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略史)
12.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14세기 중반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배경을 보면
첫 번째, 이탈리아에선 귀족계급과 부유한 부르조아 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두 번째,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하는 등 고전시대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 번째, 도시의 자부심과 사유재산제가 잘 발달되어 예술에 대한 후원의 기회가 많았다는 것등이다.
특별히 지옷토와 단테의 출생지였던 부유한 상업도시 피렌체에선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흐름 이 강하게 나타났다. 피렌체는 새로운 아테네로 부상될 만큼 시민예술의 야심찬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예술가를 엘리트 집단 으로 인정하는 등 미술가의 지위가 향상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들 수 있으며 그는 원주와 벽기둥, 아치를 자기식대로 결합, 표현하였으며 원근법, 소실점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를 뒤이어 알베르티가 건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그는 벽과 창문을 가진 재래의 집과 브루넬레스키가 권장한 고전형식을 절충하여 개인 주택에 적용하는 건축기술을 보여 주었다.
15세기 최고의 조각가 도나텔로는 로마의 유적을 제계적으로 연구한 르네상스의 아버지이다. <성지오르지오>나 <죽코네> 모두 고전 예술에 있어서의 균형 잡힌 움직임의 의미가 회복되었으며 고대 로마 조각을 재현, 새로운 도상으로 재창조하였다.
플랑드르 화가들의 나체상이 '발가벗겨져 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 반해 이탈리아 조각가들의 나체상은 고대 조각의 이상을 추구하여 인간의 상체를 구조체로 다루었으며, 옷은 신체를 감싸는 듯하게 표현되었다.
경쾌한 아치 대열과 고린트식의 기둥이 잘 표현된 천국의 문,<야곱과 이삭의 얘기>의 기베르티는 선명하고 수학적으로 정확한 원근법 을 구사하였으며, 테라코타에 전념한 롭비아와 로마조각보다 더 개성적인 대리석 조각가 롯셀리노 도 유명하다.
다빈치의 스승인 베록키오는 사방으로 뻗쳐 있으나 우아하고 연속적인 동작을 보여주는 <돌고래를 안은 동자>를 조각했다. 베록키오는 어떤 의미에서 도나텔로의 폭넓은 세계와 대담한 예술적 야망에 필적했던 작가였다.
1. 회화
피렌체 회화는 격렬한 동세와 떨림이 강한 윤곽선을 유지하였으며 많은 작품이 고전 작품에의 제재를 따온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15세기 말에 유행된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짐작할 수 있는 데, 그들은 고전고대를 연구하면서 종교를 인간적인 것으로 해것하였으며 그리스, 로마의 예술,철학,종교 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융합을 꾀하였다.
마사치오는 26살에 요절했으나 15세기 회화 분야에 있어 경탄할 만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는 섬세한 우아함이 아니라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 건장하고 모가 진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성모와 성요한이 있는 성삼위일체>는 지옷토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나텔로처럼 의복 보다는 육체를 더 중시한 르네상스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부르넬레스키의 고전적 건축과 과학적 원근법의 완벽한 응용이 잘 나타나 있다.
마사치오의 <삼위일체>와 흡사한 <성모자와 성자들> 을 그린 베네치아노는 색채구사에 있어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하였다. <성십자가>의 피에로 델라 프란 테스카는 빛을 이용하여 깊이감을 표현하였으며, 마사치오를 연상시키는 엄격한 자세의 인물상과 자신의 그림세계의 object를 기하학적 개념(구, 원통, 원추)으로 파악하여, 현대 추상화가들 의 정신적 지도자로 칭해질 수 있다.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보티첼리는 이교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영성이라는 공통분모의 발견으로 높은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하였는 데, 이 작품으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다.
마사치오로부터 이어지는 초기 르네상스의 중요화가로 만테냐를 들 수 있는 데, 그는 이야기의 내면적 의미를 중시한 지옷토에 비해 외부적인 형태에 관심을 나타냈었다. 만테냐의 <형장을 끌려가는 성야곱>은 앙각시의 원근법으로 나타내었으며 프레스코 벽화 중 가장 극적 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로마풍의 건축과 의상, 장신구에서 "엄격한 단순성과 장대함"을 엿볼 수 있으며 긴장되고 완강한 모습의 인물상은 도나텔로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특별히 나체상으로 소묘한 만테냐의 소묘로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밑그림은 나체상으로 구성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벨리냐의 <법열에 잠긴 성프란체스코>에서 웅대한 자연경관과 부드러운 색채를 볼 수 있으며, 부조 처럼 윤곽선으로 표현한 카스타뇨의 가죽그림<다윗>은 동세와 동작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프라 안젤리코처럼 일부러 근대적 표현법을 회피한 작가도 있다.
파올로 우첼로는 원근법과 단축법을 많이 사용하고 조각된 것처럼 공간에 돌출되어 보이는 <산로마노의 대승>을 그렸고, 메노초 고촐리는 아름다운 장신구와 화려한 의상이 돋보이는 <베들레헴을 향해 가는 동방박사들>을 그렸는 데, 이 들의 작품들은 모두 상류계층이 작가들에게 원하는 요구에 부응할 만하다.
2. 르네상스의 주체
중세의 인간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에서 그리스도교가 자리답고 있었던 시대의 모든 미술이 창작은 종교에 묶인 채 그 나래를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생각이 확대되어 나가는 시대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하였다. 급속한 기술과 발달은 인간의 시각 확장을 가져다 주었다. 이에 영향받은 것은 단지 사회에 국한 된것 은 아니었다.
미술에 있어서도 둣치오, 지옷토, 로렌쳇티 형제와 같은 화가들에 의한 시각 예술의 융성, 단테와 페트라르카, 복카치오와 같은 문학가들에 의한 문학등의 발전드오가 같같은 전반적인 문화의 융성이 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 자신들의 세기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여명기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자아에 대한 보다 진보적인 노력들이 연결되었다.
위와 같이 신에게로 쏠렸던 시선이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지게 되자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각이 도래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대규모적인 고대 문예의 부흥을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고대문예의 부흥은 특히 시각예술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르네상스를 주도한 사람들은 다름아닌 그리스도교인들 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대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따른 것이 아닌, 고전적 전통을 그리스도교와 융합 시켜 그 이상의 것을 지향하던 사람들이었다.
브루넬레스키 Brunelleschi, Filippo (1377~1446.4.15)이탈리아의 건축가·조각가. 피렌체 출생. |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12.13)이탈리아의 조각가. 본명은 도나토(Donato di Niccol?di Betto Bardi). 피렌체 출생. 제1기는 1405∼32년으로 피렌체대성당을 위한 두 예언자상(1408)을 비롯하여, 웅대한 《복음서기자(福音書記者) 요한상》(15), 병기 제조업조합의 의뢰로 제작된 오르 산 미켈레성당의 《성 조르조》(16:원작의 대리석상은 피렌체의 발제로미술관 소장), 길드 조합을 위한 《성 마르코상》, 피렌체의 문장(紋章)이 있는 방패를 들고 있는 《사자상》, 산타크로체성당을 위한 목각 《그리스도의 책형(刑)》 등을 제작하여, 고딕의 작풍을 남기면서도 이미 르네상스의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여, 분석적인 사실을 억제하고 종합적인 장엄함으로 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 조르조》는 그때까지 건축의 질서를 따르고 있던 조각을 3차원의 공간에서 독립시켜, 범할 수 없는 위용과 고전적인 격조를 보였다. 제2기는 32년 그가 로마를 방문하여 고대유적 연구에 열중한 이후의 10년간으로, 발제로미술관의 청동상 《다비데》(33)는 젊음이 넘치는 육체의 표현에 고전미를 풍기게 한다. 대리석조각도 이 즈음엔 사실기교의 극치에 이르러, 발제로미술관의 《세례자 요한》과 같은 박진감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 밖에 그의 명성을 떨치게 한 결정적인 것으로 산타크로체성당의 부조(浮彫) 《수태고지(受胎告知)》, 산로렌초성당 설교단의 부조 《강가(降架)》 등이 있다. 제3기는 43년 파도바에게 초대되어 그곳에 머물렀던 10년간으로, 《가타멜라타 장군기마상》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대변하는 걸작임과 동시에, 르네상스 주조기술의 한 정점을 나타낸다. 제4기는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만년의 피렌체시대로, 사실적 기법은 더 세련되고 전부터 조금씩 보였던 그의 괴기취향과 비극적인 표현이 강조되었다. 베키오궁전 앞에 있는 《유디트와 홀로펠네스》 청동상과 피렌체성당의 《막달라의 마리아》 등이 있다. 대리석·청동·목재·테라코타 등 온갖 재질을 썼던 그의 전작품에 일관되어 풍기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 육박해오는 투철한 르네상스적인 리얼리즘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고대의 단순한 모방에서 탈피하였으며, 조각을 회화화한 기베르티의 고딕적인 작풍과도 대결할 수 있었고, 조각을 원래의 정도로 되돌림으로써 베로키오나 미켈란젤로에게 영향을 끼쳐 근대조각으로 발전할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
3. 후기 고딕 회화
1420년 경 북유럽의 화가들과 이탈리아 화가들은 국제양식의 한계를 넘어 대담하게 전진해 갔다.
그러나 북유럽의 화가들은 과거의 전통을 고수해 나가는 경향을 고수하였는 데, 이에는 상당히 비슷한 경향이 동시에 출현하게 되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구분하여 전자는 초기르네상스라고 부르고 후자를 후기 고딕양식이라고 부른다.
