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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장편 추리소설] 2월 30일생:김서진

Bawoo 2023. 8. 6. 12:51

저자:김서진/출간:2014.9.19
 

[소감] 모처럼 몰입하여 읽은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 추리소설의 성격을 띤 작품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일본 작품-사회파 추리소설-과 비교하면서 읽게 되는데 딱히 흠잡을 데 없이 좋았다. 소재가 내가 나고 자란 곳을 바탕으로 한 곳이기에 이질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너무 좋았다. 다만 이 작품의 주얼개는  소작농 출신인 박대길-주인공의 할아버지이면서 주인인 정윤조를 살해하고 대역으로 살아간 역할이다-이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날까 봐 살인을 저지르는 것인데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달리 살인범을 잡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게 특이한 점이랄 수 있겠다. 주인공이 내연녀이자 친척 여동생-나중에야 밝혀진다-일 수도 있는 "혜린"을 죽인 것인지 할아버지가 누구를 사주하여 죽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가 혜린이 임신했다면 살려둘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살인까지 저지르며 신분을 바꿔 일궈놓은 자신의 집안을 위해서 죽인 것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한 가지 딴지를 걸자면 우리나라의 신분제도는 일제에 의한 반상철폐부터 시작하여 1949년 이승만 정부의 토지개혁 및 한국전쟁으로 인해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소작인이 자신의 신분 상승을 위하여 주인집의 꼽추 딸을 유혹하고 그 동생을 살해하는 설정은 좀 무리한 것이 아닐까 싶다. 뭐 그렇다고 작품의 흥미를 잃어버릴 정도는 아니고 내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사실 표면적으로 토지개혁에 따른 대지주는 없어졌지만 누대를 이어온 주종관계가 하루아침에 없어질 것인가. 

[여담] 내 고향의 경우 집성촌인데 종갓집이 따로 있었다. 10대도 아닌 9살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났지만 할아버지댁이 그대로 있어 10대 시절 방학 때면 가기도 했었는데 그때 종갓집 어른들을 볼 때 느낌이 뭔가 당당한 모습이라는 거였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도 소작농이었다가 토지개혁 덕분에 자작농이 되신 게 아닐까 싶는 생각이 나이가 들어서 들었다. 
2. 홍성원 작가의 대하소설 "남과 북"에 보면 지주였던 우노인네 집안이 한국전쟁기에 몰락하고 대신 머슴 집안이던 박한익네가 득세하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소작제가 철폐되었지만 상전으로 모시던 것까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 내용이 나오는 거로 기억하고 있다. 하긴 박경리 작가의 토지란 작품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주인공 서희와 머슴 길상이 맺어지지 않는가. 아무튼 이 작품은 신분제 폐지의 극단적인 사례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참고] 밤의 그늘:저자 이서진 |이란 작품도 이런 범주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소개

《선량한 시민》으로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작가 김서진의 두 번째 장편소설 『2월 30일생』. 충동적으로 저지른 살인과,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마치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현 세태와 왜곡된 인간 심리를 서늘하게 그려낸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는 2월 30일, 존재할 수 없는 날에 태어난 한 여자의 죽음을 통해 60년 전 현대사의 비극과 한 집안의 어두운 비밀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방송국 피디 현재는 가족 행사로 J시의 고향 집에 내려와 있다 뜻밖에도 얼마 전 헤어진 연인 혜린을 만난다. 혜린이 앙심을 품고 자신을 협박할 목적으로 고향 집까지 쫓아 내려왔다고 생각한 현재는 불같이 화를 내고 술에 잔뜩 취해 귀가한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혜린이 주검으로 발견되고, 현재는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그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정작 혜린이 죽던 날 필름이 끊겨 그녀와 함께했던 마지막 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눈[雪]의 감촉
내가 범인일까?
오래된 신문, 흘러간 사건
다시 살아나는 사람
불놀이
이화에 월백하고
한 남자와 네 명의 여자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
검은 너울
2월 30일생
그녀의 사진 한 장
이것은 꿈일까
어리석은 선택의 연쇄
마지막 한 점 불빛
그냥 지나가지는 않는다

작가의 말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나는 그제야 내가 용의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혜린이 어느 부랑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재수 없게 내가 연루된 것임을 경찰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결백의 근거는 빈약했다. 그것은, 나는 살인을 한 적이 없다는, 더욱이 혜린을 죽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는 믿음에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었다. 그 믿음은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경찰도 내 주장의 빈약한 근거를 눈치채고 있었다. (43쪽)

