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형墨刑
유현숙
나뭇잎을 덮고 잠들었습니다 잠 속으로도 비는 들이칩니다
볕 좋은 오후에는 집을 나서지만
골목 끝이 짧고,
그만 되돌아옵니다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춥습니다
단단한 목질인 자단紫檀은 짜개면 도끼날에 자색 물이 묻어납니다
땅이 뜨거워지는 여름과 지리한 장맛비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열과 습풍이 나무뿌리에 그립게 스민 까닭이지요
내 안에다 자자刺字한 이야기들 말고는 무엇으로도 형상하지 못한
젊은 날의 문자들이 있습니다
자단 같은 날들이라 부를까요
천둥이 몇 차례 울고 바람이 붑니다 높은 산의 그늘에서는 철쭉꽃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그늘에 누운 꽃은 통째로 말라가고
당신을 보낸 뒤 나는 아직도 내실內室의 커튼을 걷지 못합니다
마루에서도 방에서도 커튼은 무겁습니다
오래전에 당신은 내 살을 타서 열고 별 한자리를 묻었지요
살을 꿰어 시침질한 자국은 당신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라 여겨도 되는지요
나는 쓸쓸해져서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사기 찻잔에 스민 차 맛처럼 쓸쓸함이란 나를 아프게 합니다
미궁에서 보내는 수금囚禁의 시간입니다
지난날이 깊어지면 늘 이렇습니다 당신이 떠난 뒤 잠 속으로도
비가 들이칩니다
<계간 『미네르바』 2014년 봄호 발표>
유현숙 시인
2001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과 2003년 《문학 선》 신인상을 통해 등단.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시집으로 『서해와 동침하다』(문학의전당, 2009)가 있음.
< 출처:http://cafe.daum.net/silverhischool/제비꽃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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