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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예술가들의 밥줄을 끊어놓았으며 예술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러나 종교미술 파괴가 가장 심했던 17세기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국가 네덜란드에서는 오히려 ‘회화 열풍’이 거세게 불었고 근대 시민 회화가 활짝 꽃을 피웠다. 교회ㆍ왕실 등 부와 권력을 손에 쥔 후원자의 주문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생산 시스템이 ‘기성품 전시 판매’ 방식으로 바뀐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미술품의 주요 소비층이 성직자ㆍ왕 등 교회와 세속 권력자에서 ‘일반 시민’으로 바뀌었으며, 그림 소재도 성경 내용이나 신화 이야기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종교개혁이 세계 미술사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은 셈이었다.
이 책 『부의 미술관』은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부터 ‘회화가 가진 강력한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간파하고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한 나폴레옹 이야기’, ‘한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의 가치를 알아보고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를 활용하여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으로 둔갑시킨 폴 뒤랑뤼엘의 탁월한 마케팅 전략’ 등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8편의 욕망의 명화 이야기를 다룬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서문_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명화는 어떻게 부를 창조하고 역사를 발전시켰나?
제1장_ 빵집 광고로 활용된 페르메이르 그림 〈우유를 따르는 여인〉
ㆍ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왜 16세기 유럽 예술가들의 밥줄을 끊어놓았나
ㆍ ‘우상 숭배’라는 죄목으로 교회미술을 강하게 탄압한 네덜란드에서 근대 시민 회화가 화려하게 꽃피다
ㆍ 네덜란드 미술이 종교개혁으로 인한 ‘미술 파괴’라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 두 가지 비결
ㆍ 미술이 교회와 왕실의 지배체제 유지를 위한 선전 도구로 활용되던 시대
ㆍ 17세기 네덜란드를 세계 최강 미술 대국으로 만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기성품 전시 판매’ 전략
ㆍ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왜 정물화와 풍경화를 한 점도 그리지 않았을까?
ㆍ 가정을 돌보는 평범한 여인이 페르메이르 그림의 당당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
ㆍ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 페르메이르 집안의 3년 치 빵값이었다고?
ㆍ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실제 모델이 페르메이르의 연인이었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ㆍ 독특한 개성과 참신한 소재로 ‘작품 차별화’에 성공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
ㆍ 피카소가 끊임없이 파격적인 기법을 탐구하고 창조한 이유는 사진의 등장으로 화가의 밥줄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는데?!
제2장_ 천재 중의 천재 다빈치가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ㆍ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모나리자〉와 달리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유
ㆍ 예술가 후원자의 다섯 가지 유형
ㆍ 인류 예술사 최고의 천재 다빈치가 요즘 취업 준비생처럼 자기소개서를 썼다고?
ㆍ 〈최후의 만찬〉 제작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불만을 제기한 수도원장을 유다의 모델로 그리려 했던 다빈치
ㆍ 미켈란젤로의 대작 〈천지창조〉를 다빈치가 그리면 4,000년이 걸린다?
ㆍ 불후의 명작으로 남은 〈최후의 만찬〉이 당대에는 실패한 회화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ㆍ 다빈치는 왜 자신의 만년 방랑길의 소중한 길동무 〈모나리자〉를 캔버스가 아닌 목판에 그렸을까?
ㆍ 미모의 제자 살라이와 다빈치 유언장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ㆍ 다빈치의 3년 치 연봉에 달하는 거액을 받고 프랑스 왕실에 팔린 〈모나리자〉
ㆍ 움직일 수 없는 그림을 움직이게 할 수 있어야 돈도 움직인다?
제3장_ 렘브란트는 왜 자기 그림을 모사하는 ‘가짜 그림’을 양산했나
ㆍ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왜 다른 나라에는 없는 ‘집단 초상화’가 경쟁적으로 그려졌을까?
ㆍ 16~17세기 네덜란드에 빵집, 푸줏간보다 화가 수가 훨씬 많았다는데?
ㆍ 렘브란트가 거액의 돈을 투자한 아윌렌부르흐 공방이 모작과 위조로 돈을 버는 ‘가짜 그림 생산 공장’이었다?
