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출 수 없는 ‘아르놀피니’의 좀비 같은 인상
……“화가들의 제왕, 그의 완벽하고 정밀한 작품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얀 반 에이크의 뛰어난 기량을 평한 동시대 화가의 말이다. 사실적 묘사에 뛰어난 그의 감각은 매력적인 두 명의 초상화가 있는 <아르놀피니의 결혼>에서 완벽하게 드러난다.…… 이에인 잭젝 「명화의 재발견」
영국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는 <아르놀피니의 결혼> 혹은 <아르놀피니의 약혼>이라는 그림이 있다. 세로 82cm에 가로가 60cm이니까 펼친 신문 정도의 크기다. 약간 비열해보이는 인상의 부르주아 아르놀피니와 그의 정인이 서약식을 하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결혼의 서약인지 약혼의 서약인지 아직 미술사가들 사이에 합의된 바가 없다.
그림 속 여성이 임신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당시의 패션스타일 인 듯 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보다는 그때 미인의 기준이 되는 몸매가 다산의 능력을 보여주는 볼록한 배가 아닐까 싶다. 이 그림의 작가인 얀 반 에이크가 그의 형제 후베르트 반 에이크와 합작으로 그렸다는 <겐트의 다폭 제단화>와 여타 15세기 플랑드르 그림을 봐도 볼록한 배를 가진 매혹적인 누드가 나타난다.
그림 중앙에 있는 거울속의 쬐그마한 사람이 바로 화가 얀 반 에이크가 아닐까 하고 추측되는데 거울위의 벽에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노라, 1434년” 이라는 서명이 있어서다. 화가 자신이 서약식의 증인 중 한명이라는 설이 대종인데 이런 식으로 여러가지 기록이나 정황이 희미해져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그림의 제작연도가 600년이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참고로 1434년이면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초기인 세종 16년으로
하지만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리 크지않은 이 그림은 아직도 윤기있게 반짝여 보인다. 그림속 아르놀피니의 모피코트는 부드러운 털이 상하지 않았고 거울과 금속 샹들리에의 하이라이트는 광택으로 빛난다. 거울옆의 묵주도 구슬빛이 여전히 투명해 보인다. 놀라운 유화물감의 효과다. 벽은 벽대로, 마루는 마루대로, 강아지털도 강아지털 그대로 질감이 살아있다. 유화는 다양한 질감의 표현에 더없이 안성맞춤의 훌륭한 재료일 뿐 아니라 그런 효과를 무척 오래도록 유지하는 경이로운 매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600년이 다 되어가도 반짝임의 효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림물감의 대세를 바꾼 유화의 재탄생
……얀 반 에이크는 유화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템페라에 사용된 용매인 달걀대신 기름(Linseed oil)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여유있게, 그리고 보다 더 정확하게 그림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는 투명한 층, 또는 겉칠(glaze)에 이용할 수 있는 광택있는 색채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뾰족한 붓으로 반짝이는 하이라이트를 찍어넣을 수 있게 되었으며 경이로운 정확한 묘사를 성취하여 그의 동시대 사람들을 놀라게 함과 동시에 유화를 가장 적합한 매체로 받아들여 널리 쓰이게 만들었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붉은 터번을 두른 남자>
얀 반 에이크와 후베르트 반 에이크 형제는 오랫동안 유화물감의 발명자로 오해되어 전해졌는데 지금은 창시자라기 보다 중흥자 였다고 다시 평가된다.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던 유화물감은 너무 더디 말라서 화가들이 별로 즐겨 선택하지 않은 매체였고 반대로 안료에 기름대신 달걀 노른자를 쓴 템페라화는 너무 빨리 말랐는데 안료에 섞는 기름의 종류를 린시드 오일로 채택해 성공한 화가가 반 에이크 형제였다는 이야기다. 이 새로운 매체혁명으로 그림물감의 주종은 유채로 바뀌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한 벨기에인 얀 반 에이크에 의해 르네상스 북유럽 회화의 방향과 화풍이 결정된다. 후세의 북유럽 화가들은 반 에이크의 불가사의한 유채 기법을 힘닿는 데까지 모방하려 하였고 그의 회화에 담긴 사실적인 화풍을 적극적으로 추종하였다…… 마이클 리비 「조토에서 세잔까지」
유화물감을 과소평가한 피렌체 르네상스인
르네상스가 가장 먼저 시작된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은 온화한 기후에 태양빛이 눈부시게 밝았던 지역으로 젖은 회반죽위에 그리는 프레스코화나 안료에 달걀 노른자를 섞어 그리는 템페라가 주로 쓰였는데 두가지 모두 빨리 말라서 실수나 재벌칠을 허용하지 않는 매체였다. 당연히 여러 번 덧칠하여 투명한 광택효과를 내기도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토나 마사초,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까지도 성당벽이나 천정에 그린 프레스코화는 얀의 유채화에 비교하면 물에 한번 푹 적시거나 빨아놓은 종이화처럼 광택없이 바래 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실주의를 정복한 듯한 세밀하고 정교한 반 에이크의 인물화가 전성기 피렌체나 로마의 르네상스 시대보다 앞선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보다 100년 먼저 그린 그림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그에 비해 70년 후에 제작되었고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보다 50년을 앞서 그린 셈이 된다. 이토록 사실적이고 정교한 질감의 유화효과를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은 과연 몰랐을까? 혹시 피렌체의 자부심 강했던 사람들은 그 효과를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꼼꼼하고 쬐그만 정밀화 따위는 우리 토스카나 거장들에게 어울리지 않아!’하는 우월감을 내세워서 말이다. 같은 이탈리아라도 베네치아인들은 달랐다. 베네치아 화가들은 선보다 색채, 고전적인 주제보다는 느낌이나 분위기를 중시했다. 새로운 유화기법은 베네치아의 조반니 벨리니와 그의 제자 티치아노에 이르러 캔버스를 채택함과 함께 만개하여 최고의 명성을 날리게 된다. 다음 인용을 보라.
