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訪金居士野居*
秋雲漠漠四山空 (추운막막사산공) 가을하늘 아득히 흰구름 떠가고 온 산은 고요한데
落葉無聲滿地紅 (낙엽무성만지홍) 나뭇잎 소리없이 떨어져 땅 가득 붉게 물들였네
立馬溪邊問歸路 (입마계변문귀로) 시냇가에 말 세우고 돌아갈 길 묻나니
不知身在畵圖中 (부지신재화도중) 이내 몸 있는곳 어디인가, 그림속에 있는줄 미처 몰랐네
* 번역 2 *
가을 구름도 떠가고 온 산은 고요한데,
나뭇잎 소리 없이 떨어지니, 온 땅은 붉기만 하네.
시냇가 다리 위에 말을 세우고 돌아가는 길을 물으니
이내 몸 있는 곳 그림 속인 줄 몰랐네
* 東池詠蓮(동지영연) - 동쪽 연못의 연꽃을 읊다
翠蓋田田冒一池(취개전전모일지) 푸른 일산 반듯반듯 연못을 덮었고
紅衣濯濯雨晴時(홍의탁탁우청시) 비개면 붉은 옷이 완연하구나.
經過固合耽佳句(경과고합탐가구) 볼 때마다 아름다운 시구 즐기고 싶어
莫怪吾行每自遲(막괴오행매자지) 나도 몰래 발걸음 늦추어지네.
賞蓮常欲共臨池(상연상욕공임지) 연꽃 보려 연못에 함께 가고파
況復年皆小壯時(황복연개소장시) 하물며 모두 젊었다.
有約不須嬚晝短(유약불수렴주단) 언약하며 낮 짧음을 탓하지 말라.
也冝明月夜遲遲(야의명월야지지) 달 밝은 늦은 밤이 좋으니.
亭亭萬朶滿平地(정정만타만평지) 아름다운 만 송이 연못에 가득해
紅綠相輝映一時(홍록상휘영일시) 붉은빛 푸른빛 함께 비치네.
謾道風來香荏苒(만도풍래향임염) 바람부니 향기 온다 말하지 말라
恐敎吹吹落顚風遲(공교취락전풍지) 꽃 질세라 잔잔히 불기를 원하노라.
夜來狂雨雜顚風(야래광우잡전풍) 밤사이 미친 비에 바람도 섞여
池上紅衣掃地空(지상홍의소지공) 연못 위 붉은 꽃 쓴 듯이 없어졌구나.
欲把靑荷成一醉(욕파청하성일취) 푸른 연잎잡고서 취하고 싶지만
誰沽美酒滿郫筒(수고미주만비통) 비통에1) 가득한 술 누가 사려나.
1)비통(郫筒) : 술통 이름. 비현(郫縣)에 큰 대나무가 많아서 그것을 잘라 술통을 만들었으므로 이를 비통 또는 비통주(郫筒酒)라고 한다.
<삼봉 정도전 선생 약력>
정도전(鄭道傳, 1(342년[2]~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무신(武臣), 유학자(儒學者)이자 시인(詩人)이며, 외교관(外交官), 정치가(政治家), 유교 사상가(儒敎 思想家), 유학 교육자(儒學 敎育者)이다. 조선의 초기 성리학자의 한사람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三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별칭은 해동장량(海東張良)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 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여러 번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과 제2차 요동 정벌(1392)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사형되었다. 성리학이념 보급에 기여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나중에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폄하되었다.
조선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던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의 대명사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위키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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