ㆍ 자신의 공방에서 자신의 작품을 모작한 상품을 양산한 렘브란트
ㆍ 신인 화가였던 렘브란트가 외과의사 조합의 집단 초상화 의뢰를 받은 데에 아윌렌부르흐의 정치적 영향력이 한몫했다는 의혹은 사실일까?
ㆍ 렘브란트의 최고 성공작으로 손꼽히는 〈야경〉은 어떻게 탄생했나
ㆍ 골프 회원권보다 저렴했던 ‘더치페이’ 그림값
ㆍ ‘경제적 성공’이 가장 큰 미덕으로 여겨졌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경제적으로 파산한 렘브란트
ㆍ 만년에 불운이 끊이지 않았던 대화가의 일생
ㆍ 렘브란트는 왜 ‘렘브란트풍’ 그림을 양산했을까?
ㆍ 오늘날 선풍적 인기를 끄는 휴대전화 자화상 사진 ‘셀피’의 원류를 17세기 네덜란드 자화상, 특히 렘브란트 자화상에서 찾는 이유
제4장_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다?
ㆍ 메디치 은행을 유럽 최고 은행으로 키운 뛰어난 경영자 코시모 데 메디치가 교회와 예술 후원에 그토록 열성적이었던 숨은 이유
ㆍ 기독교는 왜 그토록 강력하게 이자를 금지했나
ㆍ 예술 후원에만 몰두하며 가문의 재산을 축내고 메디치 은행을 경영 위기 상황으로 내몰았던 ‘위대한 로렌초’
ㆍ ‘이자를 이자로 보이지 않게 하는 공작’, 환전으로 막대한 부를 얻은 메디치 가문
ㆍ ‘복식부기’가 다른 때 다른 나라 아닌 12세기 이탈리아에서 개발된 이유
ㆍ 지하 금융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던 메디치 가문의 기상천외한 외환 트릭
ㆍ 메디치가의 금융업은 왜 로마 교황청과 교회 지도자들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을까?
ㆍ 로마 교황청을 구워삶아 ‘교황청의 금고지기’가 된 메디치 가문
ㆍ ‘위대한 로렌초’를 야박하게 평가한 마키아벨리가 로렌초의 조부 코시모의 정치적 수완과 경영자로서의 재능을 칭찬한 이유
ㆍ 당대에 그림물감 값보다도 저렴했던 보티첼리의 그림값
제5장_ ‘신의 길드’와 ‘왕의 아카데미’가 날카롭게 대립하던 시대
ㆍ 17세기 프랑스 왕실 미술에 학문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촉매제 역할을 한 프랑스 아카데미
ㆍ 루이 14세는 왜 프랑스 아카데미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까?
ㆍ 교황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던 미술품이 왕권의 권위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다
ㆍ ‘일하는 사람’인 노동자가 아닌 ‘일을 시키는 사람’인 스승의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한 조합, 길드
ㆍ 미켈란젤로가 어렵게 교황의 허가를 얻어 석공 길드를 탈퇴한 까닭
ㆍ 원조 길드는 왜 왕립 아카데미에서 맞아들인 길드 탈퇴 화공과의 밥그릇 싸움에서 밀려났나
ㆍ ‘신의 길드’와 ‘왕의 아카데미’가 날카롭게 대립하던 시대
ㆍ 다빈치의 해부도가 책으로 만들어져 대중에 공개되었다면 ‘해부학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라는데?
ㆍ 길드 측 지도자에게 강의를 의무화하는 꼼수로 길드를 괴롭히고 길들이려 한 왕립 아카데미
제6장_ 미술의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영리하게 활용한 인물, 나폴레옹
ㆍ 히틀러를 거쳐 현대 광고 기법으로 이어진 나폴레옹의 이미지 전략
ㆍ 나폴레옹을 숭배하던 베토벤이 그의 황제 즉위 소식을 듣고 자신이 악보에 적어 놓은 헌사를 찢어버린 이유
ㆍ 나폴레옹은 왜 자신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려는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낚아채듯 받아 직접 머리에 얹었을까?
ㆍ ‘상징 이미지 조작’의 끝판왕,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ㆍ 성스러운 정면 얼굴, 기념비적인 옆얼굴, 자연인으로서의 비스듬한 얼굴
ㆍ 다비드는 왜 황제 나폴레옹을 그린 두 그림 〈나폴레옹 1세 대관식〉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각도를 다르게 설정했을까?
