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美術) 마당 ♣/- 화가[畵家]

Paolo Uccello

Bawoo 2014. 9. 13. 23:01

Cinque maestri del rinascimento fiorentino, XVI sec, paolo uccello.JPG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1397년1475년)/태조5년-성종6년, 78세)는 이탈리아화가이다.

 

원근법의 연구에 몰두한 우첼로는 마사초의 후계자, 또는 원근법의 발명자라고 불리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시적 환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화려한 색반(色斑)과 풍부한 을 사용하여 장식적 효과를 높이는 고딕의 전통에 살아 온 작가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유명한 <산 로마노의 전투>(1458년, 우피치 루브르·런던 국립 화랑)는 1432년 산 로마노에 있었던 시에나군(軍)을 격파한 니코로 다 트렌티노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한 것이다. 기마전은 일대 야외극(野外劇)으로서 장식풍으로 그려져 있고, 여기저기에 그가 자랑으로 여기는 단축법(短縮法, 지상에 가로누운 병사와 )과 원근법(遠近法, 떨어진 창의 방향에 주의)을 구사하고 있는데, 서 있는 말은 마치 회전목마처럼 정지하고 있다.

 

The Battle of San Romano: the Counter-Attack by Micheletto da Cotignola,1440

Tempera on wood, 180×316cm, Musee du Louvre, Paris

 

 

우첼로가 1432년 피렌체와 시에나간에 벌어진 일종의 국지전이었던 산로마노 전투를 그린 것은 메디치 가문의 궁전을 장식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톨렌티노라는 피렌체의 전승 주역을 기념하기 위한 세폭화의 한 점이 바로 이 그림이다. (나머지 두 점은 이태리와 프랑스에 있다.) 백마를 탄 지휘자 톨렌티노를 중심으로 전투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피렌체군은 계곡에서 맞닥뜨린 적군과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분투하고 있다.

 

우선 이 그림의 재미있는 감상의 출발점은 원근법적 공간에 인물들을 배치하기 위해 구사한 X형 구도에서 시작된다. 어린 시절 우리가 미술 시간에 시험하였던 바로 그 X형 구도 말이다. 화폭을 X자로 나누어 길과 하늘로 공간을 양분하고, 양편에는 가로수들을 그려 넣었던 바로 그 그림처럼 이 그림은 전형적이다. 장미울타리와 오렌지 나무들을 중심으로 전투장면인 근경과 비현실적 원경이 나누어지고 있는데, 주인공 톨렌티노장군은 헬멧 대신 화려한 육각형의 모자를 쓰고 있다. 그의 헬멧은 그의 뒤에서 시종인 듯한 친구가 들고 서 있다. 장군답게 백마를 타고 있는데, 목마처럼 표현되어 왠지 어색한 그 매끈한 질감에도 불구하고 장군의 말은 뛰어난 공간감각을 자랑한다. 그가 칼 대신 들고 있는 지휘봉 또한 어색하지만, 이상한 전쟁의 우화적 표현을 느끼게 해준다.

 부러진 창들은 선원근법의 핵심인 소실점을 향해서 만나고 있는 자세로 떨어져 있다. 이 그림의 자연스러운 소설점 즉 X의 교차점은 장미 울타리 속 어딘가에 존재한다. 바닥에 쓰러진 갑옷은 자연스럽지 못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당시 화가들의 첨단 테크닉이었을 단축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메디치 가문의 화려한 명성처럼 실제의 금과 은으로 칠해진 것으로 알려진 여러 가지 장식들의 표현은 이미 많이 변색된 상태로 알려져 있다. 아이크 같은 네덜란드 화가들에 비해 분명히 덜 치열하게 묘사된 듯한 세부에도 불구하고 그 원근법적 공간감각으로 하여 원근법의 교과서 같은 그림으로 회자되는 명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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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사냥

The Hunt in the Forest 146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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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대학의 보물 중 하나인 파올로 우첼로(파올로 디 도노, 1397~1475경)의 사냥하는 그림은

수 세기동안 고전을 읽는데 지친 학생들의 피곤한 눈을 즐겁게 해줬다.

행렬 같은 구조 그림의 선구자였던 우첼로는 말기작인 이 작품에서 어두운 밤중에 벌어니는 사냥 장면을

묘사했다.

유명한 미술사가이며 우첼로 연구의 권위자인 존 인드험 포프 헤네시는 이 작품을 당시 ‘가장 낭만적인 그림의 하나’로 간주했다. 경쟁상대가 되는 그림이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숲속의 사냥’의 매력적인 형식적 독창성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눈이 이 그림의 어두움에 적응하게 되면, 우리는 훌륭한 의상, 부드러운 모자, 다양한 주홍색 기장으로 인해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을 볼 수 있다.

미술의 역사상 붉은색이 이처럼 다양한 색채의 조합을 위해 사용된 적이 없었다.

이 그림에서 우첼로는 그의 전쟁 그림에서와 같이 다쳐 바닥에 누운 병사가 아니라 쓰러진 나무를 이용해서 원근법의 효과를 냈다.

숲의 푸른 초목이 피고 있는 꽃과 갑자기 몰려 든 동물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전경에 있는 네그루의 나무가 이 그림을 거리가 같은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준다.

