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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 시 두 편

Bawoo 2014. 8. 1. 23:42

종로 5가
남산 등 위에서 본 옛 서울의 전경 사진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半島)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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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산천

 

진달래 산천

 

길가엔 진달래 몇뿌리

꽃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묘비 하나

머물고 있어요.

 

잔디밭엔 장총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 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살이 튀는 산허리를 너머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뿌리

곷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신동엽(1930~1969) 전 시인
데뷔: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등단

                  <자료 출처 : 시-책 '시인을 찾아서/ 프로필-다음 검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