ㆍ 국민 행복을 위해 분투하는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홍보하는 데 성공한 다비드의 그림 〈튀일리 궁 서재의 나폴레옹〉
ㆍ 나폴레옹의 야만적인 유물 약탈에 의해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자리 잡은 루브르 미술관
ㆍ 미술을 총동원한 나폴레옹의 효과적인 이미지 전략을 무용지물로 만든 ‘포도주세 부활 정책’
제7장_ 폴 뒤랑뤼엘은 어떻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에 가치를 불어넣었나
ㆍ 폴 뒤랑뤼엘이 인상주의 회화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비밀 무기,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
ㆍ 폴 뒤랑뤼엘은 왜 루이 15세 시대의 궁정 양식을 인상주의 회화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채택했을까?
ㆍ 폴 뒤랑뤼엘이 ‘작은 미술관’처럼 꾸민 자기 집을 대중에 공개한 숨은 이유
ㆍ 인상주의 화가들은 왜 폴 뒤랑뤼엘의 마케팅 전략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반대했을까?
ㆍ 고객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최고의 진정제, ‘금테 액자’
ㆍ 귀족 취미와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귀족 기분’을 느끼게 함으로써 판촉 효과를 극대화하는 마법 같은 마케팅 전략
ㆍ ‘전 세계의 돈줄’ 미국인 부호들의 ‘귀족 콤플렉스’를 절묘하게 공략하여 인상주의 회화를 최고가 상품으로 둔갑시킨 폴 뒤랑뤼엘
ㆍ 파리 미술품 가격을 치솟게 만든 미국인 수집상들의 사재기 열풍
ㆍ 인상주의 거품 시대의 막을 열어젖힌 ‘미국 가격’
제8장_ ‘비평을 통한 브랜드화’가 예술의 가치를 좌우하던 시대
ㆍ 비평가의 펜대가 움직이는 대로 판매가가 널뛰던 19세기 프랑스 미술 시장
ㆍ ‘인플루언서 마케팅’의 지평을 새롭게 연 인물, 델핀 드 지라르댕
ㆍ 미술상 폴 뒤랑뤼엘이 직접 잡지를 발간한 이유
ㆍ “이제 비평은 비평가를 먹여 살릴 뿐이다”
ㆍ 소설 『작품』을 통해 ‘비평가의 밥벌이 처세술’을 신랄하게 파헤친 작가, 에밀 졸라
ㆍ 폴 뒤랑뤼엘은 왜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 아낌없이 비용을 쏟아부었나
ㆍ ‘대중의 상품 지식 부족’이 19세기 유럽에서 비평가의 가치와 영향력을 극대화시킨 가장 큰 이유였다?
ㆍ 기성 제품 판매 전략에서 ‘비평을 통한 브랜드화’가 필수 요소일 수밖에 없는 까닭
ㆍ 폴 뒤랑뤼엘은 ‘인상주의의 발견자’인가, ‘인상주의의 발명자’ 혹은 ‘날조자’인가?
후기_ 인간의 욕망은 미술사와 세계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책 속으로
교회와 왕실이라는 대형 발주처를 잃은 네덜란드 회화시장은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을 포기해야 했다. 즉 이전에는 어딘가에서 주문이 들어온 이후에 제작에 들어갔다면, 이제 시장의 변화에 발맞추어 ‘기성품 전시 판매’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대응했다. 한데, 이 궁여지책의 전략이 멋지게 먹혀들어 과거의 규모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시장을 새롭게 개척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화가가 주문받지도 않은 작품을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염두에 두고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다. 그 결과 국토 면적이 남한의 약 40퍼센트, 한반도의 20퍼센트도 채 안 되는 작은 나라 네덜란드에서 당시에 그려진 작품 수는 총 600만~650만 점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유형으로 자리 잡은 ‘기성 제품 전시 판매’라는 미술 비즈니스 모델은 작지만 강한 나라 네덜란드에서 탄생했다. 새로운 시장은 새로운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상품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민이라는 새로운 고객층이 기꺼이 지갑을 열게 하려면 그때까지 교회와 왕실의 프레젠테이션 도구로 활용되던 미술품이 시민의 일상생활 공간을 장식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콘셉트의 상품으로 변신해야 했다.