대길은 자신이 뿌리까지 비천한 존재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설령 대길이 이 전쟁 통에 살아남아 어떤 출세를 거듭하더라도 자신은 윤조와 같아질 수 없고, 윤조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불길이 옥석을 다 태워버린다면, 다 태워 재만 남게 된다면 그에게도 희망이 있었다. 그렇게 세상이 뒤집힌다면 그도 이 비천함에서 뒤집혀 완전히 다른 좌표에 처박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이조가 필요했다. (123쪽)

혜린이 무엇을 알아내려고 했든, 실제로 무엇을 알았든 간에 혜린의 죽음은 할아버지와 얽혀 있었다. 할아버지, 만리, 혜린, 그리고 나. 주요 인물 중 두 명의 여자가 같은 장소에서 죽었다. 한 명은 나의 연인이었고, 또 다른 여자 만리는 아마 할아버지의 연인이었을 것이다. (141쪽)

나에게 이성으로 주체할 수 없는 일탈의 욕구가 있다면 차라리 나는 할아버지처럼 당당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대를 거듭할수록 외양은 더욱 모범적이 돼가고, 욕망은 그에 비례해서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 어둠의 가장 깊은 곳에 혜린이 차가운 죽음으로 누워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죽음이 내 손으로 저질러진 것이 아니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143쪽)

네 할아버진 환갑이었지만 청년 같았어. 정말 욕심이 많은 양반이었지. 나도 욕심이 많지만 네 할아버지 같은 사람은 처음 봤어. 뭐든 탐을 냈고 탐나는 것은 다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양반이었어. 그런데 그게 네 할아버지의 매력이었어. 네 할아버지는 사실 J시 같은 좁은 곳에 살기에는 아까운 분이셨지. 본인도 그걸 알았어. 가끔 술을 먹으면 내가 고작 이런 데서 땅이나 사 모으려고 그 전쟁 통에서 살아 남은 게 아니라고 말했지. (173쪽)

이 이야기의 처음은 박대길이다. 혜린은 만리를 뒤쫓았고, 만리는 박대길을 뒤쫓았다. 박대길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의문이다. 그가 전쟁 통에 죽었는지 아니면 살았는지, 정말로 나의 고모할머니 이조와 달아났는지, 이조가 죽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 길이 전혀 없다. 만약 박대길이 살아 있다면? 만리가 만났던 또 다른 남자가 박대길이라면?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계속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80쪽)

욕망을 전염시키고, 충족시키고, 버려진 후에조차 끝없이 갈망하고 집착하게 만드는. 정작 스스로는 당신의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얼굴.
나는 그 얼굴이 혐오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항상 매혹당했고, 그 얼굴을 평생 의지해왔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유난히 불안하고 무서움이 많았던 나의 어린 시절, 그때도 내가 믿고 찾은 것은 항상 할아버지의 품속이었다. (190쪽)

나는 마치 신기한 부적을 보는 사람처럼 급여 서류에 적힌 혜린의 생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2월 30일생. 존재하지 않는 날짜. 결코 올 수 없는 내일. 혜린의 존재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256쪽)

그 사진을 당신이 보면 어떻게 될까? 당신이 우연히 그 사진을 보게 된다면, 그 사진과 함께 내 엄마, 만리의 의문스러운 죽음이 당신한테 알려진다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서커스를 보던, 언덕 위의 큰 집에 사는 소년은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어쩌면 가망 없는 사법적 처리보다 그것이 더 통렬한 복수가 아닐까, 나는 상상했지. 성기지만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하늘의 그물 같은 것을 내가 믿었는지도 모르지. 순진하게도. 어리석게도. (305쪽)

나에게 가장 큰 잘못이 있다면, 지난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나를 대신해 변명해줄 사람도 있겠지만 아니다. 내 잘못이다.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나는 내가 왔던 곳과 나를 이 세상으로 오게 만든 것에 대해 알았어야 했다. 저 먼 우주의 별들처럼 몰랐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까. (335쪽)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나에게 가장 큰 잘못이 있다면
지난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25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장소에서 죽은 두 여자
60년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한 집안의 비밀과 욕망의 얼굴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 작가 김서진의 두 번째 장편소설


『선량한 시민』으로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작가 김서진의 두 번째 장편소설 『2월 30일생』이 나무옆의자에서 출간되었다. 평범한 여성이 아무 이유 없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살인과,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마치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현 세태와 왜곡된 인간 심리를 서늘하게 그려낸 소설『선량한 시민』은 치밀한 스토리와 연속되는 반전,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로 독자를 사로잡았으며 이는 다음 작품에 대한 높은 기대로 이어졌다. 작가는 자신의 관심사와 역량을 더 힘껏 밀어붙여 또 하나의 추리소설 『2월 30일생』을 내놓았다. 2월 30일, 존재할 수 없는 날에 태어난 한 여자의 죽음을 통해 60년 전 현대사의 비극과 한 집안의 어두운 비밀을 집요하게 파고든 역작이다.
이 소설은 또한 소설NEW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소설NEW는 뉴웨이브(new wave) 문학을 지향하는 나무옆의자의 새로운 소설 시리즈로,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중간소설(middlebrow fiction)을 의미한다.

