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漢詩) 마당 ♣/- 우리 漢詩

촌은 유희경 선생과 부안 기생 이매창의 사랑 이야기

Bawoo 2014. 6. 28. 12:13

 

서러운 만남

 

동인과 서인의 정쟁이 극에 달했던 1591년 이른 봄,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과 전운이 감도는 나라를 걱정하며 또한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국상이나 사대부상에 자주 불려 다니며 상례를 집행하던 중인의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역시 그를 기방(妓房)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침류대를 중심으로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 시단을 이끌었던 위항문학의 선구자 유희경은 천리길을 내려와 부안 기생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을 만났다. 당시 나이 마흔여덟 살의 유희경은 스물의 기녀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만다. 서울에서부터 매창에 대해 들어 왔는지라 스물여덟의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독수리는 너무 높이 날아서 국경을 넘는 줄도 모른다’고 했다. 촌은과 매창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촌은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증계량(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를 바쳤다.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랑명)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라는 이름 들었는데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싯구와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진동했지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무산 신녀가 삼청(三淸)에 내려온 듯하여라

 

 

 

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매창은 이미 서울까지 알려진 기생 시인이었다. 촌은은 매창을 무산의 신녀에 비유하면서 극찬하고 있다. 초회왕이 무산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 속에 신녀가 나타나 교합했다는 신녀는 시집도 가기 전에 죽은 한을 풀기 위해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한다. 그 신녀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삼청인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에 내려온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桃花紅艶暫時春(도화홍염 잠시춘) 복사꽃 붉고 고운 짧은 봄이라

 

撻髓難醫玉頰嚬(달수난의 옥협빈) 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神女下堪孤枕冷(신여하심 고침냉) 신녀라도 독수공방은 견디기 어려우니

 

巫山雲雨下來頻(무산운우 하래빈) 무산의 운우지정 자주 내리네

 

 

그해 봄 둘은 운우의 정을 나누며 로멘스와 불륜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촌은 유희경은 「희증계랑(戲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로 신선의 세계에서 깨가 쏟아지는 즐거움을 그리고 있다. 사실 이런 유형의 시는 여인을 희롱하는 것으로 여겨 사대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당시 유희경은 중인의 신분인데다 매창과 육체를 교합한 상태라 스스럼 없이 지은 듯하다. 그만큼 이들에게는 세속의 체면이나 권위는 필요치 않았다. 둘 간의 사랑과 시를 통한 화답이 얼마나 절정했으면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이라고까지 하였다. 황진이, 송도삼절이라 불리는 서경덕, 박연폭포처럼 말이다.

 

 

 

이별 그리고 그리움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400여 년 전 애절한 별리를 노래했던 연인들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또 만남과 이별이라는 서러움을 시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부안 기생 매창은 한시에 능했을 뿐 아니라 거문고 연주도 매우 뛰어났다. 배꽃이 푸른 하늘에 비처럼 떨어질 때 이별한 님이 가을이 짙어가도 소식 없으니 그이도 나를 생각하기나 하는지 애절함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수절가는 애절하기만 하다. 쓸쓸한 가을밤에 들려오는 거문고 가락이 더욱 시렸으리라.

유희경이 서울로 간 사이 임진왜란이 터졌다. 촌은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고 있던 터라 매창을 만날 겨를이 없었다. 매창은 촌은과 헤어진 동안 수십 편의 시를 통해 님에 대한 그리움의 한을 노래했다.

 

 

 

春冷補寒衣(춘냉보한의) 봄날이 추워 겨울옷을 꿰매고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사창에는 햇살이 비치는구나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기니

 

珠淚滴針絲(옥루적침사) 옥루가 바늘과 실을 적시는구나

 

 

매창의 시「자한(自恨)」에서는 유희경이 떠나고 없는 봄은 너무나 추워 추울 때 입던 옷을 다시 꺼내어 수선하면서도 그리운 마음에 바느질이 되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서러움이 진하게 베여 있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워 글을 쓰자 하나 / 글을 쓰기도 전에 눈물이 가득하구나’ 마치 남해로 유배온 서포 김만중이 어머니 생신날 지은 「사친시(思親詩)」를 연상하게 한다. 유희경 역시 전쟁 중이라 만나지 못하는 매창을 그리워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계랑의 집은 낭주[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이 몸이 사는 집은 서울이라네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서로가 그리워하지만 보지 못해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나무에 비내리면 애가 끊기는구나

 

 

 

촌은은 「회계랑(懷癸娘)」에서 서울과 부안이라는 천리길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동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애가 끊기는 고단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은 촌은집에 여러 편 실려 있다. 「도중회계랑(途中懷癸娘)」에서는 가인을 이별한 후 남쪽 하늘이 막혀 떠도는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과 파랑새마저 소식을 전하지 않음에 벽오동에 떨어지는 찬비소리 들려 차마 견디지 못하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아내 외에는 단 한 번도 마음을 준 여자가 없었던 유희경, 기방 출입도 자제했던 그가 스물여덟이나 어린 매창에게 빠진 것은 둘 다 시대를 초월한 시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그들은 첫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전쟁으로 인한 이별 후에도 사랑의 노래를 천리길 머나먼 곳으로 주고 받았다.

임진왜란으로 이별해야 했던 두 연인은 15년만에 다시 만난다.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부안으로 달려가야 했을 유희경이 왜 서울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스무살의 꽃다운 처녀가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독수공방 시킨 촌은의 심사는 무엇이었을까. 그 긴 청춘을 매창은 수절해야 했다. 기생이라는 신분임에도 정조를 지킨 그녀의 심사는 또 무엇인가. 전쟁이 끝난 후 매창은 수많은 명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지만 오로지 마음을 받친 늙은 시인만을 그리움으로 간직한 것이다.

