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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모짜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4번 D major, K.

Bawoo 2014. 5. 21. 13:04

모짜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4번
Violin Concerto No.4 in D major, K.218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Mozart: Violin Concerto No. 4 in D major K. 218
Movements:
1. Allegro
2. Andante cantabile
and 3. Rondeau (Andante grazioso - Allegro ma non troppo)

 

이른바 「잘쯔부르크 협주곡」이라 불리는 5곡 중의 제4곡으로, 1775년 10월에 썼다.
전3악장은 발랄한 활기에 넘쳐 있고, 맨 처음에 나오는 주제가 마치 트럼펫에 의해 취주되는 행진곡을 연상케 해서 「군대 협주곡」이라는 칭호가 있다. 보케리니의 「D장조 바이올린협주곡」을 모델로 해서 이 곡을 썼다고도 전해진다.


제1악장 Allegro : 행진곡풍의 제 1주제.
제2악장 Andante cantabile.
제3악장 Rondo-Andante grazioso : 두 개의 주제가 교차한다.

 

보케리니의 'D장조 바이올린협주곡'을 모델로 곡을 썼다고도 전해지는 모짜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4번, 이른바 '잘즈부르크 협주곡' 이라 불리는 5곡 중의 제4곡으로 제3번이 완성된 바로 다음 달인 1775년 10월에 썼으며 전체 3악장의 구성이다.

 

전 악장이 발랄한 활기에 넘쳐 있고, 1악장에 나오는 서두의 주제가 마치 트럼펫에 의해 취주되는 행진곡을 연상케 해서 '군대협주곡'이라는 칭호가 있다. 악곡 구성에 있어서는 오케스트라와 독주 악기 등, 그 자체로서의 충실한 반주에 그치는 등 다소 단순한 성격을 지닌 곡이지만 모짜르트의 개성이 가장 잘 살아난 작품중 그 하나이기도 하다.

 

이 곡은 보케리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작곡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프랑스적인 기품과 향취에 넘치는 작품이다. 힘찬 리듬의 오케스트라에 의한 서주로 시작되는 알레그로 악장에 이어 안단테 칸타빌레의 중간 악장은 서정성 넘치는 노래가 부드럽게 흐른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노래는 바이올린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 계속된다. 마지막 론도 악장은 론도와 소나타 형식이 하나로 어우러진 특이한 악장이다. 첫 악장과 같이 활달하면서도 프랑스적인 기품에 차있는 피날레이다.

Mozart Violin Concerto N°4 in D major. David Oistrakh ( violin )

RAI Symphony Orchestra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David Fyodorovich Oistrakh) 바이올린연주가

  

생몰 : 1908년 ~ 1974년 10

출생 : 지러시아

경력 :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

 

 

20세기 서방세계에서 하이페츠가 그 큰 날개를 펼쳐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를 가리고 있을 때, 그 그늘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던 또 다른 봉황이 있었다. 그는 바로 구 소련이라는 철의 장막에 갇혀 있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Fyodorovich Oistrakh, 1908~1974)였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바이올린 전통인 레오폴드 아우어 악파에서 벗어나 있었던 그는 19세기 재정 러시아 시대로부터 내려온 옛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으로 ‘새로운’ 러시아 악파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예술가로서 풍부한 감수성과 남다른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음악을 자신의 스타일로 끌어당기기보다는 자신이 음악 그 자체로 뛰어들어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했다. 한편 까다로움과 예민함의 극한을 달렸던 아우어의 제자들과는 달리, 부처와도 같이 후덕한 외모와 인자한 품격 때문에 오이스트라흐는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덕이 높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던 “흥어시 입어예 성어락(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논어)”의 현현(顯現)으로 오이스트라흐를 꼽는다 하더라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연주 예술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훌륭했던 예술가

 

