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곡인 Souvenir(우리나라에서는 추억이라고 번역) 또는 트로이메라이로 유명한 프란츠(프란티세크) 드르들라는 1868년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한 모
라비아의 자르(Saar)에서 태어나 1944년 잘츠부르크 인근의 바드 가슈타인(Bad Gastein)에서 세상을 떠난 바이올리니스 겸 작곡가이다. 그가 태어난 자르는 현재의 체코공화국에 속한 츠다르 나드 사차부(Zdar nad Sazabou)이다. 스키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드르들라는 체코의 음악가이지만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에 비엔나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본 블로그에서는 오스트리아 음악가로 분류한다. 드르들라의 체코식 이름은 프란티세크 알로이스 드르들라(Frantisek Alois Drdla)이다.
프라하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한 그는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 와서 비엔나음악원(현재의 비엔나음악-공연예술대학교의 전신)에서 요셉 헬메스버거로부터 바이올린을, 안톤 브루크너로부터 음악이론을, 프란츠 크렌으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하지만 드르들라의 음악은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듯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아름다운 민속음악에 기조를 두고 있다. 드르들라는 1890-93년간 비엔나궁정오페라(현재의 비엔나국립오페라)에서 바이올린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894-99년에는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의 콘서트 마스터로서 활동했다. 이후 그는 바이올린의 명연주가로서 1899년부터 1905년까지 유럽의 각지를 순방하여 연주회를 가졌고 이어 1923-25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의 연주기법은 매우 세련되고 감미로워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미국을 방문하고 비엔나로 돌아온 그는 오스트리아대통령으로붵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비엔나 23구 리징에는 드르들라를 기념하여 드르들라가쎄(Drdlagasse)라는 거리가 있다.
<드르들라가 태어난 모라비아의 츠다르 나드 사차부(좌)와 드르들라가 세상을 떠난 곳인 바드 가슈타인(우)>
드르들라는 세편의 오페레타, 한편의 바이올린 협주곡, 이밖에 여러 편의 오케스트라 작품과 두 편의 피아노 트리오, 그리고 수많은 바이올린 소품을 작곡했지만 작곡가로서의 명성보다는 후기 낭만파 연주가로서 더 많은 명성을 얻었다. 그의 음악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멜로디를 기조로 삼으면서 이를 비엔나 스타일로 표현한 것이었다. 대표작은 Souvenir(1904), Vision(1906), Hey, Hay!(1908) 등이다. 감미로운 애조를 띤 그의 바이올린곡은 전쟁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의 대표작은 여러 형태로 편곡되어 연주되었으며 거장 바이올리니스트들인 얀 쿠벨리크, 마리 홀, 미샤 엘만, 요셉 치게티 등이 음반으로 내놓아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페레타는 Zlata sit(황금 네트: 1916), Komtesa z prodejny(상점의 백작부인: 1917), Bohyne lasky(사랑의 여신: 1940)이다. Bohyne lasky(Die Gottin der Liebe)는 Zlata sit를 수정한 것이다. 협주곡으로서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바이올린 협주곡 D 단조(1931)가 있다.
Franz Drdla와 Souvenir (추억)
Souvenir(추억)을 작곡한 Drdla는 시간이 날때마다 빈의 중앙묘지(베토벤,슈베르트,브람스, 모차르트등이 잠들어 있음)를 찾아가 영원한 음악의 스승들과 마음의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멜로디가 바로 이 곡이다. 드르들라는 그 선율을 놓칠새라 떨어져 있는 낙엽을 주워 오선을 그리고 "추억"의 주제를 하나하나 심었다.
<비엔나 중앙공원의 묘지 - 왼쪽부터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그러나, 혹자는 낙엽이 아니라 구두 밑바닥에 오선을 그리고 추억의 멜로디를 적었다고도... 또는 슈베르트 묘지 앞을 전차 타고 지나다가 갑자기 떠오른 멜로디를 잊기 전에 메모하려고 손에 쥔 전차표에 적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그리움이 묻어나는 이곡은 드르들라의 이름을 후세에 남겨주는 대표작이 되었다.
Vaclav Hudecek, violin. Petr Adamec, piano. Videoclip for Supraphon CD "Souven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