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개인의 삶이 곧 역사였던 시대를 살아낸 여인,
은하 혹은 아키코의 기록
주인공 고은하는 제주도에서 심방(무당)의 딸로 태어나 보통학교를 마치고 교사의 꿈을 키운다. 어렵사리 입학한 대구사범에서 어릴 때 잠깐 만났던 강인혁과 재회한다. 인혁은 지리산에서 이현상과 함께 활동하며 조선 해방과 사회주의 세상을 꿈꾼다. 자연스레 인혁의 길을 같이 걷게 된 은하는, 일제에 부역하는 친일 경찰 박병도에게 갖은 고초를 당한다. 그러나 곧 해방이 되자 지리산에서 내려온 은하와 인혁은 제주도에서 가정을 꾸린다. 둘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해방 정국의 뒤숭숭한 풍경 속에서 ‘뭍’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갈수록 흉흉했지만, 제주도에서는 그래도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일제에 부역했던 경찰 박병도가 다시 나타나는데...
이 작품은 회한이나 절망을 넘어 우리 민족의 맺힌 ‘한’을 풀려는 ‘신명’의 기록이다. 작가는 미려한 우리말 문장으로, 주인공 고은하의 기록을 통해, 제주도 씻김굿의 형식을 빌려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을 풀어낸다. 영개울림, 즉 죽은 이의 영혼이 되어 그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책 속에 고스란히 옮긴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우리 역사의 아픔이 아물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무수한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허구인지 사실인지 헷갈리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다시금’ 직시하게 한다.
[책 속으로 추가]
나는 구리 반지가 파랗게 물들어 이윽고 깊은 바다색이 될 때까지 애오라지 돌하르방만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다. 돌하르방이 짓궂게 약속의 징표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스스럼없이 돌하르방의 벗은 몸 위로 올라갔다. 다시 살아나는 돌하르방의 그곳을 내 속살로 감쌌다. _160쪽
제주도당은 이듬해 삼일절을 맞아 사회단체들과 기념행사를 기획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 뿌리 뽑기”와 “최고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 철회”,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만세!”, “민중 경제를 파괴하는 모리배 소탕”과 같은 구호를 내걸었다. 당원은 아니지만 돌하르방과 나는 백분 공감했고, 그날 대회에 참여했다.
1947년 3월 1일, 아침 일찍 집을 떠나 삼일절 기념 대회가 열리는 제주북국민학교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피비린내 나는 ‘운명의 날’이 열리리라고는 종작도 할 수 없었다. 기념식을 마쳤을 때 돌하르방과 내 마음은 넉넉해졌다. _181쪽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는 그날 새벽에 나는 참극을 뒤로 한 채 돌하르방과 오사카로 밀항했다. 일본으로 쫓겨 가는 배 위에서 아기를 잃은 슬픔에 나는 넋이 나갔다. _223쪽
민중들의 봉기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어지자, 이승만은 여수의 14연대 병력을 제주에 투입해 진압키로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파병을 거부하고 봉기했다. 1948년 10월 ‘제주토벌출동거부 병사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한 ‘애국 민중에게 호소함’ 제하의 성명서는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모든 애국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짓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라고 밝히고 ‘동족상잔 결사반대’를 외쳤다. _231쪽
괘꽝스러운 망구처럼 군말이 너무 길었다. 무릇 심방은 삼단계를 거친다. 단계마다 굿을 열흘 해야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 이 기록을 삼 부로 나누어 열 장씩 구성한 이유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적어온 한 문장, 한 문장은 나의 울음이자 서툰 굿이다. _328쪽
책소개
《코레예바의 눈물》로 2017년 이태준문학상을 수상한 손석춘 작가가 여섯 번째 장편소설 『파란 구리 반지』. 한국 문학은 90년대 이후 하나같이 개인의 욕망에 천착해왔다. 그러나 분단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작가’의 책무다. 손석춘 작가는 첫 장편소설 《아름다운 집》 이후 줄곧 이데올로기와 분단을 다뤄왔다. 2018년 제주 4·3항쟁 70주년을 앞두고 펴낸 이번 작품에서도, 우리 역사의 아픔을, 그 진실을 정면으로 들춰냈다.