과거에도 미술 공방이 부업 삼아 미리 제작해놓은 작품을 판매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소재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처럼 안정적인 수요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작품으로 한정돼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상은 전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으로 판로가 막혀버렸다. 그런 터라 작품을 판매하는 측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시민 고객의 안정적인 수요를 예측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종교성을 배제한 작품을 절박한 심정으로 개발해야 하는 과제에 맞닥뜨린 셈이었다.
이렇게 ‘정물화’와 ‘풍경화’가 독립 장르로서 새롭게 탄생했다. 과거에 조연에 지나지 않았던 일상 소재가 당당히 미술의 주인공 자리를 꿰차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졌다.
- 본문 「17세기 네덜란드를 세계 최강 미술 대국으로 만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기성품 전시 판매’ 전략」 중에서 (35~37p.)
프레스코는 ‘작업 속도’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간에 쫓겨 섬세한 터치로 꼼꼼하게 그릴 수 없다 보니 사실상 정밀 묘사는 거의 불가능하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를 화집에서 보면 생동감이 넘치지만 아주 가까이서 보면 놀라우리만큼 대담한 터치로 쓱쓱 그려져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화집에 돋보기를 대고 아무리 확대해서 들여다보아도 붓 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사진을 연상시키는 다빈치의 묘사는 옅게 푼 유화물감을 말도 안 되게 엄청난 횟수로 덧칠한 것으로, 회반죽이 마른 뒤 덧칠하지 않는 프레스코와 정반대 기법으로 그려졌다. 신속함으로 승부하는 프레스코는 유화물감으로 섬세한 터치를 덧입히는 방식을 선호한 다빈치의 기질과는 애초 물과 기름처럼 맞지 않았다.
크기 면에서 보자면 소품 부류에 들어가는 〈모나리자〉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장장 15년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자. 만약 다빈치가 〈모나리자〉에 들인 것과 같은 속도로 체육관 천장만큼 화폭이 큰 〈천지창조〉를 그린다면 과연 완성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무려 4,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
- 본문 「미켈란젤로의 대작 〈천지창조〉 천장화를 다빈치가 그리면 4,000년이 걸린다?」 중에서 (78~81pp.)
다만 렘브란트 특유의 장엄한 화풍이 시류에 맞지 않게 되었다는 지적은 사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시대의 기호가 밝고 화려한 분위기로 이행함에 따라 어두침침하고 진지한 그의 화풍은 시장에서 선호도가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장이 렘브란트의 그림을 외면한 데는 화가 자신의 잘못도 있다. 즉, 전성기에 그가 자신의 공방에서 양산한 이른바 ‘렘브란트풍’으로 그려진 유사 작품의 공급 과잉이 사태를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렘브란트는 왜 ‘렘브란트풍’ 그림을 양산했을까? 그것은 그가 자신이 직접 그린 작품으로만 생계를 꾸려나가기보다 공방에서 조직적으로 생산한 ‘렘브란트풍’ 작품을 계획적으로 판매하는 편이 경제적 성공과 직결된다는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생산 방식으로 세상에 나온 ‘렘브란트풍’ 작품이 ‘렘브란트 아류’로 복제 상품 취급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무시할 수는 없다.
렘브란트는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먼저 ‘화가 브랜드화’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전략적으로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한 화가였다. 그럼에도 자기 작품을 모작해 아류작을 양산하는 방식의 전략은 명확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렘브란트의 경영 전략에는 다분히 수수께끼에 싸인 듯한 부분이 있다. 그가 아윌렌부르흐 공방에 몸담았던 시기에도 자기 원화를 공방 화가에게 모사하게 하여 판매한 흔적이 있다. 당시 모사 작품은 후세 애호가와 연구자에게는 고민거리였는데, 아직도 그것을 진품으로 굳게 믿으며 소장하는 애호가도 있다고 한다.
- 본문 「렘브란트는 왜 ‘렘브란트풍’ 그림을 양산했을까?」 중에서(125~126pp.)
