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美術) 마당 ♣/- 화가[畵家]

[네덜란드]대 피테르 브뢰헬 [Pieter Bruegel de Oudere]

Bawoo 2014. 10. 4. 23:13

대 피테르 브뢰헬 [Pieter Bruegel de Oudere]

1525경 네덜란드 브라반트 공국 브레다~ 1569. 9. 5/9 브뤼셀.

16세기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인 그는 태어난 마을 이름을 따 성을 삼았다. 1551년 앤트워프의 화가 조합에 들어간 후, 이탈리아·프랑스에서 유학하였다. 처음에는 '민간 전설'이라는 속담 등을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렸고, 후에 네덜란드에 대한 에스파냐의 억압을 종교적 제재로써 극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이어서 농민 생활을 애정과 유머를 담아서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므로 '농민의 브뤼겔'이라고 불리었다. 여기서의 풍경 묘사는 풍경화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은 동판화 1점을 포함하여 45점이 알려졌지만 〈장님〉, 〈라벨의 탑〉, 〈농부의 혼인〉, 〈눈 속의 사냥꾼〉 등이 특히 유명하다.

루벤스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작품의 배경을 그린 적도 있다. 그는 인물을 작게 배치한 풍경화를 즐겨 그렸다. 1602년 앤트워프의 화가 조합장을 지냈다.

그는 작품에 서명과 날짜를 기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1559년부터는 작품 서명에 ‘h’를 빼고 ‘Bruegel’로 적었다.

큰 아들 소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 de Jonge)과 작은 아들 대 얀 브뤼헐(Jan Brueghel de Oude)도 유명한 화가이지만, 아버지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장남 소 피터르는 아버지와 같은 제재의 작품 외에, 환상적·악마적 화면을 즐겨 그려 '지옥의 브뤼헐'이라고 불리었으며, 차남 얀은 화초나 풍경을 잘 그려 '꽃의 브뤼헐', '천국의 브뤼헐'이라 불리었다.< 다음 및 위키백과 종합>

 


The Painter and The Connoisseur, c. 1565 is thought to be Bruegel's self-portrait.

 

< 작품 해설>

15세기는 플랑드르 회화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에 얀 반 에이크,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판 데르 후흐(Hugo van der Goes), 보스(Hieronymus Bosch) 등이 창조한 북유럽 특유의 사실주의와 고딕적인 환상의 세계는 유럽 전역을 매혹시켰다. 17세기에는 루벤스가 범유럽적인 바로크의 화려한 조형 언어로 플랑드르를 다시 유럽 미술의 중요한 축이 되게 했다.

 

그 사이 기간인 16세기에 플랑드르 화가들은, 이전 세기의 영광을 잇지 못하고 그 정체성을 잃은 채, 전유럽을 휩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모방자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1525년경-1569년)이 없었다면 진정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자연을 웅장하고 조화로운 구성, 자연스럽고 깊이 있는 색채, 예리하고 밀도 있는 형상 속에 담아내어, 이탈리아 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한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사실이 극히 적다. 화가 자신이 남긴 글이나 당대에 나온 전기는 없다. 화가가 죽은 지 한 세대가 지난 후인 1604년에 카렐 판 만더(Karel van Mander)가 출판한 [화가의 책 Schilder-boeck]에 포함된 짧은 글이 최초의 전기인데, 여기에는 신빙성 없는 일화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화가가 어디에서, 언제 태어났는지부터가 불확실하다. 판 만더는, 농부를 많이 그렸던 그를 농촌 출신으로 생각했으나, 최근의 학자들은 그가 브레다(Breda)라는 도시 출신이며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았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그는 1551년에 안트베르펜 화가 조합에 Pietre Brueghels라는 이름으로 등록했는데, 이를 근거로 (당시에 마스터가 되는 나이가 보통 20대 초중반이었으므로) 1525년에서 153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중에 그의 장인이 되는 피테르 쿠케 판 알스트(Pieter Coecke van Aelst)의 도제로 안트베르펜에서 그림을 배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탈리아풍 그림을 그렸던 스승의 흔적을 그의 회화에서 찾기는 어렵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백과사전적 초상


1555년에 그는 안트베르펜의 출판업자 히에로니무스 코크(Hieronymus Cock)에게 고용되어 동판화용 드로잉들을 제작했는데, 주제는 주로 풍경과 종교적 알레고리였다. 화가 조합에 등록한 때와 코크의 출판사를 위해 일하기 시작한 두 시기 사이에 2~3년 동안, 그도 그 시기 다른 북유럽 화가들처럼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고전 고대의 유물이나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을 모사하지는 않았고, 고전 미술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은 흔적도 없다.