알프스 북부에 있어서의 예술의 경향은 기존의 경향을 고수하면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처럼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음악과 회화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회화에 있어서 소위 플레말레의 화가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의 노력이 확대되었다. 이것을 이탈리아 사람들은 원숙한 기법을 가진 자연으로의 회귀라 하여 그들을 찬양하였다.
에이크 Eyck, Hubert van (1370?~1426)네덜란드의 화가. 플랑드르 화파의 기초를 닦고, 유화의 기법을 개량한 ‘에이크 형제’ 중의 형. 아우와 함께 부르고뉴공 필립[善公]을 섬겼다고 하나, 확실한 기록이 없어 경력은 불분명하다. 작품으로는 형제 합작의 서명이 있는 강(Gent)의 성요한성당의 제단화(祭壇畵)가 있는데, 그의 구상에 의해 착수되고, 그의 사후인 1432년 아우의 손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에이크 Eyck, Jan van (1395?~1441.7.9)네덜란드의 화가. 형인 H.van 에이크와 플랑드르 화파의 기초를 닦고 유화의 기법을 개량하였다. 1422∼24년 헤이그의 바이에른후(侯) 요한의 궁정화가, 이어 25년 이래 부르고뉴공(公) 필립[善公]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한때 필립과 포르투갈의 왕녀 이사벨의 결혼을 위한 사절단과 함께 리스본에 간 일도 있다(1428∼29). |
로제르 반 데르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 얀 아이크 형제와 더불어 플랑드르 화가 중 거장의 대열에 끼는 사람이 바로 로제르 반 데르 바이덴 이다. 그의 작품 중 십자가에서 내림은 모난 옷주름과 정확한 모델링으로 플레말레의 화가의 그림 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얀 반 아이크의 부드러운 음영과 풍성한 색채를 따르고 있다. |
보스 Bosch, Hieronymus (1450?~1516)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 |
13.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재생'이라는 개념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였다.
서구에서 16세기 초엽은 서구 역사상 가장 혼란하고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앞선 시대, 즉 14,5세기의 발견들의 꼬리를 물고 인간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인본주의 사상을 들춰내기 시작했고 아메리카의 발견은 강대국으로 하여금 부를 축적하게 했고, 이로 인한 식민지와 해상 무역을 위하여 힘의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전쟁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이로 인해 종교 전쟁이 잇따르게 되었다.
알프스 이북의 나라들에서 루터와 칼빈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이 나왔으며 대성당의 건축을 위하여 면죄부를 팔던 교황의 힘에 정면으로 맞섬으로서 교황의 권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는 독자적인 그들만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노선을 가게 된 알프스 북부의 나라들은 르네상스의 양식이 더 늦게 수용된다. 이 지역 대표적 화가로는 뒤러와 홀바인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엄격한 궁정풍의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로 르네상스 예술이 처음으로 태동한 피렌체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나타내엇으므로 르네상스로 같이 분류하지는 않는다.
초기 르네상스의 미술가들에게 있어 특히 가장 중요한 임무를 떠 맡았던 건축가들을 고민스럽게 했던 것은 대성당의 건립이었다. 당시 시대를 움직였던 가장 기초 단위의 힘이 종교였으므로 성당 건축은 가장 중요한 미술의 한 영역이었다.
원근법, 소실점, 원주와 벽기둥, 아치를 결합하는데 성공한 전시대의 브루넬리스키, 그 뒤를 이은 알베르티에 이어 16세기에 이르러 교황의 대성당을 건축하는 브라만테는 고전 건축의 이상과 기준을 흡수, 재현한다.
이들은 거의 제작소로부터 어려서부터 스승의 일을 도우며 기법을 익혔다.
다른 어떤 세기보다 많은 천재들이 나타났던 16세기-이들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살펴보기로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h (1452 - 1519) 고대 그리이스의 고전 시대와 같은 영광의 시대인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기간이 그가 생존해 있던 때였다. 그는 역사상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만능의 천재였으며 자신이 예술가라는 데 자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 과학으로 분류하는 해부학, 기체 역학, 동물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자연세계를 관찰하는 데 예술가의 눈이 가장 완벽한 기구라는 것을 입증했다. |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 - 1564)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는 대조적인 사람,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 화려하고 다채로운 생활을 반영해 주는 작품을 남긴 도메리코 키를란다요로부터 3년동안 도제 수업을 받았다. |
라파엘로 산티 Raffaello Santi (1483 - 1520) 르네상스의 3대 거장 가운데 가장 젊었으며 가장 까다롭지 않고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우스의 요청대로 로마로 오기 전 다빈치의 많은 작품들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
지오르지오네 Giorgione (1478 - 1510) 지오반니 벨리니의 제자. <폭풍우> 경치가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주제가 됨. 사물과 사람을 미리 그려 놓고 나중에 공간 속에 배열한 것이 아니라, 자연,땅,나무,빛,공기,구름 그리고 도시 풍경 및 나무들과 인간을 통틀어 하나로서 진정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이는 거의 원근법의 발명에 맞먹는 새로운 영격을 향한 커다란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이 되었다. |
티치아노 Tiziano (1477 - 1576) 벨리니, 지오르지오네의 뒤를 잇는 베네치아의 대가. 색채를 다루는 데 뛰어났으며 초상화 작가로 유명했다. 세계를 빛과 색채의 구성이라고 보는 회화양식 이 근대 회화의 중심적 사고 방식이 되기도 했다. |
14. 북구의 르네상스
후기고딕 성향의 알프스 북쪽의 미술가들은 1500년대를 전후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선다.
이태리 르네상스의 전사조와 후기고딕의 만남으로 그 경향은 매우 다양했으며 남부와 다른 북부지방 특유의 성격이 드러난다.
대체적인 경향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 차분하고 냉정한 빛깔, 공간미를 배제한 꽉 찬 구성,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가득찬 신비감, 판화의 대중적 성공과 전파도구로서의 보급과 발전등을 들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주도 세력국으로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를 들 수 있다.
독일
독일은 뒤러(1471-1528)로부터 말할 수 있겠다.
그 선구적 역할은 숀가우어, 미하엘 파허에 연원하나 이탈리아 여행과 독일의 고딕 성향이 이상적으로 만나 이상적인 북구양식의 인체효현과 합리적 공간표현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뒤러가 단연 독일의 북구 르네상스인이랄 수 있겠다.
<자화상>, 1500년작, 에서 정면을 향한 엄숙한 자세나 그리스도를 닮은 이상화된 용모는 통상적인 자화상의 영역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는 권위와 예술 혁명가로서의 자신의 사명감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판화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목판화 기법에 이탈리아 동판기술을 도입하여 섬세하고 꼼꼼한 선묘가 돋보이는 명확한 표현을 한다. 특히 인체에 있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업적이었던 근육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근육이완, 배경에서도 섬세한 끝마무리까지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주요관심을 가졌던 것은 과학적인 원근법과 아름다운 인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해부학들이었다.
또, <멜랑꼴리아>, <네기질>등에서 보이는 함축적인 상징성은 북방 르네상스의 기질을 보이며 신비감을 자아낸다.
그외에서 크라나하, 알트도르퍼, 그위네발트 등이 손꼽히는 독일 르네상스 예술가이다. "이겐하임 제단화", 그뤼네발트, 당시의 최대의 판화가로서 목판화와 동판화를 통해 16세기 미술에 광범위한 영향 끼침. 그의 작품 <수태고지>, <성모자를 위한 천사의 합주>, <부활>등은 모두 고통과 비탄에 빠져있는 인물들을 묘사하였고,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 중세적인 <그리스도의 책형>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동감으로 차있고, 원근법에 대한 지식이 적용되어 있어 르네상스적인 성향이 보인다.
"아담과 이브" 고딕미술의 세밀한 자연의 모방에 대한 관심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하여 우아한 신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지에서 남유럽의 이상을 북유럽에 이식시키려 하였다.
"병사와 죽음과 악마", 이탈리아 미술이 부여했던 조각처럼 균형잡힌 형태와 미적인 인물(기사)와 성도를 향해 신앙의 길을 후기고딕적 묘사, 꿋꿋이 나아가는 미덕을 함축하는 상징이 결합되어 독일 특유의 성격을 나타낸다.