그녀가 죽었다. 정말로 내가 범인일까?
방송국 피디 현재는 가족 행사로 J시의 고향 집에 내려와 있다 뜻밖에도 얼마 전 헤어진 연인 혜린을 만난다. 혜린이 앙심을 품고 자신을 협박할 목적으로 고향 집까지 쫓아 내려왔다고 생각한 현재는 불같이 화를 내고 술에 잔뜩 취해 귀가한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혜린이 주검으로 발견되고, 현재는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그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정작 혜린이 죽던 날 ‘필름이 끊겨’ 그녀와 함께했던 마지막 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범행 동기는 충분하고 알리바이는 입증하지 못하는 상황. 공교롭게도 인근의 부랑자가 범행을 자백하면서 현재는 풀려난다. 그러나 세간의 시선은 여전히 그를 진범으로 보고 있고, 죽기 전 혜린의 행적도 의문투성이다. 그녀는 무슨 이유로 J시에 왔으며 왜 죽어야 했는가. 정말로 내가 범인일까? 이것은 현재가 풀어야 할 숙제이자 독자의 의문이기도 하다.
현재는 자신을 취조했던 최 형사로부터 혜린이 죽기 전에 ‘만리’라는 여자에 대해 묻고 다녔다는 것과, 혜린의 언니 정희로부터 혜린이 ‘박대길’이라는 인물을 찾아다녔다는 정보를 얻는다. 만리는 25년 전 혜린이 죽은 곳과 같은 장소에서 숨진 여인으로, 그녀의 죽음은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해 자살로 처리됐다고 한다. 박대길은 할아버지 집안의 머슴으로 6?25 때 할아버지를 보도연맹으로 몰아 위험에 빠뜨렸고, 전쟁 당시에 동네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었다. 현재는 최 형사와 정희가 무언가를 감추면서 혜린과 만리의 죽음의 진실에 대해 자신에게 암시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인 것 같았다.

과거는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내버려두어도 스스로 일어난다
현재의 할아버지는 J시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독립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온갖 풍상을 겪다가 J시에서 치과의사로 성공하여 명망 있는 지역 유지가 되었다. 그는 조폭부터 경찰까지 모두와 호형호제하며 지냈고, 부인이 있음에도 여러 여자들과 거리낌 없이 연애를 했으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 간통으로 고소를 당해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뭐든 탐을 냈고 탐나는 것은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양반.” 그것이 매력으로 간주되는 사람. 특히나 6?25 때 꼽추였던 누나 이조를 업고 야반도주한 이야기는 하나의 영웅담으로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J시 사람들의 욕망의 투사체였다. 그런데 호탕하고 거침없는 그도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장본인인 대길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이야기하길 꺼린다.
만리의 사건을 다시 조사하던 현재는 정희가 만리의 딸이고 당시 이순옥이라는 동거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리가 죽고 혜린이 태어났으니 정희와 혜린은 친자매간이 아니었다. J시에서 유명한 다방 마담이었던 만리는 할아버지와도 가깝게 지낸 것이 분명했다. 만리와 대길, 할아버지와 관련된 과거의 인물들. 혜린은 왜 그들을 찾아다녔고, 혜린과 정희는 어떻게 자매가 됐으며, 이순옥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한편 현재는 박대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가 지역 사학자를 만난다. 사학자는 6?25 때 할아버지 고향에서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박대길이 할아버지를 보도연맹원으로 몰아간 사실, 박대길이 할아버지의 누이 이조를 탐냈다는 이야기, 박대길의 죽음, 그리고 이후 사람들 사이에 떠돈 박대길이 살아 있다는 소문을 세세히 말해준다. 그리고 87년에 한 여자가 대길을 찾아왔었다는 마을 사람의 이야기까지 확보한다. 박대길에 대해 알아볼수록 현재는 죽은 박대길이 살아나고 있음을 느낀다. 아니, 그는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는 혜린의 죽음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박대길이라는 이름은 나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그는 수십 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혜린이 그를 찾으려 했다는 말일까. 마치 귀신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오랜 시간 억눌려 있던 땅기운이 꿈틀거리며 그 사악한 힘을 토해내듯 나는 뭔가가, 아주 불길한 뭔가가 긴 시간을 뚫고 튀어나오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_본문에서

