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도서관 ♣/[참고용 책]

[일본인이 쓴 한국전쟁 관련 책 두 권]한국전쟁사/한국전쟁에서 싸운 일본인

Bawoo 2023. 11. 20. 11:34

 

저자:와다 하루키
출간:2023.7.26.
 
[소감] 일본인이 쓴 한국전쟁사라는 소개를 보고 읽어 본 책. 한국전쟁사에 관하여는 워낙 많은 책이 나와있기 때문에 혹시 특이한 내용이 있을까 궁금해서였는데 참고용으로 분류하여 필요한 내용만 찾아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소개

전쟁은 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각국은 무엇을 위해 전쟁을 했는가.
전쟁은 국제 질서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좌우의 논리를 넘어 제3자적 시점에서 한국전쟁의 전모를 낱낱이 밝히다!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멈춘 지도 어느덧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간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리고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는 등 몇 차례 화해 무드가 조성되기도 하였으나, 남북 관계는 여전히 갈등과 대립을 지속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평화보다는 전쟁 쪽으로 무게가 더 기울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전쟁을 재고찰하고 그 결과와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한반도에 평화를 구축하고 새로운 세기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일이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은 왜 남침을 계획했을까? 미국은 북한의 침략 계획을 몰랐을까? 미국이 원했던 것은 한반도 통일이었나, 현상 유지였나? 남북한, 미국, 소련, 중국, 일본, 타이완은 한국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중국은 이 전쟁을 왜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라 주장했을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한국전쟁의 전모에 상당히 근접할 수 있다.

한국전쟁 관련 기밀 자료는 소련이 해체된 1990년대 이후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 국내외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수많은 연구가 나왔으나, 한국전쟁의 전모를 종합적으로 다룬 ‘전사(全史)’라고 할 만한 것은 드물었다. 한국전쟁에 관여한 여러 국가의 언어로 된 사료를 해독하고 이해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와다 하루키는 당사국인 남북한은 물론, 중국, 소련, 미국, 일본 등 관계국 자료를 해독할 수 있었기에 고른 관심을 연구에 충분히 반영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국 국무부와 첩보 기관의 기밀문서, 암호전보, 러시아(구소련)와 중국의 전쟁 관련 자료, 미국이 노획한 북한 자료 등 지금까지 공개된 수많은 자료를 총망라하여 한국전쟁의 전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 냈다. 이 책은 저자 스스로 “내가 한국전쟁을 주제로 내는 마지막 책이 될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각고의 노력이 오롯이 담긴 한국전쟁 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이자 미국 우드로윌슨국제학술센터 연구책임자인 캐스린 웨더스비는 이 책을 “지금까지 출판된 한국전쟁사 서적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며 균형 잡힌 책”이라고 호평했다. 한국전쟁의 전모를 진보와 보수의 논리가 아니라 오로지 1차 사료에 근거하여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71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연구서지만, 한국전쟁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어 마치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한국전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책이 될 것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저자

와다 하루키 대학교수,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는 1938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한 후 1998년까지 도쿄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및 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도쿄대학교 명예교수, 도호쿠대학교(東北大学) 동북아시아연구센터 방문교수다. 러시아사·소련사, 조선사·현대북한사 등 동북아국제관계사가 주요 연구분야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민주화운동일본연대회의(韓國民主化運動日本連帶會議)와 연대위원회(連帶委員會)에서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아시아여성기금의발기인, 운영심의회위원, 이사, 전무이사,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2016년부터는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日朝?交促進國民協會)의 이사 및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니콜라이 러셀: 국경을 초월한 나로드니키』(1973),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1992), 『역사로서의 사회주의』(1994), 『한국전쟁』(1999), 『북조선』(2002),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2004), 『한일 100년사』(2015),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2013), 『북한 현대사』(2014), 『‘평화국가의 탄생: 전후 일본의 원점과 변용』(2015), 『스탈린 비판 1953-1956년』(2016),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2016),『러시아혁명, 페트로그라드 1917년 2월』(2018), 『아베 수상은 납치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2018) 등이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한국어판 서문
추천서
머리말

제1장. 1949년의 위기
- 두 국가의 탄생과 무력통일론
- 한국 측의 월경 공격
- 북 대표단의 소련 방문
- 한국군 북침 정보
- 중공군 양쯔강을 넘다
- 조선인 부대 인도 교섭
- 국경 충돌, 본격화하다
-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결성
- 한국군의 우세
- 조국전선 결성대회
- 미군, 철수를 완료하다
- 옹진 전투
- 북의 의지 표명
- 모스크바의 계속된 불허
- 남한에서의 빨치산 활동
- 소련의 대일 정책 변화
- 북측의 은파산 탈환 작전
- 한국의 타진과 진정

