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ubert, Piano Sonata No.21 in B flat major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D.960
Franz Schubert
1797-1828
Alfred Brendel, piano
Great Hall of the Middle Temple, London
1988.01
Alfred Brendel - Schubert, Piano Sonata No.21 in B flat major, D.960
알프레트 브렌델(1931~ )은 체코 비젠베르크 출신으로 에트빈 피셔에게 사사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베토벤 소나타 전곡 녹음으로 ‘거장’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게 되었고, ‘무색 무미 무취’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그의 연주는 그러나 학구적인 면모에서 여타의 연주자들이 넘볼 수 없는 경지를 개척한 피아니스트입니다. 브렌델은 스승 에트빈 피셔처럼 시와 산문에도 관심이 깊어 여러 권의 책을 냈는데, 최근 그의 저서 <음악을 듣는 시간>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슈베르트의 참된 자아를 담고 있는 그의 모든 피아노 작품들은 오랜 사색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고 삶이 끝나간다는 일말의 경고도 없었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신념에 나름대로의 정당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지만, 결국 미완의 형태로 피아노 뚜껑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베토벤 숭배자였던 슈베르트가 피아노 작품, 특히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작업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엄청난 양과 높은 수준의 리트를 작곡한 슈베르트에게 피아노 소나타는 그의 부차적인 장르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곡가로서 경력을 시작할 무렵 남긴 그 수많은 아이디어의 단편들과 미완성된 소나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젊은 슈베르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피아노 소나타를 통한 형식과의 싸움이었다.
형식과 멜로디의 새로운 나선구조적 융합
형식과의 싸움은 작곡가로서 그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슈베르트는 빈 비더마이어 시대(1815~1848)를 대표하는 음악적 전형 혹은 흥겹고 감각적인 멜로디 음악의 창시자로만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신중하고 사려 깊은 연구를 통해 고전주의가 순수하면서도 완성된 형식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고, 다른 한편 낭만주의가 이것을 확장시켜 궁극적으로 우리 시대의 해체와 분열을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고 정의를 내린다면, 슈베르트의 작품에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교차하고 있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전주의 형식을 확장하고자 한 그의 노력이 필연적으로 고전주의를 넘어서는 발전을 가져왔다고는 하지만, 현대의 많은 해석가들과 연구가들은 진지한 발전을 거듭해온 음악 역사에 있어서 슈베르트가 갖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슈베르트는 진심으로 베토벤을 존경했다. 이것은 단순한 모방자 혹은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한 위대한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스스로 이해하고 동일시하는 것이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1828년은 베토벤이 죽음을 맞이한 바로 그 다음 해로서 그의 마지막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완성한 해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B플랫장조 소나타를 ‘피아노 소나타 3번’이라고 불렀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에 비해 작품 수가 적었던 슈베르트는 세 개의 소나타(세 개의 후기 소나타인 C단조 D.958, A장조 D.959, 그리고 마지막으로 B플랫장조인 D.960)만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이들 작품이 그의 피아노 작품과 인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세 개의 걸작으로 알고 있지 그의 피아노 작품들의 초기작 혹은 단순한 대표작으로 알고 있지는 않다. ▶이 곡은 슈베르트 마지막 삶의 적막함, 초연함을 담은 감동적 걸작이다.
슈베르트가 거쳐야만 했던 형식의 해체와 이들 작품에 담겨 있는 그 지나칠 정도로 풍부한 멜로디는 서로 반대되는 성질로 인식되곤 한다. 사실상 이 넘쳐흐를 정도의 풍부한 멜로디는 슈베르트의 위대함을 결정짓는 중요한 개성이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이것을 오히려 형식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의 소수의 연주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이러한 이질적인 특성은 그동안 슈베르트 음악의 구조를 잘못 해석한 것에서 기인한 오류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둘은 명백히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지향점을 갖고 있는 슈베르트 본연의 내적 외침으로서의 동질성이 더 강하다. 한편 고도의 기교와 감각적인 터치, 거침없는 웅변술 등을 요구하는 초기 소나타들 또한 후기 소나타들의 경우처럼 위대한 해석가들 덕택으로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슈베르트의 후기 소나타는 테크닉이 대단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구조에 대한 지적인 통찰력과 작곡가의 의도를 꿰뚫는 직관력을 필요로 한다. 특히 그 음향에 있어서의 감각적인 접근 방식, 음색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의 창의성과 다채로운 레가토 효과를 만들기 위한 기술, 이전 시대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었던 변화무쌍한 톤의 범위를 모두 소화해내야 한다. 이 가운데 특히 D.960의 네 악장은 슈베르트의 필생의 동반자라고 말할 수 있는 방랑자의 드라마가 가장 짙게 깔려 있는 작품으로서 가히 슈베르트의 마지막 여행기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을 완성하고 두 달이 지난 뒤 슈베르트는 삶의 여행을 마치고 죽음으로의 새로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Claudio Arrau - Schubert's Piano Sonata No.21 in B flat major, D.960
Claudio Arrau, piano
Musica Theatre, La Chaux-de-Fonds, Swiss
1980.05
방랑자를 위한 마지막 희곡
1악장: 몰토 모데라토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의 1악장 몰토 모데라토(Molto moderato)의 시작 부분은 그 어떤 감성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온화하지만 절실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생의 마지막에 직면한 이 소나타에 등장하는 여행자가 느끼는 생명에 대한 근엄함과 삶에 대한 초연함 모두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제 멜로디는 그가 생의 마지막 해에 작곡한 리트인 ‘Am Meer’와 닮아 있는데, “일몰의 마지막 햇빛 아래로 저 멀리 바다가 희미하게 번져드네”라는 가사의 이미지와도 상통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다만 조금 더 정확하게 한정짓자면 리트에서는 석양의 아름다움이 향수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소나타에서는 오히려 불안감과 번민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 악장의 전개부에서 주제 선율과 리트 ‘Der Wanderer’를 연상케 하는 멜로디의 화성이 서로 발전적으로 수반되며 변형을 이루는 모습 또한 감동적이다. 초반부는 이렇게 리트의 주제 선율로부터의 차용들이 주를 이루다가 악장의 중간 부분에서는 모든 것을 포기한 한 남자의 감정적 폭발을 상징하는 듯한 다이내믹한 클라이맥스가 터져 나온다. 한 차례 커다란 폭풍이 휩쓸고 간 이후 몇 차례 더 감정의 분출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내 다시 자신의 길을 찾은 듯 도입부에서와 같은 조용하면서도 체념의 발걸음을 다시금 재촉한다.