 

[네덜란드 속담] 1559년, 패널에 유채, 117×163cm, 국립 미술관, 베를린

 

 

 

프랑스를 거치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전역을 두루 다녔던 이 여행에서 그가 얻은 것은, 모든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는, ‘넓은 시야’와 ‘다른 시각’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그가 가장 많이 제작한 것은 풍경 드로잉이었는데, 그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한 높은 산이 만들어 준 ‘넓고 멀리 바라보는 눈’은 이후에 그려질 작품의 기본 구도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세계관의 바탕으로 자리 잡았다.

 

1559년에 제작한 [네덜란드 속담 Netherlandish Proverbs]은 이런 시각으로 만들어진 그의 고유한 양식을 보여주는 최초의 작품이다. 해안가 마을과 그 주민들을 그린 것 같아 보이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사실 1백 개가 넘는 속담을 글자 그대로 연기하고 있는 중이다. 근경 중앙에서 삽을 들고 있는 사람은 우리 속담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처럼 ‘송아지 빠져 죽은 후에야 웅덩이를 메우는’ 중이다. 그 뒤에 돼지에게 장미를 던지는 사람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예수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원경 오른쪽 구석에 보이는 ‘교수대에 대고 뒤본다’는 낯선 속담은 ‘어떤 처벌도 겁내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 건너편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라는 성서의 한 구절을 그린 그림과 함께 후에 [교수대 위의 까치 Magpie on the Gallows]와 [맹인의 우화 Parable of the Blind]라는 독립된 작품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간결한 비유로 인간사의 보편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속담을 채집하는 일은 16세기 인문주의자들이 몰두했던 백과사전적 작업의 하나였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속담을 모아 1500년에 [격언집 Adages]을 출판했고, 브뢰헬의 친구였던 출판업자 플랑탱(Christoph Plantin)도 프랑스와 플랑드르의 속담을 출판했다. 화가는 플랑탱 뿐 아니라 지리학자이자 지도제작자인 오르텔리우스(Ortelius), 철학자 코른헤르트(Coornhert) 등 당시 가장 저명한 지식인들과 친교를 나누었는데, 이 작품은 화가가 이들과 관심을 공유하며, 세계와 인생을 탐험하고 이를 총제적으로 파악해 보려고 한 노력의 흔적으로 볼 수도 있다. 또 이 작품 이전에는 고딕 소문자 brueghel로 서명했던 그가 이때부터 로마자 대문자를 써 BRVEGEL로 서명했는데, 이름에서 h를 뺀 것은 인문주의 관습에 따라 그의 이름을 라틴화하려 한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속담의 이미지는 중세의 필사본 가장자리나 교회를 장식한 조각에서 단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왔고, 여러 장면을 한 화면에 모은 것도 당시 동판화에 선례가 있긴 하다. 이런 작품들과 구별되는 브뢰헬의 천재성은 이것이 단순한 속담의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공간에 자연스럽게 배치된 하나의 ‘회화’ 작품이 되게 한 구상과 구성의 능력에 있다. 그는 같은 능력을 발휘하여 1559년에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Battle between Carnival and Lent]에서 당시의 축제와 종교 행사 등의 풍습을, 1560년의 [아이들의 놀이 Children’s Games]에서는 2백명이 넘는 아이들이 하고 있는 9십여 가지 놀이의 파노라마를 보여주었다.