……반 에이크의 훌륭한 유화작품이 안토넬로 다 메시나를 통해 북부 이탈리아에 알려졌을 때 이탈리아 화가들 대부분은 이 그림에 적대적이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같은 그림의 자연스러운 색과 빛, 어둠, 공간의 변조, 투명함, 대기, 심도 등은 템페라 화법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네치아 바깥에서는 유화의 수용이 더디고 억지스러웠다. 당시 많은 화가들이 유화를 ‘게르만적’이며 미개하다고 여겼다. 토스카나의 화가들이 유화를 실험했을 때조차 그들은 템페라 화법의 전제와 주의사항을 지킴으로써 결국 대부분의 핵심을 놓치곤 했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회화의 도구로서 유화를 똑같이 중요한 발명으로 인정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폴 존슨 「새로운 미술의 역사」
재현의 완벽함이 오히려 한계로 작용했다
이렇게 해서 퍼져나간 유화기법은 이후 회화매체로 가장 각광받는 재료가 되었고 현대에 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온갖 특이한 기법과 실험적인 매체가 쏟아지는 현대에도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회화 표현수단이 유채라는 사실은 아직 변함이 없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우주관을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꾸어 과학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렸듯이 얀 반 에이크도 회화 미술의 표현 기법을 에이크 이전과 에이크 이후로 나누어버린 것이다.
<아르놀피니의 결혼>에서 보이는 금속 샹들리에의 정교한 묘사와 재질감에 감탄한 현대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일종의 등사기 같은 효과를 보이는 렌즈투영법에 의존해 그린 걸 거라는 의심을 품는다. 실내외의 풍경으로 후세의 전범이 된 <롤랭 대주교와 성모자>에서도 인물표현의 사실감은 물론이고 직물이나 옷감표현에 경이적인 사실성과 정교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바로 그 정교함으로 인해 에이크의 작품은 오히려 결정적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그토록 세밀한 그림을 성당의 천장이나 수도원의 벽에 그리기엔 무리라는 점일 것이다. 아니 불가능 하다고 해야겠다. 아르놀피니의 정교함을 유지한 채로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완성하려면 4년이 아니라 100년의 시간도 부족하리라. 이렇게 규모의 박력이란 관점에서 바라보면 플랑드르 그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밀릴 수 밖에 없다. 플랑드르와 토스카나의 그림간 규모의 차이는 밝은 야외생활이 주요했던 중부 이탈리아와 달리 어둡고 추워서 주로 실내생활이 많았던 북유럽의 기후조건에서 비롯된다. 겨우내 눈속에 갇혀 세계 최고의 정교한 시계를 만들어 낸 스위스인을 생각해 보라.
르네상스 시대를 주름잡은 수많은 화가들 중 대가와 거장을 따로 꼽아 본다면 얀 반 에이크는 사실적인 초상화와 풍경화의 대가일 수는 있어도 거장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하리라. 단지 그림의 크기가 대가와 거장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고 볼 수도 없다. 얀 반 에이크의 경우엔 사이즈가 틀림없이 문제가 된다. 거대한 천장화와 벽화에 익숙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에겐 확실히 에이크의 작품은 왜소해 보이기 십상이겠다.
대가에서 거장으로 플랑드르 회화의 전통은 이어진다
하지만 현대의 사진보다 더 정밀해 보이는 얀 반 에이크의 그림은 서양회화사의 주역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의 그림이 빠진 서양미술사 책은 없다는 말씀이다. 얀 반 에이크는 예술가, 지식인 그리고 정치권에서도 이름을 떨쳤고 로베르 캉팽과 로히르 반 데르 베이덴 등과 함께 플랑드르화 1세대로서 영원히 사랑받게 되었다. 이후 플랑드르는 2세대 한스 멤링을 거쳐 기괴함의 대명사 히에로니무스 보스, 브뢰겔을 거쳐 마침내 루벤스와 렘브란트라는 거장의 탄생을 보게 된다.
토스카나 회화 역시 조각과 건축이 함께 발전하였지만 북유럽과 독일, 그리고 베네치아 회화가 없었다면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킨 예술 혁명으로 기록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형태와 색채에서 더 이상 전성기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를 뛰어넘을 수가 없어서 과장과 왜곡으로 치달았던 16세기 매너리즘의 시대를 지나고 17세기초 화려한 바로크시대를 열어나간 회화의 카라바지오와 조각의 베르니니를 끝으로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함은 스페인과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로, 미국으로 영원히 건너가 버리고 만다. 물론 세상 어떤 강대한 국가나 문화와 영웅일지라도 흥망과 성쇠가 있음에야 예외가 없을 터이지만……
아르놀피니의 모사... 창백한 얼굴의 아르놀피니는 마치 현대에 유행
하고 있는 공포영화의 좀비같은 인상의 사나이
다. 15세기 브뤼셀의 왕실에 납품하는 의상을 독
점해서 돈 좀 만졌다 한다. 이름도 아르놀피니
라니? 당시의 유력한 상인 가문인지는 몰라도
흡사 중학교 생물시간에 보았던, 말피기관을 발
견한 닥터 말피기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 아닌가
* 출처: 카페- 강남 시니어 A&O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