그뤼네 발트(Matthis Grunnewald) 세익스피어 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인 그뤼네발트는 후기 고딕양식의 원근법을 구사하여 완강하고 단단한 인물상을 그려냈다. 또한 그는 중세 미술의 목적인 설교를 위한 그림을 지향하는 데, 그런 그의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걸작 <아이젠 하임 제단화>는 대단히 중세적이면서 초인적인 스타일로 표현된 "그리스도인의 책형"과 그 패널 안쪽의 , 생명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율동감의 "수태고지","합주하는 천사","성모자","부활"로 구성된다. |
뒤러 (Albrecht Durer : 1471~1528) 25세때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러는 이탈리아의 회화양식 뿐 아니라 미술가의 개념, 지위까지도 북부에 전하고자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그림은 소용돌이 치는 필세와 몸부림이 가득찬 환상적인 장면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판화 속 인물들은 만테냐의 판화에서 배운 것이고, 자화상등의 얼굴도 완벽한 균형의 이론에 의해서 구성했다.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에도 관심을 쏟은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인체의 배율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려 인체를 왜곡하기도 하였다. 뒤러는 어떤 예술가보다 끈기있고 충실하게 자연을 묘사하였는 데, 이는 성경의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틴 루터의 신봉자가 되어 새롭고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예술을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종교계 지도자에게로부터는 우상숭배의 위험등의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뒤러의 <네사도>는 독일 회화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 1467~1543) 한스 홀바인은 영국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했는 데, 그는 북부 유럽의 세부표현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성과 견실성을 교묘하게 조화시킨 초상화를 그렸다. <헨리8세>는 의상이나 보석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인물의 성격까지도 잘 드러나 있다. |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Albrecht Altdorfer : 1480~1538) 그는 산속을 헤메며 자연을 연구하였으며 그가 남긴 수채화와 동판화, 유화 몇 점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인물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작가가 느끼는 풍경만이 그려져 있다. |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르네상스는 그 정신을 그대로 이었다고 말하거나 대표적인 작가를 내세우기가 모호하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에 이르는 네덜란드 풍경화, 플아드르 회화가 탄생하는데 전조를 마련한다. 즉 1500-1600년대에 이르러 풍속화, 정물화등이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15세기의 플랑드르 회화인 얀 반 아이크 형제, 플레말레의 화가에서 비롯하였으며 세속적인 풍경속에 품은 상징주의적인 종교화는 브뤼겔에 이르러 풍속화로서 자리잡고 우화, 속담을 담은 내용의 풍자등에서는 강한 사회성도 엿볼 수 있다.
농민생활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인문주의자로 서 실제 풍경을 스케치하고 이용하는 사생적인 면에서는 <사냥꾼들의 귀환>에서 전형적인 풍경의 경치를 볼 수 있다. <농부의 결혼식>에서는 소박하고 거칠은 농민들의 모습을 최소한의 모델링으로 간결한 색처리로 명료하게 하고 있다. 구도에 있어서도 철저히 계획된 일관있는 연출을 하고 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에서는 교훈적인 내용의 성경구를 인용하여 여러 가지 풍자를 담고 있다.
전체적인 인물은 보슈의 영향을 받고 풍경이 주가되는 과감한 공간구성의 풍경화에서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민들의 취향에 호응하는 일상생활을 묘사한 풍속화를 비롯하여 세속적인 모든 테마, 즉, 풍경화, 정물화가 1500년대에서 1600년대 사이에 그 윤곽을 드러낸다.
프랑스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왕실주도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특히 1494년 이탈리아 원정을 실시한 샤를르 8세 는 새로운 성을 건축하는데 이태리 양식을 활용하고 있다.
조각에 있어서는 체리니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한편 퐁텐블로파라는 일련의 작가 미상의 예술가들이 이태리 마니에리즘을 수용하여 궁정양식의 화려한 미술을 낳았고 바로크 시대의 회화에 곧바로 연결된다.
그 내용은 고대 신화와 우의를 다루며 관능적이고 기교적인 나부나 화려한 귀족들의 모습을그렸다. 이와 같이 프랑스는 궁정양식의 화려한 미술이 발달하였으며 이는 바로크 시대의 회화에 곧바로 연결된다.
15. 마니에리즘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경향들을 이르는데 흔히 평가절하되어 온 경향이기도 하다.
즉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형식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전대의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했다고 간주되어 창조성에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 그 기교적인 면에서 오는 차가움과 건조함이 개인의 주관적 성향의 극대화 결과 전성기 르네상스와 다른 경향을 의도하고 자연과 고대형식의 주관적 이상화를 지닌 내적 통찰력 이 재평가 받고 있다.
전반적인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신비감,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 과정된 인체비례에서 시대정신의 한 면의 표출로 보기도 한다.
특히 파르미지아노(1503-1540), 틴토렛토(1518-1594), 코렛지오(1489-1534), 엘 그렛코등이 대표적인 매너리즘 작가로 꼽히고 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후기작을 이 경향의 일부에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으나 매너리즘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고나점에서 자연미(이상미)가 아닌 세련미와 예술적 기교, 신비한 관념들을 추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양식적 특징으로는 콘트랍포스터의 극단적인 바른 포즈와 인체의 장신화, 차갑고 선명한 색조, 표면처리의 매끈함, 단축법과 원근법의 과장, 비논리적인 공간배치이다. 파르미지아노의 <목이 긴 성모>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의 인물묘사에서 나타나는 과장된 인체 비례, 틴토레토의 <최후의 심판, 만찬>은 그 이전의 <최후의 심판>과 비교하면 단번에 확인되는데 강한 불빛의 명암대비, 동세가 격한 인물들의 움직임고 불안정한 사선구도등이 마이에리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엘 그레코와 코렛지오는 종교화를 그렸다. 특히 엘 그레코는 톤이 밝고 대담한 붓질과 신비스러운 종교화를 이루고, 반면 코렛지오는 스퓨마토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인체를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그는 신화를 다른 내용에서도 환성적인 스퓨마토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16. 바로크 미술
1600년부터 1750년 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양식을 뜻한다.
18세기의 비평가들은 마니에리즘과 마찬가지로 바로크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마니에리즘과 로코코 사이의 17세기 문화 전반의 양식을 지칭하며 이는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바로크는 프랑스의 고딕 양식이 국제적 성격으로 발전하였던 것처럼 범 유럽적 문화 현상이었으며 국가나 각 지방 특유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나타난다.
즉 하나의 공통분모를 같기엔 너무 방대하고 다양한 예술경향이었던 것이다.
궁정적, 카톨릭 적 바로크와 시민적, 프로테스탄트적 생활권의 바로크는 상이하게 나타난다.
이는 베르니니와 루벤스의 예술과 렘브란트와 반 고옌의 예술에 있어 내적 외적으로 다르게 묘사된다.
전자가 감각주의적이고 기념비적, 장식적인 반면 후자는 이보다 더 엄격하고 더 형식을 존중하는 " 고전주의적 " 양식으로 나뉜다. 바로크의 개념은 처음부터 고전주의적 흐름을 타고 있었고 이와 함께 카톨릭 국가들에서 자연주의적 조류가 있었다.
카라바조에 의해 대표되고 이는 후에 바로크 예술의 전반적인 예술 흐름이 된다.
즉, 바로크는
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바조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
둘째,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가 있었고,
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고딕 이후로 예술양식은 점점 더 다양하고 세분화 되어 갔다. 이런 각양각색의 정신적 내용들은 자연주의적인지, 반자연주의적인지,종합적인지, 분석적인지,고전주의적인지, 반고전주의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었지만 바로크를 기점으로 이런 분류방식은 의미를 잃게 된다. 즉 예술에 있어서 통일적 성격을 엄격하게 규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술은 자연주의적이며 고전적일 수 있었고 분석적이며 통일적일 수 있게 되었다.
미술가들이 대행했던 사물을 관찰하는 방법은 갈릴레오나 뉴우턴 같은 과학자들이 대신하게 되었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같은 나라는 해외에 식민지를 앞다투어 건설하였다.
상대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에 뒤졌다.
반종교 개혁운동으로 카톨릭의 권위를 되찾은 교회는 다시 안정을 누리며 새로운 형태의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회 수가 증가하고 절대주의의 승리는 궁전의 건축을 재촉하였다.
고전고대와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모여든 수많은 미술가, 건축가 등은 유럽 북부와 남부의 문화를 창출하고 교류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라바조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3 ~ 1610) 전시대의 예술을 이끌었던 전통을 거부한 가장 뛰어난 사람 중의 하나였던 카라바조는 1573년 이탈리아의 카라바조에서 출생했다. |
카랏치 Annibale Carracci(1560 ~ 1609) 베네치아 학파 특히 코레지오파의 미술을 배운 화가 집안의 한 사람이었다. 평소 라파엘로의 그림에 매료되었던 그는 그의 화풍 즉 단순성과 미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빛과 우리 감정에 호소하는 그의 그림 양식은 과히 바로크적이라 할 수 있는 데 그도 카라밧지오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자연에 가까워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며 카라밧지오보다 신중한 개혁자였다. |
베르니니 Lorenzo Bernini (1598 ~ 1680) 카라바조 작고 이후 등장한 17세기 최고의 조각가이며 건축가.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무시 되었던 육체와 정신이 그의 조각에서는 다른 견해로 부활한다. |
루벤스 Rubens, Peter Paul (1577.6.28~1640.5.30)플랑드르의 화가. 독일 베스트팔렌의 지겐 출생. |
벨라스케스 Velazquez, Diego Rodriguez de Silva (1599.6.6~1660.8.6)에스파냐의 화가. 세비야 출생. |
프랑스의 바로크 : 베르사이유 시대
17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풍요롭고 강력한 국가였다.
그 결과 예술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골동 취미적, 귀족적, 영웅적인 내용이 강조되고 그 밖의 양식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 후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 화가들은 조르즈 드 라 투르와 우이 르 냉 등이다. 이들 그림의 공통점은 카라바조가 호평받았던 그 자연주의 즉 강렬한 종교 정신을 강조했던 것이었다.
푸생 Poussin, Nicolas (1594~1665.11.19) 프랑스의 화가. 노르망디의 레장드리 출생. |
17. 17세기 네덜란드 미술
17세기 유럽전역에서는 바로크의 궁정풍 문화가 유행했으나 네덜란드에서만은 시민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술이 전개되었다. 도시국가 연합을 형성하고 있던 홀란드 북부의 자유도시국가들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고, 국가의 부는 국가나 왕정에게 돌아가지 않고 시민계급이 차지하게 되었다.
