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1471년 5월 21일 - 1528년 4월 6일)는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다.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이며, 특히 목판화, 동판화 및 수채화 에서 독창적 재질을 보였다.
삶과 창작 활동
[화가 아버지의 초상(1490)]
그의 나이 19세에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입니다. 뒤러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정신적인 의지였으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그림에는 진지하면서도 온화해 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이 잘 묻어있습니다. 뒤러는 인물화를 통해 인물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이루어진다는 요한 계시록의 봉인이 열리는 장면입니다. 인간에게 내려지는 하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하며 네 봉인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재앙, 전쟁, 기아, 죽음을 상징하는 네 기사가 죄인들을 응징하는 것입니다. 목판으로 제작한 것이며 뒤러는 인쇄술에 사용되는 목판기술을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이 그림은 서양미술사 최초로 그려진 유화 자화상입니다. 한손에 엉겅퀴를 들고 멋지게 차려입은 22세의 청년은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하죠. 하지만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요. 균형과 조화가 잘
잡힌 이 작품을 보면 철저한 화가의 철저한 성격 뿐 아니라 그림 속 인물의 정갈한 심리까지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1507)]
아담과 이브, 두개의 작품을 한 데 모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거의 실물 크기로 그려진 것으로 아름다움과 순수, 에로틱함이 모두 묻어나는 작품이죠. 아담은 지식의 가지를 손에 든 채 이브를 향하고 있고, 이브는 뱀이 주는 사과를 받아 들고 아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배경인 나무를 통해 한 공간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이상적인 인체 비례를 연구한 뒤러의 끊임없는 노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사 죽음과 악마(1514)]
뒤러의 3대 동판화 중 하나인 이 작품은 그의 윤리의식을 상징화 한 것입니다. 특히 마틴 루터의 영향으로 중세신앙을 잇는 듯한 그의 경건한 신앙이 나타나 있습니다. 기사를 유혹하는 죽음의 신과 악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가고 있는 기사를 다소 신비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이 작품 속 강렬한 색채와 인간들의 구도와 원근법이 이탈리아 르네상스화에서처럼 대담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러는 그 곳에서 만난 르네상스화에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는
군상들의 뒤로 펼쳐진 배경과의 공간감이 이채롭습니다.
[자화상(1500)]
이 자화상은 뒤러의 마지막 자화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뜬 이 그림 속 뒤러는 오만한 표정 이상의 신성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과 자신을 같은 선상에 놓고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죠. 특히 뒤러의 눈은 정말 눈 앞에 서서 감상자를 꿰뚫어 보고 있는 듯 합니다. 이는 인물의 내적 성찰을 말하고 싶어하는 뒤러의 의도입니다.
[세 박사의 경배(1500)]
앞의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탄식>과 비슷한 구도와 색채, 공간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인물들 뒤로 멀리보이는 배경인 산 풍경이 비슷하죠. 막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기 위해 동방에서 찾아온 세 박사가 가져온 선물을 아기에게 바치고 있는 장면입니다.
뒤러는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부친 아래서 금세공을 배웠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 미하엘 볼게무트의 문하생이 되었다. 1490년 부할절부터 1494년 오순절까지 알브레히트 뒤러는 오버라인 지역의 각지를 편력했다. 살아 생전 했던 세 번의 장기 여행 중에서 첫 번째였던 이 여행의 여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처음에는 네덜란드나 중부 라인 지역에 머물렀다가, 1492년에 엘사스 지역에 머물렀던 것 같다. 그는 자신에게 커다란 인상을 준 작품을 만든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를 방문하기 위해서 콜마르(Colmar)를 찾아갔지만, 숀가우어가 이미 1419년 2월 2일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중에 뒤러는 바젤에서 활동을 했는데, 그곳에서 세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의 책〈바보배Narrenschiff〉(1494년 초판 인쇄)에 실린 유명한 목판화가 제작되었다. 여행에서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그는 1494년 아그네스 프라이(Agnes Frey)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오래되고 명망이 있는 뉘른베르크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은 출생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두 형제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뒤러 가문은 대가 끊기고 사라졌다.