제2장. 개전으로 향하는 북한
- 중소 정상회담
- 애치슨 연설의 반향
- 김일성의 필사적인 호소
- 스탈린의 승인
- 개전 준비의 본격화
- 김일성과 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
- 김일성과 박헌영의 베이징 방문
- 준비에 박차를 가하다
- 인민군 각 사단의 배치
- 전야의 미국
- 전야의 한국

제3장. 북한군의 공격
- 공격 개시
- 한국군의 응전과 정부의 서울 포기
- 인민군 서울을 점령하다
- 미국의 반응
- 소련의 움직임
- 미국 참전하다
- 개전과 일본
- 개전과 타이완
- 미국 참전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반응
- 조선인민군의 진격과 미군의 응전
- 점령지의 북한화
- 인민군, 벽을 깨지 못하고
- 일본 외무성과 평화문제담화회
- 미군, 인천에 상륙하다
- 서울 철수와 원군의 요청
- 총퇴각하는 인민군

제4장. 한미군의 북진과 중국군 참전
- 한미군의 북진
- 중국, 참전을 토의하다
- 저우언라이의 소련 방문과 중국의 출병
- 일본인의 전쟁 참여
- 평양 함락
- 중국군 압록강을 넘다
- 한미군의 퇴각
- 북중군의 평양 해방
- 미국의 충격
-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휴식할 것인가
-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 서울 재점령
- 미국의 동요와 일본의 분위기
- 강경한 마오쩌둥
- 북중군 고급간부연석회의 전후

제5장. 정전회담을 하면서 하는 전쟁
- 미국과 소련의 태도
- 중국군의 제5차 전역
- 대일 강화 준비
- 한국 내정의 위기
- 소련의 정전 중개 움직임
- 김일성과 가오강의 소련 방문
- 정전회담 준비
- 정전회담의 개시
- 남북 지도자의 심정
-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 일본공산당
- 한반도 특수와 일본
- 한일 예비회담
- 한반도의 전쟁 상황과 정전회담 재개
- 김일성의 당 장악
-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정전회담

제6장. 3년째의 전쟁
- ‘세균전 반대’ 캠페인
- 일화평화조약 체결
- 김일성, 즉시 정전을 희망하다
- 부산 정치 파동
- 저우언라이의 소련 방문
- 스탈린,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교하다
- 두 가지 패배
- 책임 추궁
-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최후 협상

제7장. 정전
- 스탈린의 죽음
- 교섭의 재개
- 교섭의 진전과 한국의 저항
- 타결로
- 미국의 설득
- 정전 전날 밤의 북한과 소련
- 정전협정의 조인
- 정전협정 체결 후 각국의 반응
- 인적 피해와 포로의 운명
- 정전협정 체제의 출현

제8장. 한국전쟁 후 동북아시아
- 한반도의 남과 북
- 미국
- 소련
- 중국
- 타이완
- 일본

미주
일본어판 후기
역자 후기
지도
화보
색인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6월 21일 시티코프는 더 결정적인 전보를 보냈다. “김일성은 남조선 방송의 수신 및 정보원의 보고를 토대로 남측이 조선인민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구체적으로 포착한 듯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남측은 군대의 전투력을 높일 방책을 짜고 있다. 방어선을 강화하고 옹진반도 방향에 추가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 김일성은 원래의 작전 계획을 변경해 분할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미국에 간섭할 명분을 줄 수 있으니 상륙부대의 수송에 소련 해군을 투입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전선에서 공격한다는 김일성의 안을 최종적으로 지지했다.
- 제2장 개전으로 향하는 북한 _ ‘인민군 각 사단의 배치’ 중

오후가 되자 채병덕 참모총장은 남쪽의 3개 사단을 급히 불러들여 반격 태세를 갖추는 구상을 짰다.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채 총장의 보고로 북한군의 전면 공격을 확인하고 정부가 대통령령에 따라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한국군은 서울의 북쪽에서 필사적인 항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이날 밤 의정부 코앞까지 북한군이 밀어닥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밤 단독으로 정부를 대전으로 옮긴다는 결정을 내려 장관들과 무초 대사를 경악하게 했다. 무초 대사는 서울 잔류를 설득했으나 이 대통령은 개인의 안전은 문제가 안 된다, 정부는 포로가 될 위험을 무릅써서는 안 된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26일 오후 1시 의정부가 함락되자 서울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 이 대통령은 27일 새벽 서울을 탈출했다. 남은 신성모가 총리를 대행하고 비상국무의회를 열어 정부를 수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서울을 탈출한 이 대통령의 목적지는 대전이 아니라 국토 남단의 해군 기지 진해였다. 그러나 대구까지 왔을 때 너무 멀리 도망쳤다고 반성한 대통령은 대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 제3장 북한군의 공격 _ ‘한국군의 응전과 정보의 서울 포기’ 중