교회의 구속에서 벗어난 네덜란드에서는 그 주제에 있어서 성화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소재들의 묘사, 풍속화, 초상화, 풍경화, 실내화, 건축화 등이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스케일 역시 궁정이나 교회가 아닌 개인의 일상생활의 용도에 맞는 조그만 규모였다. 따라서 조형예술 중에서도 가장 겸손한 예술인 회화, 또 그중에서도 가장 소박한 형식인 내실 장식용의 소형그림이 지배적인 장르가 되었다.
할스 Hals, Frans (1581?~1666.9.1)네덜란드의 화가. 안베르스 출생. |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1669.10.4)네덜란드의 화가. 레이덴 출생. |
로이스달 Ruysdael, Jacob van (1628?~1682.3.14)네덜란드의 풍경화가. 하를렘 출생. |
얀 스테엔 (Jan Steen, 1626 ~ 1679) 브뤼겔에 이어 중세기 세밀화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유쾌하고 소박하게 묘사하는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완성 작품 : <세례잔치>,<니콜라스제의 전날밤> |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 (Jan vermeer van Delft, 1623 ~ 1675) 유머러스한 도해적 설명이 있는 풍속화가 아닌, 오히려 인간이 들어 있는 정물화라고도 할 만한 시간이 없는 세계의 표현. 질감, 색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등, 부드러움과 정확성의 불가사의 하고 독특한 조화로 걸작이 됨. |
18. 로코코 미술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 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조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로코코에 이르러 비로소 르네상스의 예술적 목표는 최종적으로 달성되며, 또한 로코코와 더불어 사물의 객관적 묘사는 근대 자연주의가 추구하던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을 확보한다.
로코코는 사실 돈 많고 권태로와진 향락가들을 위한 하나의 애로틱한 예술이다.
이 시기에는 여성미의 이상 자체가 달라져서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정교한 것으로 되었다. 또한 로코코는 서구 최후의 보편적 양식이다. 반면 같은 시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선 파리의 로코코 양식과는 대조적인 후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지어졌다.
와토 ( Antoine Watteau 1684 ~ 1721) 18세기 초 화가들의 우상 숭배 인물은 빛, 색채, 움직임, 환희 등 아카데미가 싫어했던 모든 것을 갖춘 루벤스였다. 흐르는 듯한 필법과 화려한 색채대비등을 루벤스에게서 물려받은 와토의 그림은 반아카데미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카데미는 상당히 개방적이어서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와토의 그림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페트 갈랑트, 즉 우아한 축제라느 새로운 범주가 와토에 의해 창안되었는 데, 이것은 공원풍의 배경에서 희극 배우와 재미있게 노는 젊은 귀족들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공원의 연회> 은 아름다움의 환성속에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데, 그것은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와토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와 예쁘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아마도 이는 그가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
샤르댕 (Jean-Baptiste Siemon Chardin 1699 ~ 1779) 18세기 귀족풍의 몽상적 세계가 퇴조하고 보통사람들의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한 샤르댕은 이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평범한 아름다움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공간 질서에 대한 명쾌한 감각을 보여주는 샤르댕은 풍속화가인 동시에 정물화가였다. <주방정물>에서 보듯이 그가 그린 대상은 꾸밈없는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그는 존경에 가까운 마음으로 이를 떠받들고 있다. 그는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을 느껴 화폭에 담았으며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과 꾸밈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을 하였다. |
호가드 (William Hogath 1697 ~ 1764) 윌리엄 호가드는 뛰어난 초상화가였으나 그의 주된 관심은 생활의 장면에 있었다. 그는 청교도적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선의 보상과 악의 대가에 대한 교훈적 내용을 그릴 것을 계획하였다. <소란스런 술잔치>은 '방탕아 편력'이라는 그림 시리즈의 3장면이다. 그림을 통해 설교를 하고자 한 것은 호가드의 시대에 이미 대중미술속에 존재하였으나 호가드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붓을 사용하고 빛과 색을 배합하는 것, 인물의 배치 등에 대단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
게인즈 보로(Thomas Gainsborough 1727 ~ 1788) 영국이 낳은 위대한 초상화가 게인즈보로는 이탈리아 거장의 작품을 연구하기 보다는 타고난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가 그린 <로버트 앤드류스 부부>는 영국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시돈즈 부인>는 싸늘한 우아함을 보여주고 있다. 게인즈보로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그의 그림에선 와토와 같은 어두운 색조의 섬세함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그는 인기는 없었으나 <시골풍경> 풍경화를 그리는 것도 좋아하였다. |
레이놀드 경 (Sir Joshua Reynolds 1723 ~ 1792) 18세기 영국 상류사회를 만족시킨 화가, 레이놀드 경은 게인즈보로와는 다르게 이탈리아 거장을 연구하고 모방하라는 카라치의 교훈을 받아들였으며, 게인즈보로를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따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두 사람 모두 반다이크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창하고 감동적인 것만이 '위대한 예술'이라 믿었던 레이놀드 경은 지식인이었으며 상류사회의 생활을 했다. 또한 상류사회가 필요로 하는 미술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며 그는 초상화를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것으로 만들려 하였다.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을 보면 아이의 성격과 그 성격의 우아함과 매력을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
부셰 (Francois Boucher) 그는 대단한 화가라기 보다는 예술적 관습의 대표자로서 '징세청 부인'과 '신흥부자들' 및 자유주의적 궁정인사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에로틱한 장르 그림의 대가이다. 그는 와토의 "페트 갈랑트"다음으로 로코코 회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연애신화의 창조자이다. 또한 에로틱한 주제를 공예 미술로 확장하여 국민적인 양식을 만들었다. |
앙투완 (Jean-Antoine Houdon 1741 ~ 1828)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미술가 이자 조각가인 앙투완은 베르니니가 시작한 전통을 이어 받았다. 위대한 이성의 옹호자 <볼테르 상>에선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있는 지성을 엿볼 수 있다. |
프라고나르 (Jean-Honore Fragonard 1732 ~ 1806) 게인즈보로와 같이, 프랑스에서 자연의 아름다운 측면에 대한 취향을 표현한 작가 프라고나르는 와토의 전통을 따르는 화가였다. <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의 넓은 정원>을 보면 놀라운 효과를 구사하는 그의 솜씨를 볼 수 있다. |
19. 신고전주의
1. 개념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양식,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등이 우선시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리클라네움, 파에스툼등의 고대건축의 발굴과 동방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강한 도덕적 합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 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2. 역사적 배경과 그 성격
루이 15세와 16세의 통치기간에 이르는 시기가 그 주요 연대로서 전대의 태양왕의 철저한 섭정이후 혼란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시기이다.
따라서 혁명의 기운과 전대의 화려한 정치 성향의 귀족, 의식이 싹트는 시민계급의 성장의 정치적 위기, 한편 현대를 예고하는 계몽주의 사상의 성장이 혼재 하고 있다.
따라서 감정과 개개인의 자유, 애국심들이 얽힌 감정의 출구가 필요했다. 예술계에서 신고전주의는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은 그들의 이상에의 갈망을 행동과 사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여기서 미술에 나타난 주조는 신고전주의의 경우 "고전미"가 그 흐름의 주요 성격에 보이는 것이다. 혁명정부의 새단장은 고전주의의 복귀로 그 성격을 드러낸다. 특히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그 아름다움은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로 칭송받으며 1775년 빙켈만의 「그리이스미술 모방론」이란 저서에서 그 이상미가 재평가 받는다.
그 결과 고대에의 관심을 팽배하였고, 고대의 특징 즉, 명석한 판단에 따른 절제되고 철저한 정확성은 혁명정부가 바라던 이상을 적확하게 구현시키기에 알맞았다.
로코코시대가 취한 과도한 사치와 화려는 혁명정부의 첫 번째 숙청과제였기 때문이다.
순수하되 명확하고 강직한 선, 균형과 조화, 안정과 형식미의 존중은 고전주의를 계승하는 신고전주의가 취한 특징이다.
오히려 더 완강하고 절제된 선과 색으로 더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크 시대의 연장선 상에서 Poussain적인 회화의 계승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주제에 드러나 확실한 정치적 의지에 근거한 의도적인 소재, 더 철저하고 절제된 선묘는 더욱 심화된 고전미를 나타낸다.
한편 공간의 압축화, 실제 사건의 주제화 등은 신고전주의의 특징이자 마지막 고전주의자인앵그르에 드러나는 동방취미, 왜곡된 표현은 시대에 부합하는 취미 변화의 반영이자 '낭만정신'이 깔린 기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로써 새로운 미의식의 예고라 할 수 있겠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 뚜렷한 정치 성향을 지닌 작가로서 나폴레옹의 선전작가이자 신고전주의의 실제적인 구체적 실현을 이룬 예술가이다. |
앵그르 (Jean Augui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David가 신고전주의의 실현자라면 Ingres는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
20. 낭만주의
일정한 사조라기보다 정신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전주의의 관습화, 궁정적 귀족적 기교의 수사학에 결별을 고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를 비역사적, 비변증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들은 역사발전은 그 근원이 형식원칙이나 이념, 실체나 본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정법적 과정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사회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동적인 것으로 느끼기 시작하는데 우리와 우리의 문화가 끝없는 흐름 속에 있고 간단없는 투쟁 속에 있다는 생각, 우리의 정신적 삶이란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거에서 도피처를 찾는 그들은 과거를 자신들의 모든 희망과 꿈을 충족시켜 주는 장소로 만들었고 이 도피처로부터 이념과 현실, 자아와 세계, 개인과 사회의 모든 긴장을 추방하였다. 유토피아와 동화, 무의식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무시무시한 것과 신비스러운 것에로의 도피, 꿈과 광기에로의 도피, 유년시절과 자연에의 도피는 현실에서의 책임과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심각함을 이어받으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는데 자연을 더 면밀히 관찰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와 매일매일의 사건, 감정에 몰입하기도 한다.