 

 

 

속담이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은 대부분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부도덕하다. 그것을 먼 거리에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시선은 분명 동정이나 공감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 인물들이 만드는 부조리한 장관은 희극이 상연되는 극장 무대같아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화가가 속담을 연기하는 각계 각층의 인간들을 조롱하고 있다거나 그들이 사는 곳을 동물원처럼 구경거리로 만들어, 관람자에게 도덕 교사처럼 훈계를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화가는 인간이,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이해가 안 될 어리석은 실수를 끊임없이 저지르고, 말하기 부끄러운 탐욕과 편견을 떨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담담하게, 이해의 미소를 지으며,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능과 욕망에 패배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이한 작품이 [바벨탑 Tower of Babel]이다. 창세기에는 노아의 자손들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 명예를 얻고자 했던 오만한 시도가, 신이 사람들 사이의 언어를 다르게 해서 좌절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벨탑] 1563년
패널에 유채, 114×155cm, 미술사박물관, 비엔나


 

 

 

브뢰헬이 그린 바벨탑 전경 왼쪽에서 석공들의 절을 받고 있는 사람은, 바벨탑을 쌓게 한 사람이라고 요세푸스가 기록한 니므롯 왕이다. 이와 비슷한 그림이 16세기 초 플랑드르에서 그려진 적이 있으나, 이렇게 거대한 느낌이 나게, 이처럼 인상적인 세부로 그려진 것은 처음이다. 화가는 화면 왼쪽의 도시 풍경, 해안의 배, 작업하는 사람들과의 대조를 통해 탑의 압도적인 크기를 강조했다.

 

바위산 주위로 쌓아 올려지고 있는 탑은 콜로세움을 닮은 둥근 아치와 원통형 궁륭, 각기둥을 겹겹이 드러내고 있고, 이와 함께 세밀하게 묘사된 기중기의 모습에서 토목 기술과 건축에 대한 화가의 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 탑이 완성되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당대의 첨단 건축기술 묘사가 세밀할수록 그 허망함이 더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 탑 자체의 축이 기울어 붕괴할 것 같은 불안감이 전달되기도 한다. 이 그림에서도 브뢰헬 특유의 유머가 보이는 부분은 왕의 바로 뒤에 낮잠을 자고 대변을 보는 사람들이 있고, 건축중인 탑의 창가에 빨래를 널어 말리고 화분을 내놓고 식물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내실 있는 것은 대단해 보이는 탑의 공사가 아니라, 그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이런 사소한 일상사일지도 모른다.

 

 

일상 속의 종교, 스쳐 지나가는 역사

1563년에 브뢰헬은 브뤼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안트베르펜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주했다. 안트베르펜은 ‘북유럽의 피렌체’라 불리던 당시 유럽의 금융, 무역, 직물 산업의 중심지로 국제적인 상인들의 도시였고, 브뤼셀합스부르크의 궁정이 있던 귀족의 본거지였다. 그의 이주에는 새로운 후원자층을 확보해 보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브뢰헬이 그린 것이 확실한 회화 작품은 현재 40점이 남아있는데 이중 30여점이 브뤼셀에서 산 6년 동안 그려졌다.

 

그의 회화 중 절반은 기독교 주제와 연관이 있다. 종교화에 있어서 브뢰헬은, 종교 개혁 이전에 가톨릭 종교화를 주로 그렸던 15세기 플랑드르 대가들이나, 반종교개혁적 가톨릭 교회와 궁정을 위한 그림을 그렸던 루벤스와 처지가 달랐다. 16세기초 이 지역에서 퍼져나간 종교개혁의 지지자들은 교회와 공공장소의 미술품을 우상으로 여기고 파괴했다. 부르고뉴 공국에 이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된 합스부르크 왕가, 특히 화가가 활동하던 시기에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여 이곳에 대한 통치권을 가졌던 펠리페 2세는 이를 반란으로 여기고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반란과 진압이 반복되며 고조되던 종교적 위기 상황은 화가 사망 직전인 1568년에 이후 80년 동안 이어질 네덜란드 독립 전쟁으로 폭발한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1564년
패널에 유채, 124×170cm, 미술사박물관, 비엔나

 

 

 