예후디 메뉴힌은 “그의 음색은 저음역부터 고음역까지 순수하고 깨끗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람됨마저 순수하고 깨끗하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메뉴힌은 소련과 런던을 오가며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바흐를 연주했는데, 그 또한 오이스트라흐의 음악은 물론이려니와 인품까지를 높이 평가했다. 지휘자 쿠르트 잔데를링은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갑자기 세계는 더욱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하곤 했다”라고 표현하며 오이스트라흐가 가지고 있는 그 범접할 수 없는 고유의 아우라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사실상 오이스트라흐는 1950년대 이후에서야 비로소 서방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는데, 당시 많은 청중들과 비평가, 연주자들 모두 그의 놀라운 연주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하이페츠가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비로소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바이올린 세계의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각자의 빛을 발산하며 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완벽에 가까운 정확한 운지를 바탕으로, 그의 레가토는 비할 바 없이 유연했고 아주 짧은 음표에서도 맵시 있는 음향을 만들어내는 활놀림은 건조하다기보다는 믿음직스러웠다. 더 나아가 시종일관 긴장감과 에너지를 응축했다가 격정의 순간에 그가 토해내는 클라이막스는 고귀한 영혼의 거룩한 일갈과도 같은 엄숙함에 가까웠다. 한편 그는 만년에 접어들며 은은한 은빛 칸타빌레를 선보이곤 했다. 이는 이전 시대의 슬라이딩 기법 혹은 현대의 벨칸토적인 칸타빌레와도 전혀 다른, 까닭 모를 투박한 질감과 현대적인 날카로움을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또한 만년의 그가 호흡을 맞추었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의 그 엄청난 에너지와 동등한 입장에서 앙상블을 이룰 수 있었던 유일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다. 이것은 단지 그의 스타일이나 스케일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음악 그 자체에 몰입하여 그 이치를 발견해내고자 하는 치열한 음악혼을 소유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서방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부터 이미 소련의 명실상부한 단 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1차대전 이후 소련에는 아우어의 제자 가운데 가장 특별한 재능과 카리스마를 발산했던 미론 폴리아킨(Miron Borisovich Polakin, 1895~1941)이 일종의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때이른 죽음으로 서방세계는 그의 진가를 알 기회 조차 가질 수 없었다.

 

 

한편 진정한 인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일컬어졌던 보리스 골드슈타인(Boris Goldstein, 1922~1987)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소비에트 바이올린계를 양분할 것으로 기대가 높았지만, 정치적 이유로 그는 거의 잊혀진 사람 취급을 받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 왕성한 나이에 요절해버린 레오니드 코간(Leonid Borisovich Kogan, 1924~1982)은 오이스트라흐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을 구사하며 독자적인 길을 걸었고, 올레그 카간(Oleg Moiseyevich Kagan, 1946~1990)은 오이스트라흐와 비교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독수리의 비상

 

 

오이스트라흐는 1908년 9월 30일 우크라이나의 남부 도시인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유태인으로서 아버지인 다비드 쾰커는 문서정리의 일을 맡은 하급관리이자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어머니인 이사벨라 스테파노프카는 오페라 극장의 단역가수 출신으로서 어린 오이스트라흐를 자주 음악회에 데리고 다녔다. 다섯 살 때 그는 8인치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처음으로 선물받은 뒤 교습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스승은 바로 아우어와 함께 러시아 바이올린 악파를 대표하는 표트르 스톨리아르스키(Piotr Stolyarsky)였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제자로 나탄 밀스타인을 꼽을 수 있는데, 밀스타인이 콘서바토리를 졸업할 무렵인 1914년에 오이스트라흐는 처음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1923년 오데사 콘서바토리에 입학한 뒤 1926년까지 학업에 열중했고, 그 해에는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과 루빈스타인의 비올라 소나타, 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등의 프로그램으로 첫 공개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차이콥스키의 수제자였던 작곡가 글라주노프가 이곳을 방문했다가 오이스트라흐의 음악성에 감수성에 매료되었다. 그는 오이스트라흐에게 “키예프에서 내 지휘로 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그는 이 행운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니콜라이 말코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도 협연을 하여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아들 이고르 오이스트라흐와 협연하고 있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스톨리아르스키의 교육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제자들에게 당장 개선해야 할 기술적. 예술적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낱낱이 일깨우는 반면, 그것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는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맡겨두었던 것이다. 천재만을 받아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통제해야 식성이 풀렸던 아우어의 교육방식과는 전혀 다른 시스템으로서, 오이스트라흐가 작품을 탐구하여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갔던 것은 바로 이 당시의 학습에 의해 완성된 스타일이었다. 한편 1928년에는 피아니스트 타마라 로타레바를 만나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세계로 그 날개를 필 준비를 마쳤다. 1934년 모스코바 콘서바토리에서 선생의 자리를 얻게(1939년에는 교수로 발탁된다) 되었고, 1935년에는 소비에트 연방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그리고 비네야프스키 콩쿨에서 2위를 했다. 바르샤바에서 열린 이 비네야프스키 콩쿨은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로 별들의 전쟁이었다. 당시 1위는 지네트 느뵈, 4위는 보리스 골드슈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승에 대한 갈망은 1937년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콩쿨에서 대상을 차지했고 국제적으로도 그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이 당시 그는 1927년 제1회 쇼팽 콩쿨에서 1등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레프 오보린(Lev Oborin)과 평생에 걸친 파트너쉽을 이루며 첼리스트 스비아토슬라프 크누세비츠키(Sviatoslav Knushevitsky)와 트리오를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모스크바를 방문한 자크 티보(Jacques Thibaud)의 관심과 애정을 받기도 했다.

