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stakovich, Symphony No.10 in E minor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Dmitri Shostakovich
1906-1975
Valery Gergiev, conductor
Mariinsky Theatre Orchestra
Great Hall of the Moscow Conservatory
2006.05.08
1953년 12월 17일, 레닌그라드에서 예브게니 므라빈스키가 지휘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쇼스타코비치의 열 번째 교향곡이 공개되었다. 그로써 쇼스타코비치는 베토벤이 멈춰 섰고 말러가 주저했던 ‘10번’이라는 벽을 넘어서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이 교향곡 10번 E단조는 ‘혁명’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교향곡 5번 D단조와 더불어 그의 가장 인기 있는 교향곡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런데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목록에서 ‘10번’의 등장은 전작인 ‘9번’ 이후 무려 8년 만의 일이었다. 이전의 작품들이 나온 시기를 살펴보면, ‘5번’ 이후에는 거의 2년에 한 곡 꼴로 새 교향곡을 내놓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10번’만 유독 그렇게 오랜 시간을 소요했던 것일까?
1945년에 발표한 교향곡 9번 E플랫장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다시금 ‘공공의 적’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을 기념할 만한 찬란하고 장엄한 대작 대신, 디베르티멘토에 가까운 단출하고 경쾌한 교향곡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단 ‘9번 교향곡’의 전통적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았고, 세인들의 기대를 저버린 처사였으며, 무엇보다 소련 당국자들의 눈 밖에 날 만한 행동이었다.
결국 쇼스타코비치는 1948년의 악명 높은 ‘주다노프 비판’을 통해서 다시금 ‘형식주의자’로 낙인찍혀 자아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당연히 그의 ‘진실된’ 창작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는 한동안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를 위시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작품들 뒤로 숨어야 했다.
미약한 해빙 무드
시간이 흘러 1953년 3월, 철권을 휘두르던 독재자 스탈린이 죽었다. 정권은 말렌코프에게 넘어갔고 소련 사회에도 ‘해빙’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쇼스타코비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교향곡 10번 E단조를 작곡하여 발표했던 것이다. 다만 이 작곡 시기는 작곡가 자신의 말에 따른 것이고, 일설에 의하면 작품이 이미 1951년에 완성되어 있었고 일부 스케치는 1946년부터 진행되어 왔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교향곡 9번 발표 이후 그가 겪었던 일들과 그의 깊은 속내가 반영된 ‘진실의 거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좌로부터 스탈린, 레닌, 칼리닌. 1919년 3월
그런데 이 교향곡은 다시금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전반부의 비극성에 비해 후반부의 희극성이 미약해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확실히 스탈린 사후 ‘해빙 무드’를 맞이한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라고 볼 소지가 다분했다. 그런가 하면 인생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한 관념적 비극성을 깊이 있게 묘사했다는 식의 긍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 자신은 ‘짧은 작곡 기간’에 기인한 아쉬움을 피력하면서 어느 정도 작품의 결함을 인정하는 선에서 말을 아꼈다. 정작 작품의 의미에 대한 그의 언급은 단순했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감정이나 정열을 그리고 싶었다.”
은밀한 장치들
일단 이 교향곡에 관해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실은 후반 두 악장에 작곡가의 음악적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른바 ‘D-S-C-H 동기’를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첼로 협주곡 1번, 현악 4중주곡 8번 등 여러 작품에서 사용한 바 있다. 이것은 보통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이미지를 작품에 투영한 장치로 풀이된다. ▶<증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상록.
한편 보다 은밀한 장치들은 그의 사후에야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1979년에 소련의 망명 음악학자 솔로몬 볼코프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증언>(볼코프가 쇼스타코비치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저술한 회고록)에서 2악장을 ‘스탈린의 음악적 초상화’로 지목했다. 독재자가 좋아했던 노래의 단편으로 시작되는 이 악장에서 그의 이미지를 마치 ‘악마의 풍자처럼 가혹하고 냉혹한’ 음악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1993년에는 3악장에 한 여인의 음악적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여인은 엘미라 나시로바라는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음악가로 한때 쇼스타코비치의 제자였으며, 쇼스타코비치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아직도 모호한 이 작품에 대한 해석에 유의미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Herbert von Karajan/Staatskapelle Dresden - Shostakovich, Symphony No.10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Staatskapelle Dresden
Festspielhaus, Salzburg
1976.08.15
추천음반
1.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지휘)/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Erato
2.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DG
3. 발레리 게르기예프(지휘)/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 Mariinsky
4. 베르나르드 하이팅크(지휘)/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Decca
5. 바실리 페트렌코(지휘)/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Naxos
글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 음악 감상실 ‘무지크바움’ 실장과 한국바그너협회 사무간사를 역임하였다. 무지크바움, 부천필 아카데미, 성남아트센터, 풍월당에서 클래식음악 교양강좌를 맡고 있다. <객석>, <스테레오뮤직>, <그라모폰>, <라무지카> 등에 칼럼을 기고했고 현재 서울시향 프로그램 노트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