결혼하지 약 3개월이 지난 1494년 10월 초순에 그는 신혼인 아내를 혼자 남겨 두고 베네치아로 여행, 이듬해인 1495년에 귀국하였다. 이 제1차 이탈리아 여행에서 당시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미술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은 뒤러 자신에게 있어서나, 또 후의 독일 회화 전체를 위해서도 커다란 의의를 갖는 일이었다. 그때의 구체적인 성과는 그가 여행 도중에 틈틈이 그린 몇 점의 수채화에 있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자연에 접할 때에 화가가 가지는 신선한 감동이 싱싱한 서정성과 날카로운 자연 관조를 바탕으로 하여 훌륭하게 그려져 있으며, 이른바 도나우 파의 작품과 더불어 그 후의 유럽 풍경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1497년부터 독립을 했고, 1503년부터는 한스 쇼이펠라인(Hans Schäufelein), 한스 폰 쿨름바흐(Hans von Kulmbach), 한스 발둥 그리엔(Hans Baldung Grien)과 함께 작업장을 운영을 했다. 그는 뉘른베르크 알트슈타드에 있던 그의 작업장에서 아주 열심히 일을 했다. 주로 초상화와 몇 점의 자화상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아버지의 초상화〉(149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자화상〉(1498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린다우의 상인〈오스볼트의 초상화〉(1499년 바이어른 국립 회화 수집소 소장), 〈자화상〉(1500년 뮌헨 미술관 소장) 등이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당시에 이미 작가로서의 뒤러의 명성은 꽤 높았으나,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오히려 판화였다. 특히 1498년에 간행한 목판 연작 <요한 묵시록>(1498년)은 뒤러의 삶에서 만이 아니라 유럽 목판화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16점의 작품은 한점 한점마다 고도한 기술적 완성과 탁월한 화면 구성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네 사람의 기사>는 특히 널리 알려져 있다. 인문주의와 뒤러가 맺고 있는 관계는 콘라트 첼티(Conrad Celtis)의 책 〈지형학으로서의 사랑 quatuor libri amorum〉(1502년)을 위해서 뒤러가 제작한 삽화에 잘 드러나 있다. 첼티는 뒤러를 제 2의 아펠레스(Apelles)라고 칭찬했다.
- 알브레히트 뒤러, <정의의 여신>, 목판화, 1494 -
본래 정의의 여신은 눈을 뜬 여신이었다. 지혜로운 눈을 가진 여신이었다. 그런데 소송에 개입하는 무리들이 정의의 여신의 눈을 멀게 했다. 눈을 가려버렸다. 그 순간 정의의 여신은 저울의 눈금을 정확히 볼 수 없게 됐고, 아무 것도 안보이는 상태에서 ‘조자룡이 헌 칼 휘두르듯’ 맘껏 칼을 휘두르는 위험한 여신이 되고 만 것이다.
- 최재천, <'정의의 여신'은 왜 눈을 가리고 있을까?>
이탈리아 여행과 그 이후 활동
1505년 뒤러는 베네치아를 향해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티치아노, 조르조네, 팔마 일 베키오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조반니 벨리니가 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한 편지에서 뒤러는 벨리니를 "회화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언급을 하기도 했다. 진지한 학구열, 근면함, 통찰력을 통해서 뒤러는 고향 도시 뉘른베르크에서도 정확한 소묘의 가치를 평가하는 법과 진실된 자연관을 배우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그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던 색채가 지닌 힘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런 발견은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베네치아에 거주하는 독일의 상인들은 바르톨로메우스 교회를 위해서 커다란 크기의 그림 〈묵주〉를 주문했다. 후에 신성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그 그림을 구입해서 프라하로 옮기도록 해서, 지금은 프라하의 국립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그림에는 두 명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관을 씌워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황제에게, 아기 예수가 교황에게, 성 도미니크와 여러 천사들이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묵주를 건네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베네치아에서 받은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뒤러는 베네치아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았고, 베네치아 시 위원회가 만약 그가 영구히 베네치아에 거주한다면 200두카트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의를 했지만, 그는 1506년 늦가을 고향 도시로 되돌아오는 여행길에 올랐다.
이 그림이 알브레히트 뒤러가 제일 처음 그린 젊은시절 자화상의 일부입니다.
그 어느 화가보다 곱상한 외모를 자랑하죠.
실제 이 그림은 뒤러의 정략 약혼녀에게 보낼 그림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뒤러 머리 위에 1493이란 숫자와 글귀가 있는데요
글귀는 나의 일은 위에서 정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씌여있다고 하네요.
좋아하지도 않은 여자와 약혼을 하는 뒤러의 심정.. 정해진 여자랑 한다는 것을
저런식으로 표현했더라고요
그리고 손에는 엉겅퀴가 들려있는데, 이것도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엉겅퀴는 예수님의 수난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아마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럽다는 걸 의미하는건 아닐까요?
1506-1514년
1509년부터 뒤러는 뉘른베르크 시위원회에 의해서 임명된 미술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도시의 예술 계획을 입안하는데 뒤러가 상당부분 관여를 했다고 가정을 한다. 이 시기 동안 작은 크기의 동판화와 목판화 이외에 중요한 목판화 연작을 간행했다.