고야 (Farancisco de Goya Lucientes 1746 ~ 1828) 과거의 인습을 벗어나 독립성을 주장하였으며 초상화나 「카프리쵸스」에칭 시리즈와 같은 새로운 주제의 에칭 등의 작품을 남겼다. |
1. 영국과 미국의 낭만주의 풍경화
풍경화는 당시 유행하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운동과 장 자크 루소, 그리고 영국 호반시인의 영향 때문이었다.
실제의 전원을 의도적으로 때로는 자의적으로 감상하는 경치관광여행의 점진적인 유행은 회화와 판화의 수요를 늘게 했다. 여행과 스케치에 인기 있던 장소는 영국의 '황량한' 지역 산맥과 황무지, 사람이 살지 않는 언덕의 폐허들이었다.
컨스터블 Constable, John (1776.6.11~1837.3.31)영국의 풍경화가. 제분업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왕립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
터너 Turner, Joseph Mallord William (1775.4.23~1851.12.19) 영국의 화가. 런던 출생. |
2. 독일의 낭만주의
독일 낭만주의는 풍경화, 상징주의, 민족적 중세주의의 세가지 양식으로 표현하였으며 시각적 강렬함에서는 영국과 가깝고, 더 엄숙한 성격을 띠고 뚜렷하게 종교적 주제 다루었다.
프리드리히 Friedrich, Caspar David (1774.9.5~1840.5.7)독일의 화가. 그라이프스발트 출생. 드레스덴에서 죽었다. |
3. 프랑스 낭만주의
제리코 Gericault, Jean Louis Andre Theodore (1791.9.26~1824.1.26)프랑스의 화가. 루앙 출생.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이다. 1808년 파리에서 C.베르네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2년 뒤 P.N.게랭의 제자가 되었다. |
들라크루아 Delacroix, Ferdinand Victor Eugene (1798.4.26~1863.8.13)프랑스의 화가. 샤랑트현(縣) 생 모리스 출생.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
도미에 Daumier, Honore Victorin (1808.2.20~1879.2.11)프랑스의 화가·판화가. 5세 때 유리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
코로 Corot, Jean-Baptiste-Camille (1796.7.16~1875.2.22)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처음에는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1822년부터 미샤롱과 베르탱에게 사사하여 그림을 공부하였다. |
21. 사실주의
19C 사실주의 개념과 형성과정
19C 이전까지는 자연주의로서 사실주의가 정의되어왔다.
그것은 성실하고 정확한 '자연의 모방' 더 나아가 그것의 '완벽한 이상화된 재현'으로서 사실주의 였다.
19C 이르러 사실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사실주의 등장 이전의 낭만주의는 그 개념적인 면에서 대조가 된다.
낭만주의는 '감정'이 중요하고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 낭만주의 회화는 격정적이며 현실을 떠난 이상향을 쫒거나 이국적인 소재등에 깊은 관심을 회화로 표현한다.
표현에 있어서는 색채에 비중을 두고 화려하고 열정적인 화면을 구사한다. 현실을 떠난 상상력을 부추기는 소재는 따라서 시적이며 신화적인 주제를 취했다.
사실주의는 낭만정신에 전적인 반대 표명과 비판을 가한다. 특히 19C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쿠르베, 도미에, 밀레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관심사는 [현실을 보는 눈] 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 작가는 그 현실의 운을 자신의 의지와 가치에 입각해서 결과는 달리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을 묶을 수 있는 것은 [인류가 생활하면서도 간과되어온 인간생활과 그 이면의 다소 불미스럽거나 적나라한 현실을 주목하고 표현해낸 회화세계일 것이다.]
즉 사실주의만을 놓고 볼 때 19C이전과 이후의 사실주의는 전자는 다소 기술적이고 이상화된 자연의 재현으로 낭만정신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때, 후자는 사회참여적이고 소극적인 계몽주의-개혁 하지는 않아도 회화를 통한 적나라한 현실의 인식이라는 점에서-가 배어있는 진상(reality)과 진실(truth)을 갈구한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어서 회화를 수단으로 한 사상의 표현으로 말할 수 있겠다.
낭만주의에 대한 사실주의는 현실을 간과한 어떠한 표현도 부정한다.
사실주의 입장에서 낭만주의는 단순한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쿠르베는 '천사를 보여주면 그리겠다'는 공언으로 사실주의의 개념을 대변하며 '상상력'으로 집약되는 낭만주의와는 대조를 보인다.
따라서 주관과 객관의 극적인 대조로 나타난다. 특히 색채에 있어서도 낭만주의를 대변하는 대표시 표현수단인 현란한 색감을 사실주의는 보이는 대로의 과장없는 색감으로 결과적으로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삭막하고 주제표현을 강화해 가장 큰 대조를 보인다.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소재자체가 대조적인데서 비롯되어서 [사르드나팔르의 죽음] [메탄호의 뗏목]은 내용 자체가 극적이며 등장인물도 격정적인 자세의 불안할 정도의 공간배치가 나타난다.
반면 사실주의는 [돌깨는 사람] [만종]등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정적인 모습과 그들의 현실공간을 재현해서 단순하고 차분한 구성을 나타낸다. 사실주의 배경에는 당시 사회의 의식의 전환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Hyppolue Tainne(텐느)과 Conte의 실증주의를 들 수 있다.
텐느의 역사관은 그 지역의 환경과 시대 사회의 관습이 그 시대의 예술가를 대변하는 것이다.
사실주의는 이러한 '당대성'인식에 주목하고 실천한 것이다.(이성주의가 팽배하여 계몽주의가 지배적이었으며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시작) 한편 19C는 과학과 기술의 태동 이성주의의 팽배를 부른 계몽주의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실증주의는 경험과 관찰에 입각한 과학적인 지식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시민정신에 평등사상을 고취하는데 역할하였고 민주사상에 이어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더 이상 고고한 가식적 주제가 아닌 평범한 삶의 세속성이 주제로 등장하는데 정신적인 역할을 했다.
쿠르베 Courbet, Gustave (1819.6.10~1877.12.31)프랑스의 화가.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 콩테의 오르낭 출생. |
22. 인상주의
인상주의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상주의자들이 외적세계에 찾아낸 어떠한 편견,선입관에서 완전히 개방된 순수한 상태에 있는 시각적 진실이다.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의 외계에 대한 충실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충실해야 할 대상으로 삼은 것이 빛이다.
빛을 통한 자연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었고 형태도 일정치 않았다.
인상주의자들의 본대로 그린다는 인상주의 정신은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 없는 사물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태양광선의 미묘한 조화를 쫓기 위해 이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그래서 야외주의(플레네리즘 혹은 외광주의)를 만든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광선은 빠른 필치와 붓놀림을 요구하고 빠레뜨에서 색을 섞기 보다는 직접 화폭에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노리며 점묘수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망막적인 효과를 노린다.
이와 같은 인상주의가 출현하는데는 사진기의 출현에 따른 재현적인 사실적 묘사가 회화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입증해준다. 그래서 관심을 갖은 것이 시각세계이고 그 시각세계의 민주성은 근본적으로 [시각의 근본적인 혁신] 의 핵심이 된다.
변화한 시각방식을 받쳐줄 색채학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발달은 독특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과거의 주제·개념 대신에 모티브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고 그 결과 국수주의적인 과묵한 주제가 아닌 새로운 변화된 세계에 들떠있는 파리의 풍물이 주된 노래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제를 태양광선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변화하는 주제를 담아내기 위한 연작형식이 유행한다.
모네가 그린 [건초더미] [루앙 대성당][수련]등의 연작에 있어 작품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은 태양광선을 위한 부차적인 소재인 것이다. 이 그림은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해야 윤곽과 형태가 드러난다. 화면의 구성도 삼각형구도나 소실점이 한두개로 축약되는 선원근법적이 아닌 대기원근법을 사용한다. 그 효과는 자칫 어수선해보이나 자연스럽고 우연한 느낌의 스냅사진과 같은 연출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화를 환영으로서 인식하기를 그만두고 '평면성'의 회화를 구축하며 Modernity를 획득하고 있다. 시각의 캔버스 자체로서 인식하게 하여 더 이상의 재현적인 효과를 유발하는 허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직관에 의한 뉴앙스 이미지의 연출은 곧 추상회화가 갖는 성격을 내재하는 이와같은 인상주의는 마네로부터 언급되고 있다.
1863년에 발표된 [풀밭위의 점심]은 인상주의 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을 하지 않으나 주제나 조형 및 색채면에 있어서 인상주의와 직결되는 사실주의 새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획기적인 작품이다. 상식을 벗어난 소재와 아울러 화면구성에 있어서도 각 대상은 일회적인 요소로서가 아니라 순전히 조형적인 요소로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색면의 조화도 종래의 중간색조와 칙칙한 다갈색조를 배제하고 녹색을 주조로한 전통적인 명암법에 의거하지 않는 선명한 색조로 화면을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파리 교외의 들놀이 퐁경에서 想을 얻은 것으로 옷입은 남자에 나체에 여자를 [전원의 합주]에서 본따고, 인물의 포즈와 배치는 라파엘로의 [퍼머스의 심판]에서 본딴 것이다 [올랭피아]는 피렌체에서 묘사한 티치아노의 작품 [우즈비노의 비너스]에서 구도를 빌어온 것으로 사실주의적 순수 회화라고 하는 회화의 새로운 영역을 제시한 작품이다 . 그림자에서 빛으로 옮기는 부분을 무시하고 그림자가 없는 피부나 검정 일색의 상의등을 단순히 색면으로 처리한 방법이 당시로서는 기이하다하여 비난을 받았다.