 

 

 

매창과 허균

 

매창의 명성은 전국에 이미 알려져 그녀를 만나 보기 위해 부안으로 찾아오는 사대부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유희경만을 사랑했기에 헤어져 있었던 세월동안 외로움을 지켜왔다. 「증취객(贈醉客)」은 기녀(妓女)로 살아가지만 양반 사대부를 어르는 품격과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醉客執羅衫(취객집나삼) 술 취하신 님 명주저고리 당기시니

 

羅衫隨手裂(나삼수수렬) 잡혔던 명주저고리 찢어졌다오

 

不惜一羅衫(불석일나삼) 명주저고리 찢겨짐은 아깝지 않지만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단지 맺은 정 끊어질까 두렵구

 

 

규방을 찾아든 손님이 명주 저고리를 찢는 실수를 범하였지만, 그보다 님이 주신 온정이 끊어질까 두렵다는 여유는 매창이 지닌 속 깊은 마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촌은의 사랑이 알박혀 있어 육체는 당연이요, 마음 한 올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10년 별리의 세월은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래도 한 조각 마음이라도 준 님이 있었으니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였다. 이귀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허균은 1601년 충청도와 전라도 해운판관이 되어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된 지 서너 달 뒤였다. 이귀는 훗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인물이다. 허균의 「조관기행」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1601년 7월 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얘기를 나눌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매창은 두 번째 남자 이귀가 떠난 후 우리나라 최초의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을 만나 10년 동안의 정신적인 우정을 쌓았지만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도 촌은과의 이별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균이 매창과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기생이 아닌 인간으로서 대우를 하였고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플라토닉사랑 (Platonic love)이었다. 그래서 허균은 매창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며 걱정하고 위로하였다.

 

 

15년만의 재회와 매창의 죽음

 

 

1592년 이별했던 촌은과 매창은 1607년 15년 만에 다시 만난다. 그 긴 세월 매창의 애간장을 녹였던 촌은이 63세의 노인이 되어 나타났지만 매창은 더 없는 사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부남이었던 유희경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 옛날 헤어지면서 열흘 만이라도 시를 논하면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從古尋芳自有時(종고심방자유시) 예로부터 꽃향기 찾을 때 있다지만

 

樊川何事太遲遲(번천하사태지지) 번천[당나라 시인 두목]은 어인 일로 이리도 더딘고

 

吾行不爲尋芳意(오행불위심방의) 내가 가는 것은 꽃향기 찾아가는 뜻만 아니라

 

唯趂論詩十日期(유진논시십일기) 오로지 시를 논하자던 10일의 약속을 좇음이라오

 

 

칠언절구「중봉계랑(重逢桂娘)」은 환갑을 지난 촌은 유희경이 매창과의 어렵고도 중요한 만남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다시 만남이 기녀 매창의 육체적 관계가 아닌 문학을 논하기 위해서라고 단정하고 있다. 15년 전 매창은 헤어지면서 열흘만이라도 더 머물며 시를 논하자고 애원한 적이 있었다. 촌은은 그 약속을 핑계로 재회하지만 마음 속에는 깊은 사랑이 샘솟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시를 핑계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한 연인은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3년 후인 1610년 매창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촌은은 매창의 부고를 듣고 애도의 시인 「도옥진(悼玉眞)」이라는 칠언절구를 읊는다.

 

 

香魂忽駕白雲去(향혼홀가백운거) 향기로운 넋 홀연히 흰 구름 타고 가니

 

碧落微茫歸路賖(벽락미망귀로사)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只有梨園餘一曲(지유이원여일곡) 다만 배나무 정원에 한 곡조 남아 있어

 

王孫爭設玉眞歌(왕손쟁설옥진가)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

 

 

매창의 죽음을 끝내 잊지 못해 양귀비의 이름을 빌려 지은 시이다. 이원(梨園)에서 현종을 모시고 예상우의 곡을 연출하던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 그것은 바로는 현종과 양귀비[양옥진]의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고 슬프게 묘사한 노래였다. 그도 역시 자신의 사랑이 불륜이었음을 인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촌은이여, 매창이여

 

남해 용문사에 소장된 『촌은집책판』은 남해의 보물이다. 천민 출신의 위대한 시인 촌은 유희경과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는 버금가는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이매창의 사랑노래가 오롯이 담겨 있기에 그러하다.

 

유희경은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정업원 아래 있던 자기 집 시냇가 흐르는 개울가에 있는 바위를 침류대라 하고, 이곳에서 이름있는 문인들과 시로써 회답하였다. 그는 북악단풍 등 20경을 시로 지어 읊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한 시집 『침류대시첩』을 펴냈다. 그는 당시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여 위항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도봉서원을 건립하고 사액을 받은 남언경으로부터 문공가례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을 집례하면서 이름이 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으며 광해군 때 이이첨이 폐모의 소를 올리기를 간청하였으나 거절하고 그와 절교하였다. 인조반정 후 왕은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가의대부로 승진시켰다.

문집으로 『촌은집』, 저서로 『상례초』가 있다.

 

이매창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본명은 향금(香今)으로 매창은 그의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다 하여 계생(桂生)과 계랑(桂娘)으로도 불리고 있다. 그녀는 시, 가무, 가야금에 능통한 다재다능한 여류 예술인으로 주옥같은 한시 수백수를 남겼다고 전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매창의 작품으로는 시조 1수와 개암사에서 간행한 『매창집』에 수록된 5언절구 20수, 7언절구 28수, 5언율시 6수, 7언율시 4수로 한시 58수에 불과하다. 시문학사상 한 여인의 시집이 이렇게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고 한다.

 

     < 자료 출처: 정보-'김병종 님의 화첩기행'이란 책, 수집- http://blog.daum.net/jsh6627/우영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