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바이얼린 협주곡
모차르트는 협주곡을 많이 작곡했다. 그런데 17세(1773년) 때부터 죽음의 해에 이르기 까지 계속 썼던 피아노 협주곡을 제외한 나머지 협주곡들은 거의 일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작곡되었다. 그점에서 특히 현저한 것이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모차르트는 모두 8곡의 바이얼린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그중에서도 제 6번, 제 7번, 그리고 소년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아델라이데>등 3곡은 과연 모차르트 자신이 작곡한 것인지 여부가 의심되고 있다.
<제1번>부터 <제5번>까지 모차르트의 곡이 확실시 되는 이 곡을 속칭 <잘츠부르크 협주곡>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5곡은 1775년(19세) 4월부터 12월까지 8개월 동안에 모두 잘츠부르크에서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경탄할 만한 속필이다.
이 <잘츠부르크 협주곡>은 모차르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화려한 기교를 발휘 할 수 있는 여지를 독주자에게 충분히 주면서 사교음악으로서의 명랑성을 잘 갖추고 있다. 얼핏 그 단순성과 명쾌함이 다양성이라는 점에서 부족함이 없지 않지만, 이 바이올린 협주곡들에는 그의 고향 잘츠부르크를 비롯하여 남독일의 음악이 풍부하게 반영되어 잇다.
그 5곡 중에서도 제3번, 제4번, 제5번이 단연 뛰어나서 연주회에서도 자주 다루어지고 있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은 1775년 9월 <제2번>이 작곡된 3개월 뒤에 완성 되었다. 전체적인 구성은 전 2작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그 규모의 크기나 기법의 확실성, 그리고 표현의 폭과 예술적 가치 등 모든점에서 비약적 발전을 보인다.
<제1번> <제2번>은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적 스타일이 아주 강했다. 그러나 이 <제3번>부터는 모차르트의 독자적 스타일이 강하게 앞선다.
예컨대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의 대화적 성격이나 관악기를 중히 다루는 점들에 있어서 그러한 점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곡 이후의 3곡의 <잘츠부르크 협주곡>은 또한 교육적인 목적에도 자주 사용되는데, 그 까닭은 형식적인 완전성과 음색의 아름다움, 더 나아가서는 그 풍부한 내용 때문인데, 그 점에서는 이곡도 나머지 2곡에 결코 못지 않는다.
1775년에 작곡된 5곡에 달하는 <잘츠부르크 협주곡>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작품은 <제 4번 D장조> 이후 약 2개월을 두고 12월 20일에 완성 되었다. 일련의 작품의 최후곡 답게 당당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곡에 앞선 4곡과 같은 계열에 속하고 있다는 것은 전곡에서 느껴지는 프랑스적인 것으로 알수 있는데 그와 동시에 독일적인 색채도 점점 짙어가고 있다. 대범한 음악의 흐름이 전곡을 꿰뚫고, 단순하면서도 젊고 맑은 그 작풍은 다음 단계의 새로운 스타일을 암시하는 것 같다.
구성상의 특징으로는 세부에 대한 배려가 전체적인 통일을 위해 뒤로 물러서고 있는 점, 제1악장에서 총주의 제시부와 그 다음의 독주 제시부 사이에 솔로에 의한 아다지오의 서주가 삽입되고 있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제 5번>이 터키협주곡이라고 불리기도하는데 그 이유는 제 3악장 트리오 부분에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터키 행진곡 스타일의 리듬이 쓰이기 때문이다.
Arthur Grumiaux 1921 -1986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왕립음악원과 샤를루아에서 공부하였고 나중에는 파리에서 조르주 에네스쿠에게 배웠다.
1939년 비외탕상(Vieuxtemps Prize)을 받았고 1년 뒤에는 벨기에 정부가 주는 '거장상'(Prix de Virtuosité)을 처음으로 수상하였다.
1940년 브뤼셀에서 데뷔한지 얼마되지 않아 예술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벨기에가 점령됨으로써 중단되었으나 1945년 다시 연주생활을 시작했고, 그해 런던 무대에 데뷔하여 빠른 속도로 유럽과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1949년 그는 스승이던 알프레드 뒤부아의 뒤를 이어 브뤼셀 음악원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베토벤, 모차르트 소나타(클라라 하스킬이 반주)를 연주한 음반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그의 연주는 세련된 우아함과 완성된 기교를 함께 갖추고 있다. 벨기에 정부로부터 1973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글출처: 웹사이트 / 음원출처: 향기로운 삶의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