하지만 사회당의 입장은 일부 국민 사이에서 확고한 지지를 얻어 냈고 평화문제담화회의 의견은 지식인층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요시다 정부조차 한국전쟁에 대한 “정신적 협력”만을 읊조리는 현실에서 실질적 협력은 비공개적으로 강요됐고 국민에게 지지를 구하지도 않았다. 일본 국민의 전쟁 경험에서 파생된 전쟁과 군대에 대한 혐오감은 그만큼 강렬했다. 한국전쟁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어느 전쟁에도 협력하고 싶지 않다는 현실 반발적인 국민감정이야말로 유토피아적 평화주의 담론을 뒷받침했으며, 요시다 노선을 저변에서 떠받쳤다. 또 이러한 감정은 일본 국민이 한국전쟁 중에 경제 붐에 몰입하도록 부추겼다. 한국전쟁은 전쟁 기지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일본인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국토와 몸을 내맡기면서도 머리로는 휩쓸리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 제3장 북한군의 공격 _ ‘일본 외무성과 평화문제담화회’ 중

바로 이 타이밍에 미군은 다시 평양 대공습을 감행했다. 8월 29일, ‘모든 유엔 공군의 노력’이라고 이름을 붙인 작전이 시작됐다. 오전 9시 30분부터 시작하여 4시간 간격으로 오후 1시 30분, 5시 30분 3차례에 걸쳐 함재기와 제5공군기가 총 1,403회 출격했다. 이것은 7월 11일의 공중 폭격을 웃도는 것이었다. 밤에는 가데나의 B-29 폭격기 11대가 출격해 폭격했다. 평양은 완전히 파괴됐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폭격을 받은 수도는 세계 역사상 없었다. 소련 공군도, 고사포부대도 완전히 무력했다. 공격하는 측과 수비하는 측의 힘 관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공중 폭격을 받은 도쿄보다도 더 비참했다고 할 수 있다.
- 제6장 3년째의 전쟁 _ ‘스탈린,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교하다’ 중

이승만이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다시 한번 당찬 반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7월 1일 로버트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미국이 정치회담이 실패할 경우 한반도의 통일이 이뤄질 때까지 우리와 함께 전투를 재개하겠다고 분명히 약속해 준다면, 우리는 정전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합의에 매우 가까워진다.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정전과 관련하여 당신의 요구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현재와 같은 정전 조건에 명확하게 반대하고 있는 한국 국민을 설득할 수단이 없다.”
이는 도를 넘는 것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로버트슨은 이승만의 이러한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사명은 끝났다고 생각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 제7장 정전 _ ‘미국의 설득’ 중

베이징에서는 7월 29일 중산공원 음악당에서 4,500명 규모의 각계 인사가 참여한 조선 정전협정 조인 경축 대회가 열렸다. 중국인민항미원조총회 주석 궈모뤄가 연설했다. 마오쩌둥은 9월 12일 중앙정부 인민위원회에서 펑더화이의 보고를 들은 뒤 강연에서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는 위대하며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라고 선언했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38선까지 적을 밀어내고 이를 지켜 냄으로써 압록강과 두만강(도문강)에서 전선을 멀리 떨어트려 동북 지방의 불안을 해소한 것, 둘째, 군사적 경험을 한 것, 미국 군대와 33개월을 싸워 그 속사정을 충분히 알게 됐고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 셋째, 전국 인민의 정치적 각오를 높인 것, 넷째, 그 결과로 “제국주의의 새로운 중국 침략전쟁을 늦추고 제3차 세계대전을 늦췄다”라는 것을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의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혁명 중국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아 국제사회에서 시민권을 확보한 것은 커다란 성공이었다.
- 제7장 정전 _ ‘정전협정 체결 후 각국의 반응’ 중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개전부터 휴전까지, 사료에 근거하여 한국전쟁을 입체적으로 그려 내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본의 불법 점령에서 벗어났다. 그 기쁨도 잠시, 냉전체제 속에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양국에 의해 남북으로 분할 점령되었고, 결국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서로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 국가라고 주장하는 두 개의 국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면서 분단이 공식화되었다. 중국과 소련의 원조로 군사력을 갖추게 된 북한은 국내외 정세 변화에 고무되어 무력통일을 기도했고,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남침을 감행했다. 이렇게 한반도 안의 특수한 내전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유엔군, 중공군까지 참전하며 국제전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소련의 스탈린은 크렘린궁에서 비밀리에 전쟁을 지휘했으며,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리면서 미국의 병참 기지 역할을 했다. 타이완은 한국전쟁에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미국으로부터 자국의 안전을 충분히 보장받는 등의 이익을 누렸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간의 전쟁인 동시에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전쟁이기도 했던, 다양한 국가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던 전쟁이었다.