1856년 65년의 살롱에서 스캔들을 일으킨 것은 여성의 나신을 이상화시키지 않았고 신화나 우의의 베일로 가리지고 않은 채 제시했기 때문이다. 造形的으로도 피부의 밝은 크림색이 어두운 배경위에 펴낸것처럼 부각되는 효과는 평면적 기법으로 표현한 [풀밭위의 ~]보다 한걸음 앞선다.
19C 프랑스 관전파의 화가들은 과거의 거장들이 명암법을 준수했던 나머지 짙은 갈색을 남용했다.
그러한 가운데 밝은색조를 들라크르와가 사용하고 마네가 뒤이었다.마네는 중간톤을 싫어하고 인체나 물체의 입체성에도 화면의 패턴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대담한 채색법을 도입 [올랭피아] [풀밭~~~~]은 3차원을 2차원 평면으로의 도약이다.
'채색의 경우 빛을 도입할 때 그것과 상관해서 얼마만큼 그늘을 도입해야 하는가 하는 의무를 타파하고 밝은 색채를 밝은 색채 그것으로써 사용하는 가능성을 개척' 이것은 외광에 대한 색채처리이고 또 움직이는 현대의 처리도 문제 삼고 있다.
재생한다는 의미는 면밀한 대상의 관찰을 풍부한 색채로 종합하고 그 가운데 풍부한 형태가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것이다.
결국 자연 대상들은 원추.원통 구형으로 축약되어지며 그의 형태는 세잔느식의 질서로서 새로이 구성된 건축적인 견고함을 갖춘 회화 세계가 된다. 일련의 [대수욕도] [빅트와르 산]이 그러한 종합적인 구축적 자연의 구현인 것이다.대상은 모두가 약간씩 다른 시점에서 면으로 분할된 밝은 색채로 구성되어 순수조형의 의지로 구현된 것이다.
따라서 말년의 그의 회화는 대상이 하나의 조형요소로서 객관화되어 밋밋하다 싶을 정도로 중성적이고 단순하게 되어 형태요소로서 왜곡되어 있을 뿐이다.
이와같이 철저한 대상의 자기화를 거친 객관화는 그것이 재현미를 떠나서 순수회화의 조형미를 위한 형태가 되어 추상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즉 자연의 변화무쌍함의 일면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름대로 질서를 부여해 생긴 형태가 극도의 주관적인 감정과 연관이 되면 곧 추상이 되는 것이라 본다.
쇠라와 세잔느의 한계는 자연세계를 주관적 화음과 질서로 통일하려고 한 것은 무질서한 자연세계와는 독립된 새로운 리얼리티의 추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들은 인상주의 화가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세계에 머물렀고 일상적인 주제 역시 사실주의에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인상주의자들로 알려진 화가들과의 공식적인 연결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마네는 일찍이 아방가르드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다. |
모네 (claude Monet 1840 ~ 1926)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소재앞에서가 아니면 결코 붓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모네는 오래된 습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
르누아르 Renoir, Auguste (1841.2.25~1919.12.3)프랑스의 화가. 프랑스 중부 리모주 출생. 4세 때 파리로 이사하였다. |
드가 Degas, Edgar (1834.7.19~1917.9.17)프랑스의 화가. 본명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파리 출생. |
23. 후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의 뚜렷한 시각화가 이루어진 것은 1886년 제 8회 마지막 인상주의전을 들 수 있다.
기존 인상파 화가는 드가와 피사로 뿐이고 르동, 고갱, 쇠라등의 새로운 작가들이 작품이 출품되었다.
이 전시의 의미는 1880년대에 들어서면 대부분의 인상파화가들도 인상주의의 순수한 광학적 감각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후기인상주의란 명칭은 Roper Fry가 기획한 전시회에서 비롯하여 인상주의의 색채에 영향을 받은 계승이자 단지 시각효과를 넘어서 작가적 색채가 주관에서 비롯되는 각기 특징적인 주의로서 극복의 뜻을 담는다고 하겠다.
후기 인상주의자들은 소위 신인상주의를 포함하여 쇠라, 고호, 고갱, 세잔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미술을 추구하는 것이다.
화가의 눈에 의한 직접 목격된 모든 사실이 그림의 소재가 되고 자연의 탐구와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부각되는 것이 인상주의의 목적이었다.
인상주의에서 빛속에 그림의 윤곽선이 소멸되고 인상주의 화가들이 간과했던 푸생의 고전주의와 단순성, 균형, 질서, 필연적인 감각을 되살리는 데 공헌한 일련의 화가들에게 붙인 개념이다.
1910 ~ 1911년 영국의 런던에서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이란 전시회에서 유래했다. 낭만주의처럼 하나의 운동이나 경향을 지칭하지 않으며 피사로, 모네, 시슬리 등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된 보다 견고한 화면구성과 표현 내용을 중요시 했던 경향을 말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의해서 화면의 균형과 질서, 형태 등을 분해 했다면 이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를 복원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회화의 장을 개척했다는데 그 공로가 있다 하겠다.
자연을 대했을 때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인상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인상주의자들이 상실했던 깊이와 불분명한 물체의 형태 즉 입체감등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 이들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은 색면의 구성과 색채, 균형감, 표현에서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발전하여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세잔 Cezanne, Paul (1839.1.19~1906.10.22)프랑스의 화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출생. |
고호 (Van Gogh 1853-1890) 세잔느와 쇠라가 인상주의 약식을 엄격한 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을 때 고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화필을 이끌어 갔다. 1. 1881- 농부, 네델란드 풍경 목탄을 사용하는 드로잉이나 어두운 색의 유화가 대부분이며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기독교의 도덕성과 복합시키는 주제를 사용했다. 2. 1886 파리 밝은 광선, 색채로 덮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판화와 베르나르의 영향으로 색채를 평면으로 강렬하게 구사하며 윤곽선을 강조한다. 3. 1888 아를르 - 가장 왕성한 시기. 대상은 야외의 풍경이나 눈앞에 보이는 것 들이지만 주제는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것들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느끼는 주관적 감정 세계와 작가의 직접적 통화를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인상주의를 탈피하고 있다. 4. 1889 생레미 격렬하고 충동적인 붓처리로 표현주의 성격을 강조한다. 50*100cm 크기의 수평적 캔버스가 많으며 아를르 시기의 원색 사용보다 초록색, 파랑, 검은색 사용이 특징이다. 개인적이며 어느 그림에서나 화가 자신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있다. 37점의 자화상이 남겨졌다. |
고갱 (Gauguin 1848-1903) 폴 고갱은 뒤늦게 입문하여 면치 못하다가 생을 비극적인 화가이다. 1. 초기 (파리) 풍경화 주종 인상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2. 1888 클로와조니즘을 수용하여 과감한 탈바꿈을 시도 했으며 일본 판화에 심취했다. 습관적으로 그려왔던 재현적 세계에서 떠나 보이는 세계보다 작가의 상상력의 우월함을 표현하였다. 선과 색채의 추상성을 통한 신비스러운 내면세계 표현에 집중하였다. 신비스럽고 복잡한 관념의 세계를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와 색채의 종합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 종합주의 : 원시미 술이나 민속예술의 독자성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과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3. 1891- 타히티 보다 근원적인 원시적 감성을 찾기위해 타히티로 떠나 타히티의 사람들의 넓적한 몸과 갈색피부, 토속신상이 등장하고 마돈나. 이브 같은 서구의 전통예술이 주제를 소재로 하는 작품을 그렸다. 여성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표현을 많이 했으며 태피스트리 같이 표면을 장식적으로 엮어주는 색채표현을 하였다. 미신과 감정에 의해 행동하는 타히티 여인들의 표현에서 여성보다 자신이 합리적이고 우월하다는 유럽남성중심의 사고를 보인다고 지적 받기도 한다. *순수한 색채의 가능성과 표면의 장식성에서 새로운 미술의 방향을 이해했고 20C 미술의 모체가 되었다. |
쇠라 Seurat, Georges Pierre (1859.12.2~1891.3.29)신인상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
뚤르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 ~ 1901) 파리 몽마르트의 유명한 나이트 크럽인 물랭루즈를 그린 로트렉은 이 그림에서 대조적인 명암법, 전경과 후경의 도발적인 구성, 인물의 포즈, 소묘와 유채를 섞은 화법으로 드가의 인상주의 회화와 공통점을 가지고 잇다. 그는 상징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인상주의자의 카페 장면이사의 것을 느끼게 한다. |
루소 Rousseau, Henri (1844.5.21~1910.9.2)프랑스의 화가. 마이엔현(縣)의 라발 출생. 가난한 함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
24. 상징주의
1880년대의 파리의 예술동향은 상징주의 문학과 미술이었다.
상징주의는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구조적 갈등 속에서 탄생했으며 이는 서구 문화가 르네상스 이후 지향해온 정신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상실감에서 나온 태도였다.
상징주의의 뿌리는 낭만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이국적이고 신비스러운 주제를 탐구했고 이성중심의 예술에서 탈피하여 상상력을 통해 인간의 직관적인 느낌을 풍부한 색채와 보다 충동적이고 자유스러운 데생으로 표현했다.
