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haikovsky, Symphony No.4 in F minor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Valery Gergiev, conductor
Mariinsky Theatre Orchestra
2010
교향곡 4번은 차이콥스키가 38세 때인 1878년 1월 7일 이탈리아에서 완성했다. 차이콥스키는 그 1년 전인 37세 때 제자이며 부인이었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이혼한 뒤 그 쓰라림을 잊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 호반에서 요양하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상당히 힘든 상태였다. 이때 후원자 폰 메크 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교향곡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36세 때인 1876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시절, 차이콥스키는 <백조의 호수>를 발표하며 러시아 음악계에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이때부터 9살 연상의 부유한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의 경제적 원조를 받게 됐다. 폰 메크 부인은 러시아 최초의 철도를 건설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남편이 6남 6녀의 열두 자녀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자, 자녀들의 교육에 전념하며 조용하게 살아가던 부유한 미망인이었다. ▶폰 메크 부인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기 시작한 이듬해인 1877년 28세의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제자인 안토니나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는 안토니나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사회에서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동성애자’라는 소문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런 마음에 안토니나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원하지 않던 결혼생활은 2개월 만에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의 재정적 지원으로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에서 요양을 하며 실패한 결혼으로 생긴 극도의 신경쇠약을 치유하면서 작곡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차이콥스키는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 아닌 조건으로 자신을 도와주었던 폰 메크 부인과 13년간 12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우게 되지만 끝내 사랑의 결실로는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폰 메크 부인이 보내 주는 연 6천 루블의 연금으로 서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었다. 1891년에는 미국의 초청을 받고 뉴욕 카네기홀에서 지휘를 하는 등 많은 도시에서 공연해 갈채를 받았다.
Svetlanov conducts Tchaikovsky's Symphony No.4
Yevgeny Svetlanov, conductor
USSR State Symphony Orchestra
추천음반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가 지휘한 소비에트 국립교향악단의 1990년 5월 24일 도쿄 산토리홀 실황(Canyon Classics)은 연주의 강렬함과 녹음의 현실성이 이상적으로 결합됐다. 스베틀라노프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실황 사이클 가운데서도 최고 걸작 연주로 손꼽을 만하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연주(DG)는 1960년 유럽 투어 중 런던 웸블리 타운홀에서 녹음된 것으로, 정확한 디테일과 러시아적인 야성이 조화돼 있다. 카라얀이 DG에서만 세 차례(1960, 1970, 1980년대) 녹음한 음반들 가운데 고른다면 2 for 1으로 발매된 1976년 녹음이 가장 낫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이루며 탐미적인 시각으로 곡을 형상화했다. 끝으로 마리스 얀손스가 오슬로 필을 지휘한 1984년 녹음(Chandos)을 추천하고 싶다. 므라빈스키의 조수를 지낸 얀손스의 비범한 균형감각과 찬란한 피날레는 눈이 부실 정도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월간 <객석> 편집장 역임, 현재 (재)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거장들의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이 반복되는 삶이 마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