이 그림의 가장 큰 허구는 나폴레옹이 탄 백마다. 그림 속 백마는 나폴레옹의 애마를 모델로 그렸으나 알프스를 넘을 때 그가 실제로 탄 말은 당나귀와 말의 교배종으로 추위에 강한 노새였다. 참고로, 말은 추위와 험한 길에 약해 훗날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 대군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나폴레옹 사후에 그려진 작품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반영해 험로에 강한 노새를 타는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그의 용모도 실제와 마찬가지로 왜소하고 땅딸막한 체형으로 그려졌다. 이와 달리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외모를 이상화해 그를 키가 훤칠한 미남 청년으로 그렸다.
기마상은 예로부터 권력자의 가장 공식적인 초상화로 여겨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밀라노에 머물던 시절 〈최후의 만찬〉과 맞먹는 대작으로 밀라노 공의 기마상을 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작 단계에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침공하는 바람에 오늘날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무튼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권력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전통적인 공식에 따르면 역시 노새보다는 말에 올라탄 모습이 좀 더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화면 왼쪽 아래 바위에 ‘보나파르트’라는 나폴레옹의 성을 적어 넣었다. 이는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가서 로마군을 격퇴한 고대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과 서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프랑크 왕국을 세운 샤를마뉴 대제라는 전설적 영웅들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 유럽을 지배하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바위에 새김으로써 ‘전설적 영웅’ 이미지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계획되어 만들어진 근대 황제의 공식 이미지로 몇 점의 모사화를 제작해 나폴레옹의 영웅적 이미지를 유포하는 홍보물 역할을 해왔다. 또한 이 그림이 오늘날 여러 나라의 교과서에 실리면서 영웅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 본문 「‘상징 이미지 조작’의 끝판왕,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중에서 (202~-203pp.)
폴 뒤랑뤼엘은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을 구사했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한껏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매장에 화려한 소도구를 적절히 배치해 상품을 돋보이게 만들어 고객의 넋을 빼놓은 다음 빙긋 웃으며 청구서를 들이미는 고도의 마케팅 기법이다. 재미있게도 고객은 분위기에 취해 가격표에 높은 금액이 붙어 있을수록 지갑을 활짝 연다. 고객의 욕망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이런 심리 전략은 오늘날 마케팅 분야의 기본이 된 기법이다. 화랑은 물론이고 보석이나 귀금속매장과 명품매장, 고급 호텔과 유명 레스토랑, 회원제 클럽, 미용실 등 고가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업 시설에서 꾸준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매장에 들어오는 고객을 유명인처럼 정중하게 모셔라. 유명인사 기분을 맛본 고객은 자기도 모르게 우쭐해지며 이성이 마비된다. 그리고 황홀해진 고객의 눈앞에 명품으로 포장한 상품을 내밀어라. ‘클래식’, 즉 명품 전략에 약한 고객이 의외로 많다.
설령 상품이 과거 인상주의 그림처럼 고객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더라도 이런 식의 연출은 상품을 유서 깊은 명품으로 보이게 하는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고객을 왕처럼 모시는 접객은 고객이 그 접객에 어울리는 신분이라고 믿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여 돈을 아끼는 쩨쩨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고객은 체면이 구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가격을 따지지 않고 상품을 구매하게 된다.
- 본문 「폴 뒤랑뤼엘이 인상주의 회화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비밀 무기,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 중에서 (230~232p.)
출판사서평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명화는 어떻게
부를 창조하고 역사를 발전시켰나?