 

 

만약 세상이 평화로웠다면 그는 이 시기부터 세계를 누비며 하이페츠의 대항마로서 그 명성을 높였을 것이다.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는 당의 지시로 공장과 병원에서 연주를 펼쳤고, 배급이 끊긴 레닌그라드 대공방전의 와중에 그는 바로 레닌그라드에 남아 항쟁 의지를 북돋우는 콘서트를 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42년 스탈린상을 받으며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음과 동시에 미아스코프스키와 하차투리안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받고, 프로코피에프의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으로 편곡을 의뢰하여 초연(1944)했으며 쇼스타코비치와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그의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또한 헌정받아 초연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찾아온 영광의 시기

 

전쟁이 끝난 뒤 그가 처음으로 철의 장막을 너머 서방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9년 헬싱키에서, 그리고 1951년 이탈리아를 거쳐, 1952년에는 독일, 1953년에는 프랑스, 1954년에는 영국에 이어 1955년에는 미국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며 그 존재감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1959년에는 지휘자로도 활동하기 시작했고 1967년에는 은퇴를 한 오보린의 뒤를 이어 리히테르와 전설적인 듀오를 결성했다. 1960년대는 오이스트라흐에게 있어서 최고의 시절이었다. 매번 매진사례를 거듭하는 연주회의 횟수도 그러하거니와 언론으로부터의 과도할 정도의 찬사, 청중들의 히스테릭할 정도의 열광이 이를 반증해 준다. 더군다나 그는 여러 메이져 음반사들로부터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전설로 남게 될 음반들을 레코딩하기에 이른다.

 

 

DG에서는 바흐의 협주곡과 베토벤의 로망스, 브람스와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하며 바이올린 연주에 있어서의 고전주의적 스타일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미국 CBS(현재 SONY Classical)에서는 유진 오먼디와 함께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드미트리 미트로풀러스와 녹음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DECCA에서는 힌데미트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모차르트의 [콘체르탄테] 등을 녹음하며 역사적인 명반을 남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부드러운 분위기와 날카로운 조형미를 겸비했던 그는 베토벤과 같은 독일 고전 레파토리에서 최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평생의 동반자인 오보린과 함께 Philips 레이블에서 남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반은 그 이상의 추천반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서, 지금까지도 모든 면에 있어서 절대적인 극찬을 받고 있는 희대의 명연으로 그 가치가 높다.