와다 하루키는 한국전쟁을 ‘동북아시아 전쟁’으로 규정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을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전쟁의 발발 배경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방대한 자료에 근거하여 빈틈없이 제시하고 있다. 김일성이 스탈린을 집요하게 설득해 남침 승인을 받아내는 과정, 1949년 말까지 김일성의 남침 제안을 거절했던 스탈린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게 된 배경, 북한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준비하고 1950년 6월 25일 군사작전을 시작하는 구체적인 과정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는 과정, 소련 공군이 중공군으로 위장해 참전했던 이유와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전진을 멈춘 이유, 정전협정을 둘러싼 북한과 중국, 소련의 갈등, 소련과 북한이 실패로 끝난 한국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내부에 적을 만들어 책임을 전가하는 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그러면서도 이승만 발언, 미국 문서 등을 토대로 이승만 역시 무력으로라도 통일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북한과 별 차이가 없었음에 주목하여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승만이 독자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등 미국과 충돌한 양상, 미국이 한때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물러나게 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 이승만이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과정도 기술되어 있다. 또한 한국전쟁에 관여한 각국 지도자들의 정책 결정 과정뿐만 아니라 개인적 심리 상태와 스타일까지 엿볼 수 있다.

남북한은 무엇을 위해 전쟁했고, 각국은 무엇을 위해 전쟁에 개입했는지, 한국전쟁이 남북한 그리고 미국, 소련, 중국, 일본, 타이완에는 어떤 의미였는지, 전쟁은 이후 세계 구조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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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후지와라 가즈키
출간:2023.5.2
 

[소감] 한국전쟁 시기 일본인이 참전한  기록은 원산만에 설치되어 있는 기뢰를 제거하는데 민간인 신분으로 참여했다가 기뢰가 폭발하여 일부 사망-22명-했다는 통사에 나와있다. 이 책에서는 이 내용 외에 일본 주둔 미군부대에 생계유지를 목적으로 군속으로 근무하다가 부대가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같이 간 기록이 들어있다. 공식적인 전투병이 아닌 미군의 보조인력으로. 내용을 보니 각자의 삶이 한 권의 책으로 써내도 될 정도의 사연을 담고 있다. 그러나 굳이 정독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차를 보고 필요하다 싶은 내용만 참고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

책소개

일본이 참전하지 않았던 한국전쟁에서 무기를 지니고 싸운 일본인 70명이 있었다.
역사로부터 지워졌던 그들, 1994년 기밀 해제가 된 'TOP SECRET' 1급 기밀문서에 그들의 존재가 은폐되어 있었다.
70명의 일본인들은 누구였고, 어떻게 한반도로 들어왔으며,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 또한 전투원으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심문까지 받고 수십 년간 실상마저 감춰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저자

 
후지와라 가즈키

저자 : 후지와라 가즈키
藤原和樹, Fujiwara Kazuki
2009년 NHK에 입사했으며 현재 보도국 사회프로그램부 디렉터이다. 주요 담당 프로그램으로는 NHK 스페셜 〈김정은의 야망 1집-폭군인가 전략가인가 금단의 실상〉, 〈클로즈업 현대+시리즈 -미국 중간 선거 ① 알려지지 않은 트럼프식 SNS 전략〉, 〈NEXT 미래를 위하여-헌화 그 앞에서 가와사키 중학교 1학년 남자 살인 사건〉 등을 기획했다. 공저로 『AI vs. 민주주의』(NHK출판 신서), 『사토미 자본론』(카도가와 신서)를 펴냈다.