소설은 과거의 사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몇몇 장(章)에서 현재를 화자로 삼은 1인칭시점에서 대길을 초점화자로 삼은 3인칭시점으로 바뀌어 과거의 시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정희의 유서로 이루어진 장은 이제까지 밝혀진 사실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듯이 모든 인과관계와 사건의 연쇄를 해명해준다. 퍼즐은 모두 맞춰지고 과거는 복원되었다. 그러나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의 욕망이 부른 비극과 이를 구원하는 윤리적인 선택
소설에는 가족 삼대가 등장하는데, 대범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할아버지와 섬세하고 모범적인 손자의 유대는 부자간보다 깊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부러워한 모든 것을 손자에게 주었고 손자가 살아온 삶의 모든 과정을 자기 일처럼 지켜보며 사랑했다. 손자도 할아버지의 거침없는 솔직함과 당당하게 욕망을 드러내는 모습에 혐오보다는 매혹을 느꼈다. 이들은 서로의 치부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두 사람은 대립할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는 과거를 지우려 하고 손자는 과거를 똑바로 불러내 사실을 밝힐 것을 요구한다. 마치 낡은 세대와 신세대의 대결처럼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팽팽하게 대립하는 조손간의 모습은 소설의 주제를 함축한다. 할아버지는 끝까지 과거를 부정하고 거짓에 무감각하지만 손자는 자신의 죄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 역시 죄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연인을 끝까지 기억하는 길,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혜린의 얼굴도, 목소리도, 그 작고 야윈 몸도 희미해지겠지만, 모든 것이 다 흔적도 없이 지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끝까지 혜린은 내가 사랑했던, 나를 미치도록 흥분하게 만들었던 그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할아버지와는 다른 나의 방식이다. _본문에서

작가는 한 여자의 죽음을 통해 현대사의 비극과 한 집안의 어두운 가족사를 60년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촘촘히 엮었다. 빈틈없이 이야기 구성으로 독자의 예측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긴장의 끊을 놓지 못하게 하는 솜씨는 놀랍다. 게다가 치밀하게 서사를 구축하면서 우리에게 과거란 무엇이고, 기억은 믿을 만한지, 개인의 굴절된 욕망이 어떤 비극을 부르는지를 끈기 있게 묻고 답한다. 작가는 “전부터 나는 지독한 악당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 만들고 싶었다.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 나는 그가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면서 오히려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인물이기를 바랐다. 동시에 그는 우리 시대의 어떤 분위기, 어떤 핵심을 드러낼 수 있어야 했다. (……) 외람되지만 나는 『태평천하』의 윤직원이나 『삼대』의 조의관 같은 인물을 만들어보고 싶었고, 그를 통해 우리의 현대사 60년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욕망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다. 『2월 30일생』은 작가의 희망과 독자의 기대를 만족스럽게 성취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추천사]

‘2월 30일’은 존재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런데 그날 태어난 사람이 있다. 『2월 30일생』은 우리가 가진 ‘기억’이 과연 실재한 것에 대한 기억인지, 혹 우리가 잘못된 기억을 진짜인 양 믿고 있는 건 아닌지를, 섬뜩하게 물어온다. 후미진 천변에서 살해된 여자가 나의 연인이었고, 그 범인이 ‘나’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섬뜩함은 공포 이상의 것이다. 존재할 수 없는 시간에 태어난 한 여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에 드리워진 어두운 개인사적 그늘을 집요하게 파고든 『2월 30일생』은 추리소설의 문학적·미학적 성취라 할 만하다._하창수(소설가)

2월 30일생,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날에 태어난 여인. ‘현재’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그녀를 사랑했고, 잃었다. 그리고 뒤늦게 그녀가 누구인지, 과거를 파고든다. 현재가 두려워하는 것은 언제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과거, 우리들의 처참한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알게 된다.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과거를 지워버리려는 헛된 시도라는 것을. 『2월 30일생』은 한 여인의 죽음을 통해, 그 이전의 숱한 죽음들을 통해 지워졌던 개인의 역사를 복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뒤틀린 사랑까지도 복원한다. 슬프지만 긍정적이고, 유일한 개인의 구원을 찾아내는 힘 있는 소설이다._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