이러한 상황에서 브뢰헬이 어떤 종교적 신념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후원자 중에는 펠리페 2세의 고문이자 플랑드르 지방의 총독이었던 스페인의 그랑벨(Granvelle) 추기경 같은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는 교회를 위해 성인이나 성모 등 가톨릭 특유의 주제를 담은 종교화를 그리지는 않았다. 그의 종교화는 모두 개인 소장용으로 그려져 규모가 작고, 주제는 신교와 구교에 공통되는 것이었다. 그는 어떤 정치적 당파나 종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특정 철학을 교조적으로 따르지 않은 개인주의자였다. 그가 예리한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던 고국의 현실과 이에 대한 그의 입장은 그림 속에 암시적으로만 담겨, 오늘날까지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그의 회화 중 가장 큰 작품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Christ Carrying the Cross]는 당대의 자연과 일상의 맥락 속에 종교적인 사건을 집어넣은 브뢰헬 특유의 종교화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다 쓰러진 예수가 정확히 화면의 중심에 있긴 하나, 행렬을 이룬 군중들로부터 그를 부각시켜주는 시각적인 장치가 없다. 이미 두 개의 십자가가 세워진 화면 오른쪽 상단에 마련된 처형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더 끄는 것은, 왼쪽 아래에 있는 구레네 사람 시몬과 그가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지 못하게 말리는 그의 아내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마저도 관심이 없다. 이들은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줍거나, 웅덩이를 잘 건너서 기뻐하거나, 다른 볼일을 보러 가버린다.

 

이 사건의 의미를 알고 슬퍼하는 것은 전경 오른쪽의 15세기적인 ‘혼절하는 마리아’ 도상 무리와, 오른쪽으로 갈수록 흐려지는 하늘과 황폐해지는 초목 등의 ‘자연’뿐이다. 화면 오른쪽 끝 중앙에 흰옷을 입고 담담한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화가는, 예수 시대나 16세기에나 인간은 여전히 눈 앞에 일에 눈이 어두워,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반대로 위대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도 일상의 일부일 뿐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자연 속의 인간, 색채로 만들어진 대자연의 장관

1565년에 브뢰헬은 그의 최대 후원자 중 하나인 안트베르펜의 부유한 상인 용헬링크(Nicolaas Jonghelinck)에게서 주문 받은 계절 연작을 완성했다. 현재 5점이 남아있는 이 연작이 본래 12점으로 이루어졌는지 6점으로 구성되었는지는 오랜 논쟁거리였는데, 현재는 6점쪽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농민의 노동으로 일년의 경과를 보여주는 달력 그림은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를 근거로 서양 미술사에서 오랜 동안 그려져 온 전통적인 주제이다. 중세에는 기도서에 포함되기도 했는데, 대개 12점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나, 중북부 유럽에서는 6점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눈 속의 사냥꾼 (겨울)] 1565년
패널에 유채, 117×162cm, 미술사박물관, 비엔나

[밀 수확 (여름)] 1565년
패널에 유채, 116.5×159.5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브뢰헬의 계절 연작은 한 점에 두 달이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이른 봄, 봄(소실), 이른 여름, 여름, 가을, 겨울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는 기존 달력 그림과 달리 계절별 노동이 아니라 계절의 변화 자체를, 주조색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눈 속의 사냥꾼 (겨울) Hunters in the Snow (Winter)]에서는 흰색과 회색 빛 도는 녹색이 북유럽의 맹추위를 느끼게 하며, [밀 수확 (여름) Wheat Harvest (Summer)]에서는 노랑색이 흐리고 무더운 여름날의 공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는 부분으로 나뉘어진 계절별 노동이 아니라, 그 계절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모든 경험을, 자연의 법칙에 맞추어 살아가는 인간의 생활 자체, 자연 전체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들은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오늘날의 다큐멘터리나 사진처럼, 보이는 대로 그린 그림은 없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자연도 특정 지형을 묘사하지 않고 [눈 속의 사냥꾼 (겨울)]에서처럼 플랑드르의 평원과 알프스의 고산을 조합하는 식으로 새로 만들었다. 그에게 자연은 지상의 한 구석이 아니라 ‘세계’이다. 그는 유한한 화면에 무한을, 부분을 그려낸 그림으로 전체를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이름과 얼굴 없는 인간의 사소한 일상으로 씌어진 서사시 