2악장: 안단테 소스테누토
두 번째 악장인 안단테 소스테누토(Andante sostenuto)는 슈베르트가 피아노를 위해 작곡한 작품들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곤 한다. C샤프단조에서 B플랫장조를 거쳐 다시금 회귀하는 구성으로서, 탄식조의 무거운 발걸음을 은유하는 주제 선율의 아름다움에는 고통을 넘어선 한 인간의 공허함과 진지함이 동시에 담겨 있다. A장조의 중간 부분은 일종의 일시적인 심리적 위안으로서 리트 ‘Der Lindenbaum’의 다음 대목을 연상케 한다. “그 가지들이 속삭이듯이 나를 부르는 것 같네. 이리로 오게, 친구여, 여기서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일세...” 다시 한 번 화자의 탄식의 멜로디는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단조에서 장조로 옮겨가면서 기약 없는 행복을 꿈꾸며 이 악장은 끝을 맺는다.
어떤 면에 있어서 이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의 느린악장은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Op.111의 아리에타 악장과 그 정서에 있어서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도 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역시 베토벤만큼 대범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음악을 향유하는 청중들이 다시금 땅 위로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는 해피엔딩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는 피아노 소나타 A장조 D.959에서도 이와 똑같은 심정적 동선을 보여준 바 있다.
3악장: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콘 델리카테차
그러나 알레그로 비바체 콘 델리카테차(Allegro vivace con delicatezza)인 3악장 스케르초는 한결 현실성이 적고 그 무게감 또한 훨씬 낮다. 앞 악장에서의 여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만큼 이 스케르초 악장의 밝고 가벼운 리듬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자조적인 느낌을 주는 효과 또한 탁월하다. 더 나아가 낮은 음역대로만 일관하는 트리오 B플랫단조 부분이 화자의 여전히 어두운 심정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 스케르초는 일종의 양분된 심리 상태를 상징한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4악장: 피날레.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마지막 피날레인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Allegro ma non troppo)는 3악장의 해석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큰 대목이다. 연주자의 관점에 따라 이 악장에서 더 큰 감정의 낙폭과 산화된 열정을, 혹은 보다 온화한 자연주의적 결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C단조의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듯한 짧은 도입부와 이에 대한 화답으로서 긍정으로 가득 찬 B플랫장조의 주제 선율이 만들어내는 대구는 마치 베토벤의 현악 4중주 OP.130의 마지막 악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음악은 점점 격정적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듯 보이지만 매번 긍정의 힘에 의해 가로막히며 일종의 춤곡의 분위기로까지 변형된다. 점점 느려지며 론도적인 성격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의미심장한 게네랄파우제를 거친 뒤 짧고 장대한 크레셴도를 통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슈베르트가 남긴 마지막 이별 인사로서 연가곡 <겨울 나그네>의 마지막 ‘거리의 악사’에 비견할 만한 비통한 절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 소나타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방랑자가 겪어 온 험난한 삶에 대한 마지막 경의로서의 보상은 충분히 담고 있다.
추천음반
1. 빌헬름 켐프의 연주(DG)는 이 작품의 구조와 멜로디의 올바른 조화 및 방랑자에 대한 가장 서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 연주로 가장 먼저 추천한다.
2. 클라우디오 아라우(Philips)의 애처로운 슬픔과 헛된 희망을 향한 호소력 모두를 보여주는 연주도 훌륭하다.
3. 라두 루푸의 투명하고 연약한 음색으로 발걸음을 모질게 재촉하는 연주(DECCA)는 아름다움의 극한을 보여준다.
4. 현대적인 의미의 슈베르트를 새롭게 정의 내린 장본인인 알프레트 브렌델의 현대적인 해석(Philips)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명연이다.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의 역자.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