이는 그림을 조화롭게 하며 관람자의 눈을 양쪽 방향에서부터 불명확한 소실점으로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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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ut of San Romano, 1456, National Gallery,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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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George and the Dragon, DETAIL of St George, 1455-60, Tempera on canvas

56.5×74cm, National Gallery,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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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첼로는 본질적으로 장식적인 성향을 띤 후기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초기의 새로운 장엄 양식이라는 대조적인 두 양식의 조화를

시도했다. 대표작은 3점의 패널화로 이루어진 〈산 로마노의 전투 The Battle of San Romano〉(1450년대 중반)이다. 섬세하고 세

련된 원근법적 탐구가 〈홍수 The Flood〉(1447~48)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초기교육 및 작품

우첼로는 10세 무렵에 이미 조각가인 로렌초 기베르티의 작업실에 도제로 들어갔는데, 기베르티는 그무렵 훗날 미술사에 남을 최고 걸작(〈신약성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28점의 패널로 이루어진 피렌체 세례당을 위한 청동문)을 만들고 있었다. 1414년 그는 화가 협회에 가입했으며, 다음해에 화가들의 공식 길드의 회원이 되었다. 그무렵 독립된 화가로서 자리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작품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많은 뛰어난 미술가들을 배출한 기베르티와 함께 작업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화가로서의 초기 교육에 대해 뚜렷한 자료가 없다. 최초의 프레스코는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의 '키오스트로 베르데'(녹색 회랑,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의 녹색 색조 때문에 이렇게 부름)에 있는 것들로, 현재 심하게 손상되어 있지만 〈창세기〉의 내용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아한 선적인 형태와 풍경을 양식화하여 강렬하게 표현한 것으로 15세기초에 피렌체의 작업실에서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후기 고딕 양식의 전통과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우첼로의 예술적 기원을 피렌체 작업실로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1425~31년에 베네치아에서 모자이크화 장인으로 독립했다. 그때의 작품은 모두 없어졌으며, 복원하려는 계획도 성공하지 못했다. 산미니아토알몬테 교회의 회랑에 수도원의 전설을 프레스코로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고 피렌체로 돌아간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의 프레스코를 보면 인물의 형태는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베네치아에 머무르는 동안 피렌체에 등장한 새로운 원근법과 도나텔로와 난니 디 방코의 새로운 조각작품에서와 같이 단순하면서도 기념비적인 형태처리로 새로운 경향이 엿보인다.

후기생애

1436년 피렌체 대성당에서 우첼로는 14세기말에 피렌체 군대를 지휘한 영국의 용병인 존 호크우드 경의 기마상을 그린 단색의 프레스코를 완성했다. 단일 시점의 원근법, 말과 인물의 조각적 처리, 인물에 내재된 잠재력의 표현 등은 모두 그가 어릴 적부터 피렌체에서 번성한 르네상스의 새로운 양식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1443년에는 피렌체 대성당의 내부 서쪽 정면에 있는 거대한 시계 주위에 네 예언자의 두상을 완성했으며, 1443~45년에는 반구천장에 스테인드글라스 2점을 디자인했다. 1447년 잠시 파도바에 다녀온 뒤 다시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의 키오스트로 베르데에 프레스코를 그리기 시작했다. 홍수와 대피를 묘사한 2편의 독립된 장면에서 모두 단축법을 사용했는데 당시 도나텔로가 파도바에서 제작한 부조의 영향을 보여준다. 〈홍수〉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 특히 나체는 초기 르네상스의 뛰어난 작품인 마사초의 프레스코(1425경, 브랑카치 예배당)에 나오는 인물을 연상시키지만 동시에 부분적 표현을 서술적으로 이끌어감에 따라 고딕 양식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홍수〉는 낡고 장식적인 기존의 회화 양식에 급속히 발전하는 르네상스의 장엄한 양식을 결합시키는 문제에 직면한 당대 화가의 고충을 그 어느 작품보다도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산 로마노의 전투를 그린 3점의 패널화는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런던의 국립미술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다. 1432년 니콜로 다 톨렌티노가 이끄는 피렌체의 군대가 적군인 시에나의 군대를 패배시킨 것을 그린 것이다. 형태를 조각처럼 입체적으로 처리한 기법과 부분적인 원근법 사용 등 르네상스적 요소도 보이지만, 밝은 색채의 사용과 정교한 장식성은 15세기 피렌체를 지배하던 고딕 양식의 영향이다. 한편 고딕 양식은 산 로마노의 전쟁을 그린 3점의 패널화를 모두 사들인 메디치가와 같은 당대의 새로운 지배계층의 환경을 호화롭게 꾸미는 데 사용되었다. 그는 섬세하고 정교한 원근법 소묘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홍수〉와 피렌체의 산마르티노델라스칼라 교회에 있던 그의 마지막 프레스코인 〈예수 탄생 The Nativity〉의 밑그림 및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소묘 3점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과학적 법칙을 응용하여 3차원의 공간에 있는 물체를 면밀하고 분석적인 연구를 통해 재구성해내는 그의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 소묘 제작에서는 유명한 수학자인 파올로 토스카넬리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우첼로의 원근법 소묘는 그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알브레히트 뒤러와 같은 르네상스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는 세상을 멀리하고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평가

우첼로는 오랫동안 르네상스 양식의 주요요소인 원근법을 발견한 인물로 중요시되었다. 16세기의 전기 작가 조르조 바사리에 표현을 빌리면 그는 원근법에 '도취'되어 있었다. 후세의 미술사가들은 그의 작품 구성에 나타난 독특한 매력과 장식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약간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미술가들이 전통적인 미술의 장점을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발전의 이득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야기되는 엄청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나갔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J.T. Paoletti 글

 

 

 

* 자료 출처: 책-명화 300선/ 해설 및 화가 약력- 위키,다음 백과 및 검색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