브뢰헬 회화 전체의 주제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인물이 중심이 되는 전통적인 회화 장르인 역사화나 초상화, 누드화를 그린 적이 없다. 그의 그림 속 인물은 모두 옷을 입고, 현실적인 체중을 가지고, 자연과 사회 속에서, 생존을 위한 일이나 휴식과 놀이와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


 

 

 

[벌 치는 사람들] 1567~1568년경
종이에 펜과 갈색 잉크, 20.3×30.9cm, 국립 미술관, 베를린


 

그의 인물들은 당시에 거리에서 상연되던 교훈극의 주인공이자 그의 드로잉에도 자주 등장한 엘크(Elck: Everyman)나 민간 전설의 네모(nemo: nobody), 즉 이름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 김홍도의 풍속화 주인공을 닮은 둥그런 얼굴에 땅딸한 체구를 가진 그의 인물들은 대개 외양이 거의 비슷해 초상적인 특징이 없는데, 그런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펜 드로잉 [벌 치는 사람 The Bee Keepers]은 그가 그린 인물의 익명성이 극대화된, 신비로운 시와 같은 작품이다. 섬세한 점과 선으로 중량감 있게 묘사된 세 명의 인물은, 당시의 벌 치는 사람들이 입었던 의상을 착용해 머리가 나무 둥치같아 보인다. 이들은 벌통을 열거나 들고 있고, 화면 오른쪽 끝에 있는 사람은 나무에 올라가 새 둥지의 알을 훔치려고 한다.


 

  

 

그림에 씌어진 문구는 “둥지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지식을 가진 것이고, 그것을 훔치는 사람은 둥지를 가진 것이다”로, 행동이 없는 지식은 쓸모가 없다는 뜻을 가졌는데, 그것이 그림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는 모호하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느라, 맨몸으로 와서 꿀을 훔쳐간 소년을 막지 못한 상황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 벌통으로 상징되는 가톨릭 교회가 우상파괴주의자에 의해 텅 비게 된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 등이 있다.


 

 

 

사회 속의 인간, 공동체의 산물

 

[벌 치는 사람]의 경우처럼 브뢰헬 말년 작품 속 인물은 이전 작품에 비해 크게 그려졌다. 이는 화가와 그려지는 대상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었음을 의미하고, 그것은 화가의 시선이 냉정한 응시에서 따뜻한 공감 쪽에 가까워졌음을 나타낸다. [농가의 결혼식 Peasant Wedding]은 그의 작품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실내의 장면을, 가까운 거리에서 그려내고 있다. 그림은 추수 끝난 후, 쌓아놓은 짚단이 벽을 이룬 농가 헛간에서 열린 결혼 피로연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작품과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춤추는 장면을 담은 몇 점의 그림 때문에 그는 ‘농부 브뢰헬’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농가의 결혼식] 1568년경
패널에 유채, 114×164cm, 미술사박물관, 비엔나
©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일반인이 즐겁게 보고 웃을 수 있는 농부의 일상, 속담, 민담을 그린 화가라는 19세기까지의 평가에 반발해, 일군의 학자들은 브뢰헬의 지식인적 측면과 그의 그림 속에 담긴 상징적, 교훈적 의미를 과장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농가의 결혼식]에 앉아 있는 신부를 교회의 상징으로 해석하거나, 이 그림을 폭식과 탐욕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가진 것으로 보기도 했다. 종종 셰익스피어라블레 등과 비교되곤 하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 때문에, 그의 그림에 대해서는 회화적인 분석보다 도상에 대한 문학적, 철학적 설명이 더 많이 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미술 작품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눈으로 보는 것이며, 화가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중심 기관으로 눈을 선택한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화면 전체로 이동시키는 탁월한 구성과, 번잡한 느낌 없이 많은 사람을 선명하고 개성 있게 보여주는 색채 사용과 묘사력이 돋보이는 [농가의 결혼식]에서 먹을 것이라고는 죽과 맥주로 보이는 음료뿐이다.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진지한 얼굴에서 폭식이나 탐욕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죽에 머문 백파이프 든 사람의 시선에서, 죽그릇을 손가락으로 훑어 빠는 아이의 모습에서, 허기를 느낄 수 있지만, 그 모습은 거칠고 우습고 추한 것과 거리가 멀다. 이것은 농부를 조롱하고, 보는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의 계절 연작이 자연 속에서 먹을 것을 구하며 자연의 법칙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을 그렸다면, 이 작품은 사회 속에서 사람과 함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미술사에 등장한 수많은 만찬 장면에서 인물들은 식탁 위의 진수 성찬 앞에 앉아만 있을 뿐이었지만, 브뢰헬 작품 속 사람들은 음식을 입에 집어 넣어 실제로 먹고 있다. 먹는 것과 함께 그가 많이 그린 것은 배설하는 장면이다.