상징주의 작가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물질적인 관념과 과학에서의 맹신에서 비롯된 기계적이 된 일상을 대신하여 감정과 욕망의 표현 감각과 꿈과 신화의 시각적 표현이 목적이 되었다.
인상주의의 미학적 한계점인 일상적이고 표피적인 모습의 단순한 시각화는 신화와 몽상의 주제로 바뀌었다.
상징주의자들은 인상주의에서 결여된 인간의 조건과 정신적 세계를 보여주는 미술은 부활시켜야 한다고 믿었고 내면의 감정과 감각을 시각화하려는 시도를 했다.
상징주의 문학이 먼저 대두되는데 보들레르는 correspondence의 소네트에서 향기, 소리, 색채는 감각뿐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전달한다고 했다.
보들레르는 미술은 눈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으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환기력이 있는 예술이라고 말하면서 상상력에 의해 표현된 미술은 본질적인 내적 실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그 뒤를 이은 상징주의 문인들은 대중적 물질주의에 혐오를 느끼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사회의 관습적 질서는 예술을 파괴하는 요소들이라고 생각했다. 상징주의 시인들이 묘사보다는 감정의 강렬함을 묘사하는 단어로 선택했듯이 화가들 역시 자연을 모방 해야하는 부담에서 자유롭게 되어 색채와 선 , 형태로 보다 광범의한 미적 감각을 시사할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 이집트, 원시미술, 중세, 근동, 그리고 민족미술의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성 보다는 직관과 감정에 의론해서 감각의 해방을 추구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감정과 내재된 관념을 찾으려 했다.
점차 비물질적 세계를 동경하고 개인적인 충동과 경험을 중시하여 도덕성을 개의치 않고 더 내성적이고 탐미적으로 혹은 데카당 하게 되었다.
고갱이 상징주의의 리더로 떠오른 이유는 회화의 독자적인 언어인 형태와 선, 색채를 통해 인간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고 그런 점에서 그는 모더니즘의 선구자이자 상징주의의 기수가 된 것이다.
초기의 상징주의 화가들은 독자적인 회화를 찾지못하고 전통적인 상징의 형태와 문학적 또는 신화적 주제를 탐구했다. 귀스타프 모로, 퓌비드 샤반느, 오딜롱 르동이 주요 상징주의 화가들이며 이들은 주제에서는 변화를 추구하나 형태, 색채등에서는 아직 전통적인 고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형상에 치중했으나 아카데미즘의 진부함에 빠지지 않과 신화나 원형 내면의 세계를 강렬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나타내려 했다. 이들은 특히 Fomme Fatale의 이미지를 담은 여성을 표현하여 다소 시대적인 남성중심사관을 나타냈다. 모로의 [살로메]등이 대표적인데 여성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권리가 강해지는데 대한 거부감이자 나약한 남성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모로는 이외에선 상징주의 작가들의 전형이 될만한 작가였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양식을 샤세리오로부터 전수 받았다.
그러나 문학 철학 고고학 신지학등의 관심에서 비롯된 전부는 그의 회화에서 정교하고 이국적인 신비의 분위기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올페우스]는 그의 첫 살롱 출품작으로서 고전의 전형에도 분위기가 주는 죽음, 고통은 상징주의를 대신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상징주의 작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퓌비드 샤반느는 일상사에서 벗어난 비현실적이고 이상화된 고대의 옛 문명을 상기시키며 따라서 아카데미시즘의 틀 안에서 새로운 미술 개념을 소개시켰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인 화가들은 전통적 상징을 사용하고 있으나 르동의 세계는 전혀 달랐다. 르동의 미술은 꿈과 상상 무의식의 신비의 세계이며 작가 자신에 의해 창조된 이미지가 사용되어 어떤 의미에서 그는 가장 순수한 상징주의자였다.
모로 Moreau, Gustave (1826.4.6~1898.4.18)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
샤반느 Pierr puvis de Chavanes (1824-1898) 모든 확실한 개념에는 그것을 옮길 수 있는 조형적 사고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 개념은 뒤죽박죽이 고 혼탁하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내면의 눈에 순수한 상태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엉킨 것을 풀어놔야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술작품은 알 속에 동물이 들어있는 것처럼 혼란한 감정속에서 태어나며 이러한 감정 세계에서의 사고를 그것이 눈 앞에 확실하게 나타날 때까지 이리저리 돌려본 다음 가능한 한 투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 다음 그것을 정확하게 옮길 수 있는 장면을 생각해 낸다. 이야기 중심의 내용보다 시각 언어에서 받은 분위기 추구하였으며 회화의 주제를 근대적인 것과는 딴판으로 기독교적인 것, 고대 향수의 우화적인 요소에서 따오기도 했다. 영원히 정지되어 있는 듯한 부동의 포즈와 그것을 감싸는 차분한 그리고 때로는 단조로운 색채, 화면의 평면성과 그 속에 자리잡은 단순화된 형태, 명상적인 리듬을 타고 큼직하게 잡힌 구도 등, 요컨대 자연주의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등의 그의 상징주의 그림의 특징이다.
25. 야수파 "야수파"는 1905년 파리의 살롱 도톤느의 전시를 보고 '야수들 사이에 있는'라고 하는데서 용어가 유래되었으며, 야수파의 대표작가 마티스는 '수단의 순수함으로 복귀하려는 용기,이것이 바로 야수파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했다.
26. 입체파(Cubism) 20세기 초 야수파(포비슴)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 입체주의라고도 한다. 1. 입체파의 탄생“자연을 원통형·구체(球體)·원추형에 의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밀 베르날에게 보내는 편지, 1904년 4월)라고 하여 “색채 속의 면(面), 그 면을 정확히 파악할 것, 이러한 면을 조립하고 융합시킬 것,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서로 결합되도록 할 것”(G.가스케 《세잔》) 등을 제작목표로 한 세잔이 이 운동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 분석적 입체파세잔풍의 입체파에서는 대상은 그것과 판별할 수 있다. 그러나 1910년을 고비로 형체는 점차 세밀하게 결정화(結晶化)되고, 사물은 현저하게 해체되어 가는 ‘분석적 입체파’의 시대가 된다. 3. 종합적 입체파1912년 입체파는 ‘종합적 입체파’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분석적 입체파가 자연히 화면구성에만 치중하여 물체가 지닌 리얼리티를 망각한 위기에서 비롯된 기법으로,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가 강력한 무기가 된다. 즉 즉물적(卽物的)으로 신문지나 벽지, 담배갑이나 트럼프 등을 화면에 붙여가는 방법이며, 최초의 파피에 콜레는 1912년 브라크에 의하여 응용되었다.
27. 독일 표현주의 20세기 초 주로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전개된 예술운동. 특색은 작가 개인의 내부생명, 즉 자아(自我)·혼(魂)의 주관적 표현을 추구하는 ‘감정표출의 예술’에 있다. 첫째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브뤼케(橋)’ 그룹으로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 로틀루프 외에 놀데, 페히슈타인도 참가하고 연차전(年次展)과 집회가 조직되었다. 이 그룹은 독일 현대회화의 출발점을 이루었고 프랑스의 포비슴과 북유럽의 뭉크에 고취되었다. 그 중심인물은 원시미술에서 생명력을 파내고, 격앙된 색채와 예리한 관찰로써 대도시의 가두풍경을 그린 키르히너이다. 둘째는 10년 베를린에서 바르덴이 창간한 예술잡지 《슈투름》 및 같은 이름의 화랑(畵廊)에 의하여 만들어진 ‘슈투름그룹’으로, 오스트리아의 화가 코코슈카의 자아와 외계의 상극을 새긴 심리적 초상화로 대표된다. 바르덴은 자기 나라의 젊은 전위화가(前衛畵家)를 화랑에 결집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미래파, 초기의 프랑스 큐비스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잡지에는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논문 및 들로네(클레의 번역에 의하여), 레제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전위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약 15개국 90명의 작가와 366점의 작품을 모아 일찍이 보지 못한 최대의 국제전을 열었다. 셋째로는 칸딘스키, 마르크를 중심으로 11년 뮌헨의 신예술가동맹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결성한 청기사(靑騎士) 그룹이다. 구성원으로는 이 밖에도 클레, 야우렌스키, 마르케, 쿠핀, 뮌터 등이 있고, 전람회는 뒤에 드레스덴의 ‘다리’, 베를린의 ‘분리파협회’, 프랑스 작가(루소, 피카소, 브라크 등), 러시아 작가(말레비치)를 추가하여 확대시켰다. 이론가인 칸딘스키는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을 발표하여 유물론과 리얼리즘에 지배당하고 있는 미술에 반기를 들었으며, 화가의 내적필연(內的必然)에서 우러나는 정신성·환상성을 주장하였다. 28. 다리파 (Die Bruke, 1905 - 1913)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파(畵派)로써 1905년 드레스덴에서 E.키르히너, K.슈미트로틀루프, E.헤켈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으며 당시 국제적으로 고조되고 있던 혁명정신을 회화상으로 실현하는 다리가 되고자 한 것이다.