‘명화가 시대마다 시스템과 패러다임을 바꾸며 변화를 추동하고 역사를 발전시킨다’라고 말하면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 『부의 미술관』에서 독자는 8개 장마다, 그리고 페이지 페이지마다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명화가 어떻게 부를 창조하고 역사를 발전시켜 왔는지를 깨닫고는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후기에서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회화(명화)에 투영되어왔고, 미술사를 드라마틱하게 바꾸어왔으며, 세계사의 흐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는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이 책을 집필하는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돈 단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욕망’이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맥락에서 이 책의 핵심 콘셉트를 한 구절로 제시한다면 ‘세계사를 움직이는 욕망의 명화, 명화를 움직이는 욕망의 세계사 이야기’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마디로 말해 이 책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명화가 부를 창조하고 역사를 발전시키며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책은 14~16세기 이후 600여 년간 유럽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사와 문화사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8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들 이야기 속에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가득한데, 일테면 이런 것이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 페르메이르 집안의 3년 치 빵값으로 팔려 빵집 광고로 활용됐다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왜 정물화와 풍경화를 한 점도 그리지 않았을까?’, ‘렘브란트는 왜 자기 그림을 모사하는 ‘가짜 그림’을 적극적으로 양산했을까?’, ‘미켈란젤로의 대작 〈천지창조〉를 다빈치가 그리면 4,000년이 걸린다?’,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이 〈모나리자〉와 달리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유는 ‘부동산’이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왜 황제 나폴레옹을 그린 두 그림 〈나폴레옹 1세 대관식〉,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각도를 다르게 설정했을까?’, ‘피카소가 끊임없이 파격적인 기법을 탐구하고 창조한 이유가 사진의 등장으로 화가의 밥줄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고?’, ‘기성 제품 판매 전략에서 ‘비평을 통한 브랜드화’가 필수 요소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등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미술세계사에 관한 지적 호기심과 통찰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1.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의 여파로 당대 예술과 예술가가 치명타를
입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오히려 근대 시민 회화가 화려하게 꽃핀 이유는?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유럽 미술사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했다. 프로테스탄트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지했으며, 그 연장선에서 교회를 장식하는 회화와 조각 등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때까지 미술계의 큰손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로마 교황청과 가톨릭교회에서 들어오던 주문이 딱 끊겼고, 예술가들은 글자 그대로 ‘밥줄이 끊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미술 파괴가 가장 심했던 17세기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국가 네덜란드에서는 오히려 ‘회화 열풍’이 거세게 불었고 근대 시민 회화가 활짝 꽃을 피웠다. 실제로 17세기 한 세기 동안 이 나라에서만 600만 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회화가 그려졌으니 과연 ‘열풍’이라 할 만했다. 어떻게 그런 기적과도 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그림의 소비자가 교회ㆍ왕실 등 성직자와 세속 권력자에서 ‘일반 시민’으로 바뀌었으며, 그림 소재도 성경 내용이나 신화 이야기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회화의 대명사가 된 ‘정물과’와 ‘풍경화’는 바로 이 시기 네덜란드의 평범한 시민이 주도하는 회화 시장에서 독립 장르로 탄생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그린 〈우유를 따르는 여인〉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그러한 변화의 흐름을 오롯이 담아낸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어떻게 미술의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간파하고
정치적 도구로 영리하게 활용했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미술이 가진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간파하고 정치적 도구로 영리하게 활용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프레젠테이션 능력은 건축, 회화, 조각, 인테리어, 보석, 패션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다. 그는 고대 유물에서 발굴한 것으로 보이는 고전적인 기념 메달을 만들고 신문 보도를 통제하는 등 광범위하고도 정교한 미디어 관리와 홍보 전략으로 자신의 영웅적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 독일은 군복에서 건축까지 고대 로마제국을 철저히 모방해 카리스마 넘치는 디자인으로 통일함으로써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히틀러는 나폴레옹의 전략을 계승했으며, 현대의 광고 기법은 이러한 나폴레옹의 이미지 전략을 원형으로 확립되었다, 그 밖에 나폴레옹의 이미지 전략은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백악관이 고대 신전 콘셉트로 지어진 연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미국의 수도 워싱턴 중심부에 우뚝 서 있는 기념탑이 미국사와 관련 없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본뜬 데에도 나폴레옹에서 시작된 근대의 고대 제국 부활 움직임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나폴레옹은 그림을 어떻게 정치적 선전 도구로 교묘히 활용했을까? 먼저, 루이 14세의 초상화와 나란히 역사교과서 등에 자주 등장해 우리에게 친숙한 그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단순한 허구를 넘어 ‘상징 이미지 조작의 끝판왕’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몇 가지 이유를 짚어보자. 첫째, 이 그림의 가장 큰 허구는 나폴레옹이 탄 백마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애마를 모델로 백마를 그렸으나 알프스를 넘을 때 실제로 그가 탄 말은 당나귀와 말의 교배종으로 추위에 강한 노새였다. 나폴레옹 사후에 그려진 다른 작품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반영해 험한 길에 강한 노새를 타는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그의 용모도 실제 모습을 반영하여 왜소하고 땅딸막한 체형으로 그려졌다. 그와 달리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외모를 이상화해 나폴레옹을 키가 훤칠한 미남자로 그렸다. 다비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그림의 화면 아래 바위에 ‘보나파르트’라는 나폴레옹의 성을 적어 넣었다. 이는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가서 로마군을 격퇴한 고대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과 서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프랑크 왕국을 세운 샤를마뉴 대제라는 전설적 영웅들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 유럽을 지배하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바위에 새김으로써 ‘전설적 영웅’ 이미지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계획되어 만들어진 근대 황제의 공식 이미지로 몇 점의 모사화를 제작해 나폴레옹의 영웅적 이미지를 유포하는 홍보물 역할을 해왔다. 이 그림은 오늘날 여러 나라의 교과서에 실리면서 영웅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역할도 했다.
