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14일(현지시간) “7월 6일 현재 상공업 대출의 총 규모(잔액)가 1조7300억 달러(약 1760조원)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2008년 9월 금융위기 직전 상공업 대출 잔액은 1조6100억 달러였다. 지금의 상공업 대출 규모는 금융위기 직전보다 1200억 달러 정도 많다. Fed는 “상공업 대출은 금융위기 때문에 2010년엔 25% 정도 급감했으나 점차 되살아나 위기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고 설명했다.
상공업 대출은 제조업체와 서비스업체 운영자금, 설비 리스 대금 등을 합한 금액이다. 금융회사 전체 대출의 22% 정도다. 가계대출과 함께 실물경제 활력을 가늠하는 온도계로 통한다. 상공업 대출은 가계대출보다 회복이 더딘 게 보통이다. 상공업 대출이 3년여 만에 회복된데 비해 가계대출은 2010년 저점에 이른 뒤 반년 만에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개인 블로그에서 “제조업과 서비스업 회사들의 구조조정이 가계의 디레버러지(부채 축소)보다 느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상공업 대출 정상화는 일시적 현상은 아닌 듯하다. 이날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씨티그룹 최고재무책임자인 존 거스패치는 “기업 대출 증가 추세가 아주 폭넓은 현상”이라고 말했다. 최근 Fed가 시중은행 대출 담당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60% 이상이 대출을 늘릴 계획이라고 응답했다.
전 Fed 이사인 프레드릭 미시킨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상공업 대출 증가는 신용창출(Money Creation) 기능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신용창출은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 공급한 돈이 뻥튀기 되는 과정이다.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 대출하면 시중은행은 그 돈을 민간 기업이나 가계 등에 재대출한다. 그러면 경제 동맥에 피가 돌면서 경기가 활기를 띤다. 금융 위기가 오면 이 과정이 단절돼 신용창출이 위축된다. 미국 시중은행들은 위기 이후 양적완화(QE)와 제로금리 정책을 활용해 거액 자금을 마련했다. 하지만 돈을 떼일까 두려워 민간분야에 빌려주지 않았다.
신용창출은 중앙은행 통화정책이 효과를 낼 수 있게 하는 핵심적인 금융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QE의 아버지’인 리하르트 베르너 영국 사우스햄턴대 교수는 “신용창출 기능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으면 기준금리 인하와 QE 등이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이다. 일본은 1994년 이후 제로금리 정책을 쓰고 QE를 실시했다. 하지만 신용창출 기능이 살아나지 않아 장기 디플레이션과 침체를 겪었다. 이런 일본과 달리 미국은 위기 6년여 만에 신용창출이 사실상 정상화했다. 미 금융 시스템의 복원력이 뛰어나다는 증거다.
요즘엔 유로존(유로화 사용권)도 신용창출 위축에 시달리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공급한 돈이 시중은행을 거쳐 다시 ECB 금고로 돌아오고 있다. 그 바람에 제로금리 와중에도 그리스 등 남유럽에 돈 가뭄이 심한 까닭이다.
미국의 신용창출 정상화는 재닛 옐런 Fed 의장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이다. 전임자인 벤 버냉키보다 수월하게 경제를 운용할 수 있어서다. 미국 경제 전망도 밝다. 블룸버그는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올 1분기 미 경제 성장률이 -2.9%(연율)까지 떨어졌지만 돈이 돌면서 Fed 정책의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돼 하반기 성장 전망이 밝다”라고 전했다. 월가 전문가들은 이달 30일 발표될 올 2분기 미 성장률을 3.3%로 전망하고 있다.
◆신용창출(Money Creation)=중앙은행이 공급한 돈이 시중은행 대출과 예금 과정을 통해 증폭되는 현상.
한국은행(BOK)이 100만 원을 시중은행에 공급하면 시중의 통화량은 100만 원보다 더 늘어난다. 대출된 돈이 다시 은행으로 들어오면 일정 비율의 지급준비금만 중앙은행에 예치하고 나머지를 또 대출하면서 시중 통화량이 늘어나는 원리다. 그런데 시중은행이 돈을 떼일까 두려워 민간부분에 대출하지 않고 끌어안고 있으면 중앙은행이 공급한 돈이 금융권만 맴돌 뿐 실물경제 회복은 어려워 진다.
<출처: 중앙일보-강남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