 

 

이 뿐만이 아니다. 특히 EMI에서 남긴 녹음들은 한결같이 결정반으로 추앙하기에 손색이 없을 명반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협주곡과 같은 대작에서 오이스트라흐의 위대함은 빛을 발한다. 우선 조지 셸의 지휘로 녹음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2중 협주곡](로스트로포비치, 첼로)은 그의 대표적인 명연으로 손꼽기에 손색이 없고, 오토 클렘페러와의 브람스와 앙드레 클뤼탕스와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또한 메뉴힌의 음반과 자웅을 겨루는 희대의 명연이다.

 

 

 ◀지휘자 프란츠 콘비츠니(중앙)와 아들 이고르(오른쪽)와 함께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출처: Zimontkowski at en.wikipedia>

 

식스틴 얼링과의 베토벤과 시벨리우스 협주곡 또한 모노 시대부터 명반으로 일컬어졌던 음반이며, 오보린과 크누세비츠키와 함께 녹음한 베토벤과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녹음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가운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로 로스트로포비치와 리히테르가 한 자리에 모인 베토벤 [3중 협주곡] 녹음이야말로 감히 대적할 수 없는 포스와 치열한 예술혼이 어우러진,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역사적인 레코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년에 리히테르와 도쿄에서 실황으로 남긴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2, 3번]과 프랑크, 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등도 훌륭할 뿐만 아니라 소련에서 로제스트벤스키와 키릴 콘드라신 등의 지휘자들과 함께 녹음한 멜로디야(Melodiya) 음원들도 훌륭하다.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은 아들인 이고르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을 연주, 녹음하기도 했고, 자신이 지휘를 맡아 아들의 반주를 도맡기도 하며 가족애를 전면에 드러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로베르 카자드쥐가 아들과 부인과 함께 하거나 메뉴힌이 자신의 누이와 함께 연주한 것 혹은 길렐스가 자신의 딸과 함께 협연한 것과 더불어, 오이스트라흐 역시 당당히 ‘가족 음악가’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음악과 청중에 대한 헌신

 

 

당시 많은 소련 내의 예술가들이 자유를 찾아 서방 세계로 망명했지만 오이스트라흐는 이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던 프랑스의 브루노 몽생종은 이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호모 소비에티쿠스(소비에트적 인간)라는, 다소 비난조로 들리기도 하는 언사를 덧붙이기도 했다. 그의 조국은 그로 하여금 당에 복종하라고 요구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음악과 청중에 대한 헌신 뿐이었다. 그는 일체의 정치적인 고려와 권력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고, 예술과 인간 그 자체의 순수함과 이치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리히테르를 들 수 있겠는데, 오이스트라흐에게 있어서 소비에트 체제는 자신을 위한 최선의 환경은 아니었을지언정 조국과 전세계 청중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음악가로서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한 위대한 음악가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금까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왼쪽)과 협연을 지휘하고 있는 오이스트라흐>

 

 

1968년은 그의 60번째 생일로서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의 그레이트 홀에서 게나디 로제스트벤스키의 지휘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성대한 자축연을 가졌다. 이제 오이스트라흐는 루마니아의 에네스쿠나 영국의 메뉴힌,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하이페츠처럼 소련을 대표하는 바이올린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으며 전세계 음악 애호가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당시 모든 소련의 동료 음악가들이 보드카로 인해 그러했듯이, 그는 심장 질환이라는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리히테르와 리사이틀을 열거나 지휘자로서 활동하는 등 새로운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지만, 이는 그에게 있어서 죽음을 앞둔 마지막 산책이었을 뿐이다. 1974년 암스테르담에서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브람스 사이클을 진행하던 그는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하릴없이 이곳에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의 유해는 모스코바로 돌아간 뒤 저 성스러운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제 그는 저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청중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약력

1923 러시아 오데사 콘서바토리에 입학

1939 러시아 모스크바 콘서바토리 교수로 발탁

1935 소비에트 연방 경연대회 우승

1935 비네야프스키 콩쿨 2위

1937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콩쿨 대상

1941~1963 오보린, 크누셰비츠키와 함께 오이스트라흐 3중주단 활동

1942 스탈린상 수상

1955 첫 미국 공연

1967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와 듀오 활동

 

출처 : 클래식 사랑 그리고 인생
글쓴이 : 클래식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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