영웅을 넘어선 초인 나폴레옹 이미지 홍보에 크게 기여한 그림에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이 있다. 이탈리아 원정 이후 나폴레옹의 종군화가로 동행했던 앙투안 장 그로의 작품인데, 그가 발휘한 이미지 전략 효과는 탁월했다. 화가는 오늘날 홍보 대행사의 전문가가 기자들에게 뿌리는 보도자료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교묘한 솜씨를 이 그림에서 구현했다. 이 작품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페스트라는 역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자의 살결을 쓰다듬으며 위로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화가가 황제 나폴레옹에게 불사의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장치이자 콘셉트였다. 화가는 이 그림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종교 회화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병자를 기적으로 치유하는 장면을 그린 회화의 구도와 공식을 그대로 계승함으로써 불세출의 영웅이자 황제인 나폴레옹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구세주’의 이미지를 만들어주고자 한 것이다.
그는 주인공 나폴레옹뿐 아니라 배경 인물도 허투루 배치하지 않고 나폴레옹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치밀하게 활용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 뒤에 서 있는 사관이 그런 효과적인 장치 중 하나인데, 그는 악취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자기 코를 감싸 쥔 모습으로 그려졌다. 말하자면 그는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야전병원에서 풍겨 나오는 끔찍한 냄새와 참상을 적나라하게 전달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관은 나폴레옹이 환자를 만지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듯한 자세로 그려져 페스트 전염력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구도와 묘사는 세속의 규범을 초월하는 나폴레옹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다.
화가는 화면 속 나폴레옹을 ‘옆얼굴’로 보여준다. 그는 왜 이 구도를 선택했을까? 이는 초인적 영웅 나폴레옹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화가는 그림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이 구도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폴 뒤랑뤼엘은 어떻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를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으로 둔갑시켰나?
오늘날 한 점에 몇 백억 원을 호가하는 르누아르,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한때 잡동사니 취급을 받고 천덕꾸러기 신세였다고 말하면 놀라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한때 허접쓰레기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는 어떻게 그토록 드라마틱하게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이 되었을까? 여기에는 19세기 프랑스 파리를 주름잡던 천재 미술상 폴 뒤랑뤼엘의 피나는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다.