일제강점기, 해방, 4·3항쟁, 여순항쟁, 한국전쟁과 분단.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어낸 제주도 여인 고은하. 작가는 그의 삶을 담담히 그리며 역사의 진실이 매도당하는 우리 현실을 고발한다. 해방을 맞았지만 친일파 청산은 없었고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한다. ‘윤똑똑이’ 지식인들을 향해 어쭙잖은 화해나 양비론을 들먹이지 말고 역사의 진실을 올바로 직시할 것을 작가는 일갈한다. 아물지 않고 덧나기만 하는 우리 근현대사의 상처를 ‘파란 구리 반지’라는 상징과 역사적 진실의 힘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한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1부 불란지 불
2부 돌하르방의 꿈
3부 쉬맹이
끌레기치송
본문에 나오는 낱말 뜻풀이
책 속으로
한쪽은 민주주의 껍질에 다른 쪽은 사회주의 껍데기에 갇힌 채 갈라진 조국의 과거에 얼마나 위대한 꿈이 약동하고 있었는가를 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이들만이 살인하고 살해당한 혼령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이 기록은 그 갈망의 갈무리다.
바라건대 그들이 촛불을 켜 이 깊은 죽음의 어둠을 밝혀주길. _10쪽
아베는 어린 아이처럼 금세 울상이 되었다. 가여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맡을 일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베는 손에 거머쥐고 있던 백 달러 지폐 열 장을 내밀었다.
자신의 성기를 만져달라는 말을 무람없이 건네는 늙은이가 역겨웠다.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추악한 인간에게 자꾸 그러면 간병을 그만두겠노라 선언하고 방을 나왔다. 점심 시각에 맞춰 다시 돌아가자 아베는 되록되록 뱀눈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_24쪽
내 고향 탐라에서 ‘돌부처’는 돌하르방을 이르는 말이었기에 내심 누구일까 궁금했다. 어린 시절 돌하르방은 다양하게 불렸다. 우리 마을에선 ‘무성목’으로 불렀는데, 어머니는 ‘미륵님’으로, 아버지는 ‘돌부처님’으로 깍듯이 공대했다. 하지만 오빠도, 나도, 마을 아이들도 발음하기 쉬운 ‘돌하르방’으로 불렀다. 어른들이 풍랑이나 역병, 또는 민란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하르방, 곧 할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에게 돌하르방은 공동체의 수호신 이전에 ‘나의 수호신’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구사범의 ‘돌부처’에게 관심을 돌릴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온 선생님 꿈을 이루려면 한눈팔 틈 없이 공부해야 한다고 다부진 결기를 모을 때였다. _36쪽
박정희의 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뭐? 개나 말처럼 충성을 다하겠다?” 돌하르방은 그 말에 이어 나에게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후배 눈엔 지금 우리 앞에 누가 있는 것 같아? 대구사범 선배인가? 왜놈에 충성하는 개인가?” 평소와 다른 돌하르방의 거친 언행이 익숙하진 않았다. 하지만 박정희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나 또한 찬찬히 똑똑 끊어 말했다. “이십 대 청춘이 그런 혈서를 쓴 게 사실이라면,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분명 개이겠지요.” 박정희의 눈은 독사처럼 번득였지만 흔들렸다. _73쪽
지리산에서 학습 시간에 이현상 선생의 강연을 처음 들은 순간이 생생하다. 학습장에 우레 박수를 받고 등장한 이현상은 날카롭되 따뜻한 눈매로 둘러본 뒤 말 문을 뗐다. “우리가 지리산에 온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로부터 쫓겨서가 아니오. 정반대로 그놈들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요. 동지들, 유격전이라 하면 누가 떠오르시오.” 둘러보던 이현상이 내 눈과 마주칠 때 시선이 멎었다. 나는 대구사범에 유학하기 전에 아버지가 구독했던 신문 《동아일보》에서 읽은 ‘김일성의 [보천보 습격 속보普天堡襲擊續報]’가 떠올랐다. 대구사범 시절 학습할 때도 논의한 바가 있었다. “김일성 장군요.” 이현상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동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_134쪽
8월 15일 아침, 이미 사흘 전 소련군이 함경도 웅기에 상륙작전을 감행했고 나진을 점령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미군이 제주도나 일본에 상륙한다는 정보는 아직 없었다. 우리는 전열을 가다듬고 8월 20일에 함양을 공격해 해방할 계획을 세웠다. 비장한 마음으로 하산 투쟁을 최종 점검하던 바로 그 순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라디오 방송이 의신마을에서 잡혔다. _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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