역자 : 박용준
朴龍準, Park Yong-jun
2013년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문화체육관광부의 영화인문학 교육을 수료하고 역사와 관련된 책, 영화 등 다양한 미디어를 소재로 연구 및 집필 활동을 계속하였다. 전라남도에서 첫 교편을 잡았으며, 현재는 광주광역시에서 중등 역사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교육 교류, 주변국과의 역사 분쟁에 관심을 갖고 관련 연구회 및 관계기관에서 활동하고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프롤로그 그들은 역사로부터 지워졌다 7
제 1장 1,033쪽의 극비 심문 기록 15
한국전쟁의 간략한 역사 17
한국전쟁은 일본에서 어떻게 알려졌는가 20
퍼즐 같은 1,033쪽 22
미군 기지의 섬, 일본 26
다카쓰 겐조 발견 27
남겨진 회고록 31
소년 시절 일본군에게 품은 불신 35
세계 최빈국, 일본 39
미군 장병은 상냥했다 41
점령군 기지에서 보낸 나날 42
밀항하여 한반도로 44
“많은 사람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46장진호 전투 49
퇴각, 그리고 귀국 52
“다시 한번 한반도에 가고 싶나?” 54
‘최고 기밀’이 된 일본인들 56
누락된 역사 58

제2장 대전 전투_후쿠오카에서 한반도로 향한 사나이들 61
가장 많은 일본인이 참가한 대전 전투 63
우에노 다모쓰를 찾아서 65
군사도시, 고쿠라 68
아들과의 해후 69
캠프 코쿠라에서 일한 두 남자 71
대전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의 전직 미군 장병 75
대전은 ‘완전한 카오스’였다 80
싸워야 할 이유는 동료의 죽음에서 생겨난다 86
“피난민을 죽였다” 전직 미군 병사의 증언 88
제34보병연대의 궤멸 90
대전에 있었던 니시토자키의 일본인들 92
히라쿠라 요시오 “이렇게 죽는구먼” 95
이노우에 준이치 “미군과 똑같이 취급받았다” 98
아리요시 다케오 “대전에서 함정에 빠졌다” 102
아리요시 다케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104
야마사키 마사토 “전쟁…… 무섭습니다.” 108
우에노의 그 후, 딘 소장과의 재회 110
아들은 무엇을 이야기했는가? 112

제3장 고아들은 미국을 동경했다 115
일본의 고아들 117
열두 살에 전장에 선 일본인 120
두 차례의 대전에 농락당한 소년 123
“그는 공산주의자를 증오했습니다” 126
여동생과 생이별, 그리고 귀국 128
다시 한반도로 133
일본인 포로, 쓰쓰이 기요히토 135
쓰쓰이가 귀국한 사실은 어떻게 보도되었는가? 138
너무도 상냥했던 오빠 139
특공 훈련생 142
“미국, 이 새끼들” 149
‘모험심’으로 갔다 150
수용소에서 벌어진 학살 152
수용소에서 보낸 편지 155
귀국 후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 157
쓰쓰이는 미국인이 되었다 159
어머니를 향한 마음 162

제 4장 그들은 왜 이용되었는가_일본·미국·한국의 의도 165
전부 미국의 오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67
실전 경험 없는 젊은이들 170
통역 사와가시라 로쿠조 173
상관의 권유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175
“당신들이 처음이랍니다” 178
인원 부족 메우기 179
일본인도 ‘공식으로’ 표창받았다 181
미군 통역이 밝힌, 심문이 행해진 이유 182
전승국의 교만 186
“정신적으로 협력한다”187점령군을 위해서인가,
유엔군을 위해서인가 190
경찰예비대로 오라는 권유 192
해상보안청에 의한 기뢰 소해 194
“전투에 종사한 것이 아니라, 소해에 종사했다” 198
일본의 독립과 조선 특수 200
일본에 남은 유엔군 후방사령부 203
북한·소련의 항의 205
일본에서 행해진 한국군 병사의 극비훈련 207
일본의 전쟁 협력을 인정할 수 없었던 한국 210
새로운 한일관계를 위하여 213
북한과 국교 정상화를 할 수 없는 이유 215