폴 뒤랑뤼엘이 본격적으로 판매에 착수하던 시점에 인상주의 작품은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선 전위예술로 푸대접받았다. 당시 프랑스 유력 일간지 《피가로》는 인상주의 그림을 고양이가 앞발로 괴발개발 그린 낙서라고 빈정댈 정도였다. 혹자는 고양이가 피아노 건반 위를 걸을 때 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 같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인상주의 그림의 시장 가치는 형편없었고 공짜로 주면 불쏘시개로나 쓸까 돈을 내고 사갈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 없는 회화였다. 게다가 붓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는 인상주의 그림은 회화의 기본도 모르는 어설픈 초보 예술가들이 끄적인 낙서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고 미술상의 창고에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쓴 악성 재고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런 연유로 그림이 도무지 팔리지 않아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모네는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할 정도였고, 고흐는 평생 불우하게 살다가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천재 미술상 폴 뒤랑뤼엘은 마치 무대 마술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모자 속에서 살아 있는 토끼를 꺼내듯 인상주의 화가들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시켰다. 그는 과연 어떤 마케팅 전략을 사용하여 한때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인상주의 그림을 부르는 게 값인 명품으로 둔갑시켰을까? 그가 사용한 마케팅 기법은 한껏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매장에 화려한 소도구를 적절히 배치해 상품을 돋보이게 만들어 고객의 넋을 빼놓은 다음 웃으며 청구서를 들이미는 방식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상황에서 고객은 분위기에 취해 가격표에 높은 금액이 붙어 있을수록 지갑을 활짝 연다. 고객의 욕망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이런 심리 전략은 오늘날 마케팅 분야의 기본이 된 기법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일테면 이런 식이다. 고객이 매장에 들어설 때부터 그를 마치 유명인라도 되는 듯 정중하게 모신다. 유명인사 기분을 맛본 고객은 자기도 모르게 우쭐해지고 이성이 마비된다. 그렇게 황홀함에 취한 고객의 눈앞에 명품으로 포장한 상품을 내미는 것이다.
설령 상품이 과거 인상주의 그림처럼 고객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더라도 이런 식의 연출은 상품을 유서 깊은 명품으로 보이게 하는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고객을 왕처럼 모시는 전략은 그가 그 전략에 어울리는 신분이라고 믿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돈을 아끼려는 쩨쩨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고객은 체면이 구겨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가격을 따지지 않고 상품을 구매하게 된다. 이 마케팅 전략은 최고의 ‘분위기 연출’과 질 높은 ‘서비스’라는 두 가지 기법이 만나 잘 어우러지면서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낸다. 말하자면 상품을 본 고객이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얼떨결에 ‘그걸로 주세요’라고 말하게 하는 마술 같은 마케팅 기법이다.
19세기 파리의 미술상 폴 뒤랑뤼엘은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마케팅 전략의 선구자였다. 그는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로 화려한 루이 15세 시대 궁정 양식을 대표하는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를 선택했다. 그는 왜 프랑스혁명으로 루이 16세 국왕과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왕실 문화가 몰락하고 근대 시민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시점에 하필 루이 15세 시대의 화려한 궁정 문화를 상징하는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상주의 회화 마케팅에 과감히 도입했을까? 폴 뒤랑뤼엘은 ‘시대 착오적인 발상’이라고 거세게 비난하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를 밀어붙였는데, 그것은 그가 철저하게 그림을 구매하는 고객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고객이 보기에 인상주의 그림은 출처를 알 수 없는 희한한 상품이었다. 그러므로 가격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덜컥 사들였다가 가격 폭락 사태라도 벌어지면 큰일이다.
폴 뒤랑뤼엘은 이러한 고객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작품이 가격에 합당한 고급품이며 값을 지불한 후에도 가격이 내려갈 걱정이 없음을 홍보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인상주의 그림을 팔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 맥락에서 금테 액자는 고객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최고의 ‘진정제’였다. 왜냐하면 왕조 양식 약자에 넣은 작품에는 은연중 왕실 화가의 명품과도 같은 품격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왕과 귀족이 소장해온 명품의 품격이 느껴지는 황금 후광을 둘러주는 장치가 바로 ‘금테 액자’였다.
폴 뒤랑뤼엘의 탁월한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잡동사니 신세에서 벗어나 차츰 명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인상주의 회화를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으로 변신시킨 또 하나의 강력한 티핑 포인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약하던 19세기에 영국의 뒤를 이어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미국에서 많은 대부호가 출현하고, 그들이 전 세계의 도시를 다니며 명품을 사들이기 시작한 흐름과 폴 뒤랑뤼엘의 ‘인상주의 회화 명품 만들기’ 전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이었다.
19세기 당시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유능한 인재가 전 세계에서 부나비처럼 몰려드는 나라였다. 또한 이 나라는 경제적 활력이 넘쳐나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과 격식 등 문화 자산의 결실로 볼 수 있는 귀족 제도 자체가 없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신흥 부유층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허무함의 원천이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미국의 부유층은 자신의 허영심과 허무함을 채워줄 수단으로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고, 그것이 폴 뒤랑뤼엘의 ‘인상주의 회화 명품 만들기’ 전력과 요철처럼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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