손책의 쾌진격에 희생양으로 등장한다. 엄백호와 한데 묶여서 친구가 돼 버렸다. 거기다가 왕랑이 직접 태사자와 칼춤을 추며 일기토를 벌이는 장면까지 나온다.[3]
손책에게 패배한 뒤에는 한참 동안 등장하지 않다가[4] 조예가 즉위한 뒤 제갈량의 사마의 모함 작전에 넘어가 화흠과 함께 사마의를 열심히 까서 파직당하게 만든다. 이로써 안심한 제갈량이 북벌을 단행하자 조진을 천거하며 그의 군사가 되어 같이 출병한다.[5] 제갈량을 회유하러 몸소 나섰으나 93회에서 제갈량이 준엄하게 반박하자 열받은 나머지 말에서 떨어져 죽는다. 덕분에 적은 비중인데도 불구하고 연의에서 일기토 및 설전을 둘 다 해본 극히 적은 인물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도 제갈량과 태사자라는, 최상위권 실력자들을 상대로.[6] 물론 다 졌지만(...). 정작 웃긴건 실제로 목숨이 위험한 일기토에서는 생존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안전한 설전에서 죽었다는것.
다음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 9권에 있는 제갈량과 왕랑의 설전 부분으로, 일부분을 약간 각색했다.
왕랑이 말을 몰고 앞으로 나섰다. 공명이 수레 위에서 손을 맞잡아 예를 갖추자 왕랑도 말 위에서 몸을 굽혀 답례한 후 입을 열었다. |
왕랑에게 이런 굴욕적인 대우와 죽음을 안겨준 것은 아무래도 실제로 서신을 제갈량에게 보내 얌전히 위나라에 투항하라고 권한 것과 그의 손녀 왕원희가 사마소에게 시집가서 사마 씨와 사돈 관계를 맺자 괘씸죄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1] 허정이 편지를 보낸 것에서 왕숙을 나았을 때 나이가 29살이라고 적혀있다. 중국식 세는 나이를 적용하면 왕숙이 태어난 195년에 왕랑이 29세였다면 왕랑은 167년생인 것이 된다.[2] 이때 우번은 노모를 모셔야한다며 회계로 돌려보낸다.[3] 그래서인지 한중합작 특촬물 레전드히어로 삼국전에서 레전드히어로로 등장한다. 그것도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우길을 제외한 레전드히어로 전원이 무관인 것을 감안한다면...[4] 공백기가 30년이나 넘는 탓에, 독자들은 '손책에게 썰린 왕랑'과 '제갈량한테 말로 썰려 빡쳐서 죽어버린 왕랑'이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위나라로 들어간 탓에 활약상은 없어지고, 그냥 병X으로 전락했다. 말 그대로 연의의 피해자.[5] 이 때 그의 나이가 75세라는 언급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의 나이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다만 아들 왕숙 관련 기록에서 그의 나이를 간접적으로 유추할수 있는 정보가 있는데 167년생이니 이때 60살이였다.[6] 다만 연의에서 설전은 대부분 제갈량이 중심이기에 제갈량과 설전한 것은 특이한 것은 아니다.[이상 나무위키]
[정보]책-정사 삼국지: 위서. 2(양장본 HardCover)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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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진수 | 역자 김원중 | 휴머니스트 | 20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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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아들 왕숙과 손자 왕운 이야기가 왕숙 편에 같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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