- 작은 크기의 수난 연작(1509/1510년)
- 커다란 크기의 수난 연작(1510년)
- 마리아의 삶(1510/1511년)
- 성 삼위일체(1511년)
- 성 그레고르의 미사
- 성 그리스토프
- 안나와 함께 있는 성가족
- 묵주를 들고 있는 요하임 등을 언급할 수 있다.
그 당시 뒤러는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이용해서 판화를 제작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해서 〈성녀 베로니카〉(1510년), 〈고통을 껵는 구세주〉(1512년), 〈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1512년)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부터 뒤러의 작품에서는 목판화가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되었고, 뒤러가 그린 회화는 점점 드물게 보게 되었다. 1512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유화가 있다. 작은 크기의 동판화 연작의 상당 부분이 이 해에 제작되었다. 그리고 뒤러는 막시밀리안 황제로부터 자신의 목판화와 동판화를 복제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얻었다. 뒤러는 여러 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주문을 받아서 일을 했다. 늦어도 1510/1511년 이후부터는 관계가 이루어졌다. 뒤러의 친구인 빌리발트 피리크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가 그 관계를 중재했다. 모든 작품은 간접적으로나마 황제의 결혼과 명성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그의 유명한 동판화 〈기사, 죽음과 악마〉,〈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멜랑콜리아I〉이 제작되었다. 또한 〈파움가르트너 제단화〉도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달 전에 뒤러는 목판화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이 그림은 서양 미술사에서 죽을 정도로 병약해진 인간을 그린 최초의 초상화였다.
1518-1520년
이 시기에 뒤러는 집중적으로 비례학과 같은 이론적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1518년 뉘른베르크 시의 대표자로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렸던 제국회의에 참석했으며, 그곳에서 유명 인사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다.
네덜란드로의 여행(1520-1521년)
1520년 6월 12일부터 뒤러는 아내와 함께 밤베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쾰른을 거쳐서 안트베르펜과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들로 여행을 갔다. 네덜란드로의 여행은 진짜 개선행진과도 같았다. 도처에서 뒤러는 열렬하게 환영을 받았다. 안트페르펜의 시행정당국은 정착을 하도록 뒤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300굴덴의 연금, 아름다운 저택, 무료 숙식과 공공 작업에 대한 보수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시행정당국의 제안은 허사였다. 영주들, 각국의 대사들, 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그를 열렬하게 찬양했고, 그를 자신들의 모임의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도 이전의 특권들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특권을 재확인받으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이었다. 네덜란드의 보물같은 예술품을 보고, 그곳의 예술가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는 상당히 중요했다. 수 많은 영주, 고위 성직자, 예술가들의 그림도 이번 여행의 결과물이었다. 1521년 7월 2일 그는 뉘른베르크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고향 도시로 돌아온 이후에 뒤러는 다시금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데 몰두했다. 1520/1521년에 그는 뉘른베르크 시청사의 장식을 책임졌다. 그 장식은 오늘날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1530년에 제작된 모조품이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다.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뒤러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하는 두 점의 거대한 목판화가 1526년에 제작되었다. 이 목판화는 바오로, 베드로, 마르코 복음 저자, 요한 복음 저자의 실물 크기의 인물상이었으며, 동시에 4가지 체액을 믿는 이론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뒤러는 원래 이 목판화를 뉘른베르크 시에 선사했고, 시청사에 세워져 전시되었다. 뒤러가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으로 간주되는 뉘른베르크의 상인〈히에로니무스 홀츠슈우어〉라는 유화가 1526년에 그려졌다. 같은 해에 〈요한 클레베르거〉의 그림이 제작되었는데, 그림이 뒤러가 그린 마지막 그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네덜란드 여행 이후로 말라리아로 고통을 받고 있던 뒤러는 1528년 4월 6일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업적
그는 르네상스 최성기에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그 영향을 받았으나, 뒤에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고, 북유럽적·독일적인 미의 전통을 쌓은 화가이다. 이론적 연구에도 뛰어나 <인체 비례론> 및 <원근법에 관한 고찰> 등의 저서도 내고, 또 이상미(理想美)에 관하여도 논하였다. 수채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에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주로 종교화·초상화·풍경화 등을 제재로 하였으며, 동판·목판 등 판화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아담과 이브> <동방 세 박사의 예배> <자화상> <요한 묵시록> 등이 있다.[1]
* 자료 출처: 다음 백과 및 검색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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