29. 청기사파 20세기 초에 활약한 독일 표현주의 회화의 유파로써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브뤼케[橋]’, 1909년 뮌헨에서 결성된 ‘신예술가동맹’에는 당시 신진기예(新進氣銳)의 키르히너, 슈미트 로틀루프,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등이 가담하여 종래의 독일인상주의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30. 신조형주의 네덜란드의 P.몬드리안을 중심으로 한 기하학적 추상주의의 일파 또는 그 운동. 신조형주의라고 번역한다. 이 운동을 주도한 몬드리안은 1912년에 파리에서 큐비즘을 공부한 뒤 더욱 이 경향에 빠져, 수평선과 수직선, 또는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이 엮어내는 면과 선 및 삼원색만에 의한 청결한 색채효과의 표현에 힘썼다. 31. 바우하우스(Bauhaus)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구상하여 바이마르에 설치한 조형(造形)학교. 이전에 있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하여 설립하였다. 32.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1940년대 말∼60년대 초에 미국에서 전개된 미술의 한 동향. 본래는 1919년에 O.헤르초크가 독일의 표현주의 잡지 《슈투름(폭풍)》에서 추상적인 표현주의를 구상적인 그것에 대치해서 사용한 것이다. 33. 팝아트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구상미술의 경향. 34. 절대주의 지상주의(至上主義), 절대주의. 러시아혁명시대에 화가 K.S.말레비치가 창시한 선구적 추상회화의 이념이다.
35. 다다이즘 (Dadaism) 제1차 세계대전(1914~18) 말엽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 다다(dada)라고도 한다. 독일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베를린·하노버·쾰른 등 세 곳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R.하우스만, G.그로스, W.메링 등이 주된 예술가였는데, 여류인 H.헤히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쾰른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M.에른스트와 J.T.바르겔트로 대표된다. 바르겔트는 잡지 《선풍기(扇風機)》의 창간자이기도 하며, 에른스트와 공동으로 제작을 시도한 일도 있는 화가로서 아상블뢰즈를 잘하였다. 에른스트의 기법(技法)은 콜라주이며, 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주전(展)은 이제까지의 회화개념(繪畵槪念)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그는 24년에 초현실주의(surr럂lisme) 운동에 참여하여 독특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타주(frottage)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그것을 보면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과정은 종이 한 장 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파리에 있어서의 다다이즘 운동은 19년에 이루어졌다. 자살한 23세의 시인 J.바셰 외에 ‘검은 유모어’의 A.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으로서 빼놓을 수 없으며, P.엘뤼아르, B.페레, L.아라공 등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뉴욕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展) 아모리 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36. 초현실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20세기의 문학·예술운동. 쉬르레알리슴이라고도 한다. 독일 낭만파 문학에서 영향받은 독일 낭만파의 회화는 O.룽게나 C.D.프리드리히의 회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무한대의 동경을 그 특질로 삼고 있다. 또 그들의 작품에는 종교적 감정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30년대에 접어들자, J.위녜의 《쉬르레알리슴 소시선(小詩選)》, 브르통의 《새벽》, 엘뤼아르의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시집 《민중의 장미》, 화가인 S.달리의 《비합리의 정복》이라는 편집광적 비판의 방법에 관한 논문이 쏟아져나옴으로써, 문학·회화 양면에 걸쳐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할 수 있다. 이 무렵부터 초현실주의는 국제선전운동으로 나타나, 36년에는 런던에서, 38년에는 파리에서 브르통, 엘뤼아르가 중심이 되어 ‘국제쉬르레알리슴전(展)’이 열렸다. 그 사이 브르통의 《미친사랑》, 엘뤼아르 시집, 로트레아몽의 《전집(全集)》이 출판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브르통은 36년의 에스파냐내란 이래로 공산당에 접근하기 시작한 엘뤼아르와 드디어 결별하였다.
<초현실주의의 기법들>1. 자동주의 automatisme오토마티즘은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에 투영하려는 초현실주의의 의도를 나타낸 대표적 기법으로, 가능한 의식(고정관념,이성들의 영향)이 배제된 상태에서 손에서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움직임과 형태를 작품화한 것이다. 에른스트가 발견한 프로타주와 오스카 도밍게즈가 작품에 이용한 데칼코마니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형상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오토마티즘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 분야에서의 오토마티즘은 미술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떠오르는 구절들을 이성의 통제없이 무의식적으로 써내려가는 방법을 말한다. 초현실쥐의 미술의 초기인 1920년대에 이 기법이 주로 쓰였으며 대표적 작가로는 마송과 미로가 있다. 2. 프로타주 frottage에른스트가 1925년 여름에 마룻바닥의 얼룩을 보고 있다가 거기에서 온갖 환각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고 발견한 기법으로, 나무 파편이나 나뭇잎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을 문질러 그림이 떠오르게 하는 수법을 말한다. 이 기법은 우연한 효과를 노리는 것뿐 아니라 몇가지 피사물을 의식적으로 짜맞추는 경우도 있고 혹은 거기에서 나타난 무늬에서 힌트를 얻어 붓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지 자체의 우연성을 중시하는 프로타주로 제작한 초기의 34점의 작품은 에른스트는 박물지 (historre naturelle)라는 책자로 출판했는데 여기에 등장한 형상들은 문질러 나타낸 나뭇잎,헝겊 따위가 인간의 머리,괴물,바다 풍경등으로 변모된 것이다. 3. 데칼코마니 decalcomanie 轉寫法원래는 도기나 유리기구등에 특수한 종이에 그린 그림을 옮겨서 염색하는 기법으로, 회화에서는 미끄러운 성질의 종이에 물감을 칠하고 그것을 접었다가 다시 피거나 또는 다른 종이를 그 위에 대고 눌렀다가 뗄 때 생기는 우연한 효과를 작품에 이용한 것을 의미한다. 이 기법에 따른 우연한 형태 - 산맥, 산림수목, 인간장기 등 - 에 부분적으로 가필을 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영상을 표출하도록 한다. 1935년 오스카 도밍게즈가 그의 과슈작품에 처음으로 도입했으며 에른스트도 2차세계대전 직전에 종종 이용했다. 예전의 그림붙이기에 사용되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달리 즉, 완성된 그림을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생기는 우연한 얼굴이나 어긋남의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4. 데페이즈망 depaysement 轉置,轉位法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것으로 문학에서 '해부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로트레아몽의 싯귀는 데페이즈망의 적절한 예라 하겠다. 초현실주의 회화에서는 낯익은 물체를 뜻하지 않은 장소에 놓으므로써 꿈속에서 밖에 없는 화면을 구성했는데, 이는 심리적 충격뿐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데페이즈망의 대표적 작가로는 마그리트를 들 수 있으며 꼴라주와 오브제도 일종의 전위라 할 수 있는데 이 방법들은 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데 기여했다. 5. 레이요그램 rayogram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감광 재료 위ㅣ해 물체를 얹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명암 속에서 추상적 사진을 찍은 것이다. 포토그램과 같은 것으로 파리에 있던 미국의 초현실주의자인 만 레이가 1923년 블룸이란 잡지 4월호 표지에 발표하면서 이 명칭을 붙였다. 후에 그는 자작집에서 레이요그래프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 1921년 자비로 출판의 한정판으로 레이요그램 작품을 트리스탄 짜라의 시와 함께 발표한 바 있다. 6. 꼴라주 collage화면에 인쇄물,천,쇠붙이,나무조각,모래,나뭇잎 등 여러 가지 물질을 붙여 구성하는 기법으로 초현실주의 작품에서도 기성품에 손질을 가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물체끼리 조합시키므로써 별개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비유적,연상적,상징적 효과를 노리는 방법으로 쓰인다. 에른스트는 1919년부터 초현실주의적인 꼴라주작품을 시도했는데, 그의 작품은 잡지,카탈로그, 삽화등의 그림을 부분적으로 오려 아무 관련성없이 재배치하여 부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는 환상의 세계를 일깨운다. 또한 1924년 <두 어린이가 나이팅게일에 놀랐다>라는 작품에서는 문짝,손잡이 등의 사물을 꼴라주하여 초현실주의 사상에 부합되는 이미지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7. 오브제예술과 관련없는 물견,또는 그 부분을 본래의 일상적 용도에서 떼어내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잠재한 욕망이나 환상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 발견된 오브제, 환영 오브제, 봉상적 기능의 오브제, 존재적 오브제 등
37. 파리파 파리화파는 양차대전사이에 관용 분위기속에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가능한 파리에서 실행되었던 모든 종류의 미술 - 형식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초현실주의부터 추상, 창조 그룹의 철저한 형식주의에 이르기까지 - 를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브라크, 레제, 마티스, 피카소 까지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파리화파의 대표자로 칭해진는 것은 '악마들' 로 일컬어지는 표현주의자들의 작은 집단이다. 이탈리아 출신 모딜리아니, 러시아 출신 수틴, 프랑스 출신 모리스 위트릴로, 불가리아 출신 파신 등으로 가난과 소외속에서 무질서한 생활을 하며 비참하게 산 저주받은 보헤미안 들이었다.
38. 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新卽物主義) 20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반(反)표현주의적인 전위예술운동. 신현실주의 또는 독일어로 노이에 자흐리히 카이트라고 한다.
39. 플럭서스 플럭서스는 1960년대에 독일에서 시작되어 뉴욕과 북구의 수도인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으며 일본과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도 비슷한 활동이 독자적으로 펼쳐졌다. 이 운동은 대중문화에 의존하지 않고 아방가르드 미술가와 음악가와 시인들이 창조해 나갈 새로운 문화를 추구했으며 게릴라 극장과 거리 공연, 전자음악 연주회 같은 초기의 플럭서스 이벤트는 1960년대와 연결지어 생각되는 성적 충동과 무정부주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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