 

 

 

[네덜란드 속담], [바벨탑], [교수대 위의 까치]에 등장하는 대변 보는 사람 외에 [아이들의 놀이]에는 쭈그리고 앉아 소변을 보는 여자 아이가 등장하고, 그가 그린 마을 풍경 한 구석엔 건물에 바짝 붙어 소변을 보는 남성이 자주 보인다. 그의 인간은 땅을 비롯한 자연과 공동체의 산물로,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생산하고 소비해야 하는 생명체인 것이다.

 

이유를 알 순 없지만 화가는 40대 초반인 1569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피테르와 얀도 그림을 그렸고 브뢰헬 집안은 4대에 걸쳐 많은 화가들을 배출했다. 그를 아들, 손자와 구별하기 위해 피테르 브뢰헬 1세, 혹은 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이라고도 부른다. 화가였던 첫째 아들 피테르 2세는 소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hel the Younger) 혹은 지옥의 브뢰헬(Hell Brueghel)로 불리는데, 주로 아버지의 작품을 카피하여, 소실된 그의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둘째 아들인 얀은 나름의 개성 있는 화풍을 개발했는데, 꽃과 낙원 장면에 특기를 보였고 사물의 질감을 잘 살려 꽃 브뢰헬(Flower Breughel), 낙원 브뢰헬(Paradise Breughel), 벨벳 브뢰헬 (Velvet Breughel)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피테르 2세의 아들 피테르 3세, 얀의 두 아들 얀 2세와 암브로시우스 브뢰헬(Ambrosius Breughel), 얀의 손자들 다수가 브뢰헬 작업을 계승했다. (이름의 철자는 각자가 조금씩 다르게 사용했다.)


[불구자들] 1568년
패널에 유채, 18×21.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그의 작품을 16점 이상 소장하고 있던 용헬링크가 파산하면서 브뢰헬 작품도 매각되었고 이것이 합스부르크가의 왕족들에게 넘어가 현재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브뢰헬 컬렉션의 기초가 되었다. 얀 브뢰헬과 함께 작업하기도 한 루벤스는 브뢰헬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여러 점을 모았고, 렘브란트도 그의 작품을 소장했다. 그의 작품은 공공 장소에 걸린 것이 없어 오랜 동안 대중은 판화와 복제화만을 접했고, 이것이 그를 ‘익살꾼 브뢰헬’, ‘제2의 보스(Bosch)’로 알려지게 하고,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폄하를 낳은 원인이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반역 천사의 추락]을 구입한 벨기에 왕립 미술관조차 이것을 피테르 2세의 것으로 알았을 정도로, 그의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부족했다.

 

19세기 말에 벨기에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연구가 시작되었고, 작품의 진위에 대한 과학적 연구도 이루어졌다. 그의 이름이 미술사에 자리를 잡은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의 일이다. 20세기 초부터 그는 ‘고딕의 마지막과 근대의 시작을 연결하는 작가’, ‘플랑드르 비종교 미술의 창시자’,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이론과 형식에 대해 대안을 제시한 유일한 화가’, ‘하찮은 인물과 하찮은 사건을 우주적 명상의 중심이 되게 한 화가’, ‘시인들의 화가’ 등의 말로 칭송되었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동원해 그의 작품을 분석한 시도도 있었다.


 

 

관련링크 : 통합검색 결과 보기

 

 

 

김진희 / 미술평론가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