제5장 평화헌법하의 해상수송_선원들의 전후사 217
22개의 빈 유골함 219
636호의 리더, 가토 게이지 221
두 차례의 침몰과 공습에도 살아남다 223
636호에 승선 225
은폐된 아버지의 죽음 228
위령제의 조사230생존자, 마쓰시타 아키라 233
636호는 침몰했다 235
남겨진 선원명부 238
일·미 당국은 어떻게 인식했는가 239
가나가와현의 갈등 243
유골 없는 무덤 245
LST 선원, 산노미야 가쓰미 247
허허벌판이 돼 버린 고향, 한국 250
“일본인이 여기에 있잖아!” 253
해상 수송은 베트남전쟁에서도 행해졌다 255
“헌법 9조 위반이 아니다” 259
베트남전쟁에서도 일본인 선원이 희생되었다 261
활용되지 못한 한국전쟁의 교훈 264
이라크 파견267자위대와 민간 페리 270
제6장 어느 일본인의 전사 273
Killed in action’그 사진 속에서는 총을 들고 있었다 278
가족의 자랑이었던 히라쓰카 시게하루 279
죽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뉴기니 281
페인트공 네오 히라쓰카 284
부고286다카쓰의 발견과 히라쓰카의 전사 289
범죄자 취급을 당한 아들 291
일·미합동위원회 각서 295
봉인해두었던 형에 대한 마음 300
행방불명자, 요시하라 미네후미 302
일본인 취사병 셋 303
만철에 있었던 세키 마사하루 306
요시하라의 죽음에 보이는, 은폐의 구도 307
“전쟁이라는 것은, 좋지 않아” 311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어디인가? 313
히라쓰카와 같은 부대원이었던 제이 히다노 319
맥클레인 대위의 수기 322
9월 4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324
“그는 범죄자 따위가 아니야” 327
한국으로32869년만의 재회 333
역사에 묻힌 ‘최초의 전쟁 협력’ 336

후기 339
연표 344
번역자의 말 347
주석 382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일본인 70명이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터가 된 한반도에 일본인 70명이 들어왔다. 이들은 미군과 동행하면서 실탄을 지급받아 직접 북한군 및 중국군과 교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후 미군 당국은 오히려 일본인 요원들을 엄중히 심문했으며, 이들의 존재 및 활동을 극비에 부치는 등 사실을 은폐했다.
그 과정에서 1,033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일급비밀(TOP SECRET) 문서가 작성되었는데, 기밀에서 해제된 후 일본계 호주인 교수가 최근에 그 존재를 파악하였다. 해당 교수와 접촉한 NHK 보도국의 후지와라 가즈키(藤原和樹)는 이 문서를 바탕으로 생존한 일본인 요원 또는 유가족들을 취재하였다. 그에 따라 70명의 일본인들은 누구였고, 어떻게 한반도로 들어왔으며,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 또한 전투원으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심문까지 받고 수십 년간 실상마저 감춰진 이유가 비로소 밝혀지게 된다.

한·일 관계의 가장 불편하고도 복잡한 역사
일본인들이 한국전쟁에서 미군을 도와 직접 전투에 나섰다는 사실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태평양전쟁으로 패망한 일본인들에게 한국전쟁은 ‘조선 특수(朝鮮特需)’라 불리는 전후 부흥 서사의 시작이자 일부였다. 그들은 경제 부흥으로 번영과 안정을 누리는 가운데, 전쟁을 일으키거나 개입하지 않겠다는 ‘평화헌법’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일본인들에게 자국 출신 요원의 한국전쟁 참가는 불편한 사실이다. 이는 일본이 ‘평화헌법’ 체제의 이면에서 이미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광복 이후 오늘날까지도 일제 강점기의 개인적, 집단적 기억이 지속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의 기억은 국군과 유엔군의 분전에 주목하는 견해, 아니면 동족 상잔에 주목하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 일본인 요원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렵다. 그것이 한국전쟁을 둘러싼 주요 논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인들은 그저 한국전쟁을 이용하기만 했을 뿐이어야 하며, ‘희생’되기까지 했다는 것은 한국전쟁의 ‘숭고하거나’ 혹은 ‘가슴 아픈’ 서사를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한국전쟁의 지상전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들 일본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립하기도, 그에 따른 평가를 내리기도 곤란하지만, 그것이 바로 한·일 관계의 복잡함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일본인들의 한국전쟁 참가는 전후 일본 정부가 미군의 점령 상태에 놓인 가운데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와 같은 구조는 이제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한반도 위기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이 인도·태평양에서의 미국 패권 동요에 대응하는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해외 미군 기지가 위치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및 타이완 해협 위기의 심화 속에서 군사적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과연 한국은 미국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게 될 것이며, 그때 시민들 개개인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때 한국은 자신들이 참전하게 될지도 모르는 전쟁에서 각국 정부 및 시민들 개개인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인가. 한국전쟁 시기 미국과 일본의 관계, 그 사이에 운명을 내던졌던 일본인들의 삶은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박용준ㆍ번역자)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